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무 회장

“한국에 솟는 태양은 동해에서가 아니고 농촌의 산이나 들이어야 한다. 여기에서부터 우리의 희망은 밝아오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 55쪽에 나오는 글입니다. 2017년 11월 14일, 박 대통령 탄신 100주년이 되는 날에 즈음하여 그분의 각별했던 우리 농업·농촌·농민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그분이 주도한 한국의 경제개발 전략에는 ‘사람중심’, ‘대외지향’ 외에도 또 하나의 빛나는 선택, ‘농공병진’ 전략이 있었습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경제·사회 발전의 요체는 ‘민생’과 ‘국민통합’에 있습니다. ‘농공병진’은 당시의 민생 문제가 바로 농어업, 농어촌, 농어민의 찢어지는 가난이었고, ‘농’을 제치고 ‘공’만 가지고는 국민통합이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을 박 대통령이 한시도 잊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5·16 군사정부가 가장 먼저 손댄 혁명과업이 ‘농어촌 고리채 정리’였습니다. 5월 25일, 불과 9일 만에 ‘농어촌 고리채 정리령’, 그 보름 뒤인 6월 10일에 ‘농어촌 고리채 정리법’이 제정 공포되었습니다. 당시의 농어촌에는 ‘입도선매(立稻先賣)’, 즉 수확도 되기 전에 벼를 미리 파는 일이 예사였고 전 농가의 90%가 부채에, 그중 80% 이상이 연리 50% 이상의 악성 고리채인 ‘장리’에 허덕이는 참담한 상황이었습니다. “농어촌 경제의 안정과 성장 발전에 암적 존재가 되어있던 농어촌 고리채 정리는 혁명정부가 아니고서는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대담한 정책으로서 농어촌 주민이 숨을 돌릴 수 있게 하였다.” 박 대통령이 위의 책 126쪽에 직접 써놓은 기록입니다.
박 대통령의 마지막 공식행사가 1979년 10월 26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그분이 최후의 순간까지 우리 국토의 개조와 농토의 확장, 그리고 농업 생산기반의 확충을 위한 일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심혈을 기울인 증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가뭄과 홍수에 대비한 관개·배수 시설과 농경지 정리를 완비하여 전천후 기계화 농업을 실현하는 것이 그분의 꿈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되어있는 모습을 우리나라 어디서나 눈으로 보면서 안타깝게도 그것이 어떻게 추진되어 이룩된 것인지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주곡인 쌀과 보리의 자급은 박 대통령이 내세운 최우선 정책 목표의 하나였습니다. ‘보릿고개’와 ‘초근목피’는 우리 민족의 오랜 한과 설움이 서려있는 가난과 절망의 표상이었습니다. 이를 몰아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이며, 연례적인 ‘춘궁기 절량농가’를 없애기 위해서는 주곡의 자급이 절실함을 박 대통령은 일찍부터 간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950년대에 1.8톤에 불과했던 ha당 쌀 수확고가 1977년에 4.94톤이라는 당시 세계 최고 기록으로 드디어 녹색혁명이 완수되었습니다. ‘통일벼’는 우리나라 녹색혁명의 상징입니다. 통일벼와 ‘2중 곡가제’에 의한 고미가 정책이 성공의 비결이었고 이는 박 대통령을 빼고는 얘기가 성립되지 못할 정도로 그분의 노력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이외에도 세계가 감탄한 한국 산림녹화의 기적과 그린벨트 신화, 원양 개척과 수산입국의 꿈을 현실로 만들고 끈질긴 집념으로 축산진흥의 의지를 관철한 일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농어업과 농어촌의 발전은 물론 국가의 기초가 되는 일을 동시에 추진하여 눈부신 성과를 창출한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중에서 저는 오늘 두 가지만 덧붙이고 싶습니다. 한국 농업의 구조를 바꾼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과 ‘새마을운동’이 그것입니다.
1968년부터 시작된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은 박 대통령이 손수 기획 단계부터 지휘해서 1976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착실한 농부라면 도시인 못지않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농업의 과학적 현대화와 그 능률을 높이는 일이 매우 시급하고 중대하다.” “농가소득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주곡 생산 위주의 농업에서 탈피, 점차 수출상품과 공업 원료작물에 치중해야 한다. 이것은 ‘먹고사는 농민’이 아니라 ‘돈벌이하는 농민’이 되기 위해서 불가결한 과제이다.” 그분의 말씀입니다. 이 사업은 당시 세계 농정의 화두였던 ‘농업구조개선’의 한국판 버전으로서 단기간에 엄청난 성과를 거두어 농가소득이 도시근로자소득을 앞질러서 신생 한국 공산품의 실질 구매력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세계적으로 보통명사가 된 새마을(Saemaul)운동의 구호는 ‘하면 된다.’와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였습니다. 오늘날 세계에 알려진 한국의 긍정적 이미지 중에서 새마을운동이 ‘원조 한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운동은 자연발생적인 농어민들의 자조적인 노력과 정부의 적절한 재정·행정 지원이 맞아떨어져 한정된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 기대 이상의 엄청난 성과를 거두어 이후 개발도상국 농어촌 개발의 좋은 성공 모델이 되었고 그에 따라 후진국 경제개발 이론을 새로 쓰게 만들었습니다. 바로 ‘박정희 식’ 농어촌 개발의 세계적인 한국 브랜드인 것입니다. 오늘 박 대통령의 탄신 100주년을 맞아 새삼 그분의 위대함과 각별한 농업·농촌·농민 사랑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투데이코리아 회장>
필자 약력
△전)농림수산부 기획관리실장
△전)세계식량농업기구(FAO)한국협회 회장
△전)농어업농어촌 특별대책위원회 위원장
△전)한국농어촌공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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