▲ 박현채 주필

쌀밥을 실컷 먹고 죽어봤으면 하는 것이 한국인의 소망이었던 때가 있었다. 1970년대 까지만 해도 쌀밥은 명절 또는 식구들 생일에나 맛볼 수 있는 아주 귀한 것이었다. 국내 생산량이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데다 외화도 부족해 값싼 밀가루를 주로 수입하다보니 쌀이 귀할 수 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정부가 1969년부터 1976년까지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을 ‘분식의 날’, 일명 무미일(無米日)로 정하고 무미일에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쌀로 만든 음식을 팔지 못하도록 했겠는가. 학교에서는 담임교사가 도시락을 검사해 쌀밥을 싸온 학생들에게 체벌을 가하기도 했고 경기도 안성에서는 군청 구내식당에서 백반을 팔다 청와대의 암행 사찰에 걸려 대통령이 직접 나서 군수를 문책하라는 지시를 내린 일도 있었다.
이랬던 쌀의 신세가 불과 40여 년 만에 완전히 뒤바뀌어 이제는 가축 사료로 써야 할 정도가 됐다. 올해 쌀 생산량은 전년보다 20만t 줄어든 399만5천t으로 예측되고 있다. 연간 생산량이 400만t 이하로 떨어진 것은 저온피해가 극심했던 1980년(355만t) 이후 37년 만이다. 과거 같으면 식량부족을 우려하는 목소리로 난리가 났겠지만, 지금은 여전히 쌀 재고를 걱정하고 있는 처지다.
정부의 양곡 재고는 지난 8월 기준 206만t이다. 여기에 민간 보유량 14만여t을 합하면 국내 쌀 재고량은 220만여t이나 된다. 1천만 명이 무려 3년 반이나 먹을 수 있는 막대한 양이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권장하는 적정 재고량 80만t의 2.8배나 되고 연간 생산량의 절반이 넘는 쌀이 창고 안에 수북이 쌓여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인데 정부는 올해 공공비축용 35만t과 시장격리용 37만t 등 72만t의 쌀을 추가로 사들이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규정에 따라 의무 수입해야 하는 쌀 40만9천t도 새로 떠안아야 한다. 재고 부담이 112만t 더 늘어난다는 얘기다.쌀 재고가 쌓일수록 정부의 관리부담은 커진다. 정부가 지난해 양곡 보관비로 쓴 돈은 1천669억원이다. 그러나 이는 순수한 창고 운영비에 불과하다. 고미화(古米化)에 따른 가치하락과 금융비용 등을 합칠 경우 정부에서 부담하는 돈이 6천200억원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다.
막대한 관리비 부담도 문제지만 이젠 쌓아놓을 공간조차 부족하니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다. 노구를 이끌고 따가운 햇볕아래 진땀을 흘려가며 생산한 제품이 천덕구니 신세로 전락했으니 농민들의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세금을 통해 직불금을 부담하는 국민들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쌀이 남아돌고 있는 이유로는 우선 국내 쌀 소비량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1995년 106.5㎏이던 것이 2005년 80.7㎏, 2016년 61.9㎏으로 지난 20여년간 거의 반토막이 났다. 이는 국민들의 식습관이 잡곡밥 선호로 바뀐데다 다른 원료를 사용한 먹거리가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쌀시장 개방을 20년간 유예한 대가로 매년 40만여t의 외국산 쌀을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하는 것도 쌀 잉여의 주된 이유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타결로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한 1995년부터 농산물 대부분을 개방하면서도 쌀시장만은 열지 않았다. 1995년부터 2004년까지 10년간 20만 5000t의 쌀을 의무적으로 수입하는 것을 조건으로 개방을 유예했다. 유예기간 만료일이 다가오자 재협상을 통해 2005년부터 2014년까지 다시 10년간 관세화 개방을 유예했다. 그 대가로 의무수입물량은 연간 소비량의 약 10%나 되는 40만9000t으로 크게 늘어났다.
쌀시장 개방 유예기간이 길어질수록 의무수입 물량이 늘어나는 불리한 조건이 붙어있는데도 불구하고 정부는 쌀의 국제경쟁력 향상 등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한 시간을 벌어야 한다면서 유예를 택했다. 하지만 장장 20년동안 개방을 유예하면서 천문학적인 자금을 농촌에 투입하고도 국산 쌀의 경쟁력은 살아나지 않았고 농민들의 형편도 개선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쌀 의무수입 물량만 잔뜩 늘려놓은 실패작이 되고 만 것이다. 정부는 하는 수 없이 2015년부터 513%의 관세율로 국내 쌀시장을 전면 개방했다, 그러나 20년간의 개방 유예 대가로 재고 과다나 풍작 여부에 관계없이 매년 40여 만t의 쌀을 5%의 저율관세로 의무적으로 수입해야하는 처지다.
정부는 해마다 벼 재배면적을 줄이고 쌀을 가축 사료용으로 공급하기도 하는 등 쌀의 수급균형과 적정 재고를 달성하기 위해 안간 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역부족이다. 이젠 쌀에 편중된 농정 구조를 뿌리채 바꾸지 않고서는 수급을 맞출 수 없는 상황이 됐다. <투데이코리아 주필>
필자 약력
전) 연합뉴스 경제부장, 논설위원실장
전) 언론중재위원회 중재위원
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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