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4일은 허문회(許文會) 선생님이 돌아가신지 7년째 되는 날입니다. 허 선생은 2008년에 넘어져서 머리를 심하게 다치는 바람에 어려운 투병생활을 2년 넘게 하시다가 2010년 11월 24일 만 83세로 별세하셨습니다. 허 선생은 국내에서는 ‘통일벼의 아버지’로 불리고 해외에서는 세계 벼 육종학의 스승으로 존경받는 분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일생을 통하여 잊을 수 없는 스승 딱 한 분만 꼽으라면 주저 없이 허 선생을 꼽을 것입니다.
허 선생이 통일벼를 육성한 계기는 1960년대에 세계적으로 전개된 녹색혁명으로서 노벨 평화상 수상자 볼로그(Norman E. Borlaug) 박사가 주도한 멕시코의 밀 종자혁명이 시발점이었습니다. 동남아시아 벼 종자혁명의 주역은 벼의 줄기가 짧아서 키는 작되 이삭은 알차고 무거운 종자, ‘IR-8’로서 1960년 필리핀 농과대학 구내에 창설된 국제미작연구소(IRRI)가 그 개발을 주도하였습니다. 허 선생은 2년간 공동연구를 위해 1964년 7월 IRRI에 도착, 한국의 벼 다수확을 위해 인디카 품종에 자포니카 품종을 교잡하여 잘 쓰러지지 않고 냉해와 도열병에 강한 다수확 품종을 육성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허 선생은 인디카와 자포니카의 교배종은 씨가 열리지 않아 종자 증식이 불가능한 치명적 약점을 극복하고 1966년 7월에 일본 품종 ‘유카라’와 타이완 품종 ‘TN-1’의 교배종의 꽃가루 극소량을 IR-8에 교배하여 얻은 20여개의 3원 교잡종을 파종, 마침내 우리 겨레의 숙원이었던 쌀 자급을 가능케 해준 기적의 볍씨 ‘IR-667’, 나중 이름 ‘통일벼’를 채종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당시 벼 육종기술상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것을 3원 교잡을 통해 가능케 한 통일벼 육성은 세계 벼 육종사에 획을 그은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2009년 7월에 실시한 우리나라 국가연구개발 평가결과 과거 50년간의 성과사례 중 통일벼가 단연 1위를 차지하였고, 같은 해 11월에 농촌진흥청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의 40%가 통일벼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의 최고의 연구 성과로 꼽았습니다.
허 문회 선생은 1927년 1월 21일 충북 충주 태생입니다. 1946년 수원 농전(현 서울대 농생대) 농학과에 입학하여 1948년 서울대 농대로 개편, 학업을 계속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현지에서 입대하여 일선 육군 보병 8사단 수색대대에서 곧바로 전투에 투입되었습니다. 1953년 육군상사로 제대, 복학하여 1954년 농학사, 1957년 농학석사, 1968년에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60년에 서울대 농대 전임강사로 임용되어 이후 조교수, 부교수, 교수로 1992년까지 근무, 정년퇴임한 뒤에는 명예교수로 활동하였습니다.
한국작물학회장과 한국육종학회장을 역임하였고, 1977년에 은탑산업훈장과 5·16민족상 학예부문 본상, 2002년에 한국과학기술한림원 농수산학술상을 수상하였으며 2010년에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습니다. 허 선생은 1977년에 수상한 5·16민족상 상금 전액을 예금해두었다가 1992년 정년퇴임 시에 통장 그대로 서울대 농생대 교육연구재단에 기증, 참스승의 진면목을 보여주었습니다.
허 선생은 항상 웃는 낯이었습니다. 저는 선생의 화난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학문과 실험에는 자신과 동료, 제자들에게 실로 한결같이 지엄한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입학 한 달 후면 학생들의 이름을 다 외우고 졸업 후에 우연히 마주친 학생들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허 선생은 아무리 공부를 못하거나 안 해도 C학점 아래로는 학점을 주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안 할 텐데 학점 때문에 공연히 앞날에 지장을 줄 필요는 없지.”라는 생각이었지요. 제가 그 수혜자의 한 사람입니다. 기말시험 때 공부를 안 해서 백지에 한시를 한 수 적어 내었는데 그분이 웃으면서 C를 주신 덕분에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지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제가 1971년 행정고시에 합격해서 농림부에 근무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우연히 허 선생님을 복도에서 마주쳐 인사를 드렸더니, “아니, 자네가 여기 웬일인가?” 하셔서 사무관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분이 잠시 한숨을 쉬시기에 왜 그러시냐고 여쭈었더니, “아, 자네 같은 사람이 농림부에 사무관이라니 이 나라 농정의 앞날이 걱정되지 않겠는가?”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그 한 마디로 제가 가야 할 길을 너무도 확연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제자로서 우리 농정의 앞날에 절대로 그분이 걱정하실 일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허 선생이 2000년 스승의 날에 제자들에게 써준 한시 ‘동승 세월주 유감(同乘 歲月舟 有感)’을 인용합니다. “세월을 같이 타고 흘러가는 배(合乘歲月流下舟), 영겁 속의 찰나를 완급으로 흘러가며(緩急刹那永劫流), 양안의 풍물을 같이 느끼니(同感風物兩岸景), 송영하는 이 기연 감사하며 노래하오(送迎奇緣謝歌謳).” 선생님! 그립습니다. 그리고 삼가 다시 한 번 명복을 빕니다. <투데이코리아 회장>
필자 약력
△전)농림수산부 기획관리실장
△전)세계식량농업기구(FAO)한국협회 회장
△전)농어업농어촌 특별대책위원회 위원장
△전)한국농어촌공사 사장
이상무 회장
sangmu00@todaykorea.co.kr
통합뉴스룸/산업금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