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무 회장

제가 금년 8월에 내려와 살고 있는 제 고향 경북 영천도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을지는 모르지만 우리나라 어느 지방 못지않은 충절(忠節)의 고장입니다. 만고 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이 영천의 충절을 대표하는 분이지요.
임진왜란 당시에 영천 성은 영천의 의병이 스스로 왜적으로부터 탈환한 뒤로 전란이 끝날 때까지 굳게 지켰던 곳입니다. 영천 성 수복 전투는 임진년 7월 24일부터 4일간 벌어져 경상좌도 의병대장 권응수 장군의 지휘 하에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왜군을 완전히 격멸한 임진란의 육상 전투로는 첫 승리입니다. 적의 수급을 벤 숫자가 517, 군마 200여필과 조총, 창검 등 무기 900여점을 노획, 포로로 잡혀있던 우리 민간인 1,090명을 구출하면서 우리 측 피해는 전사 83, 부상 238인으로 기록되어 과시 혁혁한 전과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때 의병의 이름은 창의정용군(倡義精勇軍)이었고 저의 선조이신 국빈(國賓), 군빈(君賓), 용빈(用賓) 삼형제 중 후계를 위해 막내를 집에 남기고 위의 두 형제가 함께 창의하여 ‘선무원종공신록’에 책록이 되었습니다. 그분들의 할아버지가 처야당(處野堂) 이언기(李彦沂) 선생입니다. 그분은 중종 조에 임금에게 경서를 강연하는 자리에서 경전을 강론하고 임금의 뜻을 전하는 인재였으나 국론이 엇갈리고 조정이 날로 그릇되어가는 것을 보고 물러나 시골에 묻혀 살았습니다. 그 후 지방의 훌륭한 선비로 천거되어 영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여생을 야인으로 보내셨습니다. 스스로 호를 ‘처야당’이라고 지을 정도였지요.
그분이 직접 지은 처야당 기문의 일부를 인용합니다. “내가 이 들에서 나서 살면서(生於野), 이 들판에서 농사를 짓고(耕於野), 이 들에서 즐기며(樂於野), 이 들에서 생애를 마쳐서(終於野), 한 야부(野夫)로 그칠 뿐이다.” “내 동정(動靜)이 야(野)하고 내 언어가 야하며, 의식(衣食)이 야하고 거처가 야하니 ‘야’로써 당호를 지음이 마땅하지 아니한가?” “아! 슬프다. 문(文)이 질(質)을 앞질러서 선비들도 오히려 외화(外華)만을 숭상하여 명리(名利)를 구하기에 급급하니 독실한 행실과 충후(忠厚)한 말이 씻은 듯이 없어졌구나. 내가 홀로 문(文)이 지나쳐서 그 중용을 잃기보다는 야(野)하나마 졸렬함을 지키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여 ‘처야당’으로 이름을 정하고 내 본 마음을 지키려 하노라.”
그러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그분의 시를 옮겨보지요. “조그만 초가집이 강가에 우뚝한데 쓸쓸한 한 평생이 가을같이 담박하구나. 책이 사람을 그르쳐서 본뜻을 어기었고 ‘붉은 마음 나라 걱정 머리 이미 희어졌네(丹心憂國已皤頭).’ 몸소 송아지 몰고 때때로 밭을 갈고 꿈속에서 갈매기와 함께 물을 따라 내려가네. 사십년을 홍진에서 노닐었던 몸이 한가한 자연 속에 숨어 살려네.” 이 할아버지의 손자분들이 창의 의병이 된 것이 너무 자연스러워 보이는 대목입니다.
임란 이후 정묘호란 때에는 삼형제분의 아들 대에서 호영(好榮), 희영(喜榮), 장영(長榮), 인영(仁榮) 네 분이 창의하였고, 병자호란 때에는 손자 대에서 유(濡), 즐(瀄) 두 분이 창의하였습니다. 그 중 한 분이 저의 12대조 송남공(松 南公) 이즐(李瀄) 선생입니다. 이분은 1636년 병자년, 만 26세에 한양에 과거 보러 가다가 오랑캐에 길이 막히게 되었는데 인조의 수레가 창졸히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때 많은 사람들이 도망치자 분개하여 “나라가 위급한데 어찌 도망치겠는가?” 하고 말을 바꾸어 타고 임금의 행차를 따라 호종하였습니다.
그 공으로 이듬해에 호종공신으로 책록되어 후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내 어찌 봉록에 연연할 사람이냐?” 하고 물러나 일생을 야인으로 지냈습니다. 소나무 심은 뜰에 은거하여 스스로 ‘송남(松南)’이라고 호를 짓고 학문과 후세 교육에 힘쓰다 72세에 별세하였는데 나라에서 옛 공훈을 기려서 70세에 용양위 부호군(副護軍) 절충장군을 증직(贈職)하였습니다.
시골에 내려와 살게 되니 자연스레 고향의 역사와 선조의 행장에 더욱 관심이 많아지나 봅니다. 어지러운 세상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늘 그랬던 것 같이 생각되지요. 그런 가운데 명리를 초개같이 여기고 세속의 출세에 연연하지 않으면서도 항상 나라가 위급할 때 생사를 초월하여 충절을 지켰던 저의 선조들이 계셨던 것을 후손으로서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투데이코리아 회장>
필자 약력
△전)농림수산부 기획관리실장
△전)세계식량농업기구(FAO)한국협회 회장
△전)농어업농어촌 특별대책위원회 위원장
△전)한국농어촌공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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