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은경 작가


설 명절을 전후해서 슬픈 일이 두 건이나 있었다. S동생으로 친하게 지내던 지인의 남편이 암으로 돌아간 것이다. 촉망받던 학자로 교수로 바쁜 삶을 살았던 그의 나이는 53세에 불과했다. 투병생활의 세세한 사연을 동생에게 틈틈이 전해 들었고 기운을 차려 이겨나갈 것 같다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들은 지 두 달도 안 된 지라 갑작스런 그의 부음은 나의 뇌리를 강타하기 충분했다. 또 하나는 딸의 절친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딸이 미국에서도 힘들다는 뉴욕대학의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동안 함께 박사 과정에 있었던 유일한 한국인 동료로서, 그와의 우정이 아니었으면 딸이 무사히 과정을 마칠 수 없었을 지도 몰랐다.

나도 딸을 만나러 뉴욕에 가서 그녀와 함께 굴 요리를 먹었고 재즈 카페에 가서 음악도 들었다. 그 후에도 직접 만나진 않았지만 줄곧 그녀의 소식을 듣고 있었다. 공부할 당시에도 심장이 안 좋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건강상의 어려움을 딛고 모교의 교수가 된 그녀가 한창 꽃피우지도 못하고 갑자기 쓰러져 사망했다니 그렇게나 허무할 수가 없었다. 뉴욕에 있는 딸과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둘이 동시에 울음을 터뜨렸다.

딸은 지난주에도 그녀와 카톡 통화를 했다며 너무나 충격을 받은 나머지 모든 친구들에게 – 아직 살아 있는 거지? 살아 있으면 답장을 해 줘!- 라는 카톡을 보냈다고 했다. 내게도 한참이나 소식이 끊겨진 친구들이 있었다. 그 날, 잠이 오지 않은 한 밤중에, 많은 날을 함께 보냈던 사람들을 하나씩 기억에 불러내어 보았다.

돌이켜 보아도 나는 좋은 사람들을 많이 알고 지낸 행운이 있었다. 그 중 몇 명은 사는 곳이 너무 멀리 떨어져서, 또는 더 이상 관심을 가지는 분야가 일치하지 않아서 서로 연락이 끊긴지 오래 되었지만 생각하면 여전히 그리웠다. 그 중에는 내게 삐져서 화를 내고 연락을 거절한 사람도 둘이나 되었다. 둘 중 하나는 심각한 사교(邪敎)에 빠져 있어 더 이상 내 충고를 받아들일 사람이 아니었다. 나머지 한 사람에게 카톡을 보냈다.

-우리 지난날의 잘 잘못을 따지지 않기로 하고 이제부터 다시 연락하며 지내면 어떨까? 동의하면 답장을 보내 주련?-

그 날 하루 종일 고택의 마루를 기름칠했다. 마루를, 기둥을, 문짝을, 고운 솔로 붓질하고 쓸고 닦았다. 그러면서 내가 아는 많은 고택들이 하루하루 힘겹게 세월을 견디다가 조금씩 기둥에 좀이 슬고 서까래가 썩고 쓰러지면서 말벌의 집이 되어가고 흰개미의 무덤이 되어 가는 것을 생각했다. 세월이 지나가면 많은 것이 풍화되어 먼지가 되어간다. 기둥을 새로 하고 서까래를 갈고 새와 벌레들을 퇴치하고 기름칠을 새로 하면서 보존해야 한다. 우정과 사랑을 오래 간직하려 해도 마찬가지로 공이 든다. 불행히도 우리의 육신이 한 줌의 재로 변할지라도 친구와 가족의 마음에 살아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천국이 아닐까?

S동생의 남편은 돌아가기 전 “당신, 이제 병이 다 나으면 무엇 하고 싶어?”하고 물어보니 온 종일 실험실에서 살았던 학자인 교수의 말이 “난 꽃을 많이 심고 가꾸며 살고 싶어”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시골집에서 꽃을 가꾸며 여생을 보내겠다고 한다.
딸의 친구는 평소에도 세 명의 손위 시누이 모시기가 너무 힘들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 이들이 나빠서가 아닐 것이다. 다만 사랑하는 남동생에 대한 배려가 그 처의 심장에는 큰 부담이 되어 돌아왔을 것이다. 그 이 또한 꽃을 심고 가꾸고 살았다면 좀 더 오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부질없는 생각을 해 본다. 이승에서의 성취가 목숨을 갉아 먹는지 모두 알면서도 피할 수 없었겠지. 이번 봄이 오면 그 분들 몫까지의 꽃을 더 심어야겠다.

놀러 와요. 꽃동산에.

<작가>
조은경 약력
△2015 계간문예 소설부문 신인상 수상
△소설 '메리고라운드' '환산정' '유적의 거리' '아버지의 땅'등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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