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순직 주간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此)로서 세계만방에 고하야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명(克明)하며, 차로서 자손만대에 고하야 민족자존의 정권(正權)을 영유(永有)케 하노라.....금일 오인의 조선독립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정당한 생영(生榮)을 수(遂)케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사로(邪路)로서 출(出)하야 동양의 지지자인 중책을 전케하는 것이며.... 아아,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되도다. 위력의 시대가 거하고 도의의 시대가 내하도다.... ”
공약삼장
-. 금일 오인의 차거(此擧)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니, 오즉 자유적 정 신을 발휘할 것이오,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逸走)하지 말라.
-.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오인의 주장과 태도로 하야금 어데까지던지 광명정대하게 하라.

지금으로부터 99년전 1919년 3월1일 우리의 선조들은 일제에 맞서 독립을 선언했다. 필자는 지난 2월28일 기미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탑골공원과, 태화관 자리를 찾았다. 탑골공원에 세워진 선언서 비문을 읽는 분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고, 삼일독립선언유적지라는 표지석이 세워진 서울 인사동 태화관터에서는 ‘독립선언서의 길을 걷다’라는 역사강연과 역사탐방투어가 진행되고 있었다. 6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세대는 ‘오등은 자에 아...’로 시작되는 이해하기 어려운 독립선언서를 즐겨 읽었고, 암기력 좋은 친구들은 1,762자의 선언서를 줄줄 외우며 애국심을 자랑하던 기억이 새롭게 다가왔다.

민족지도자들은 당초 이 선언서를 탑골공원에서 낭독하려 했으나, 생각보다 많은 인파가 몰리자 급하게 태화관으로 자리를 옮겨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그리고 그들은 시위가 격렬해질 것을 우려해 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자진 투옥되었다.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서 선언서를 낭독하고있을 때인 기미년 3월1일 오후2시경, 5,000여명의 학생과 시민이 모인 탑골공원에서는 한 학생이 나와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정재용이라는 학생이다.
선언서는 천도교측 15명, 기독교측 16명, 불교측 2명등 33인이 민족대표로 서명한 후에 2만1,000매가 인쇄되어 2월28일부터 전국 각지로 전달, 배포되었다. 비록 민중 앞에서 민족대표가 낭독하지는 못했지만 전국에 전달된 이 선언서는 3.1독립선언의 기폭제가 되었고, 전국으로 모든 계층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선언서 작성 경위를 살펴보자. 그해 1월 중순 1차 모임을 가진 손병희 오세창 최린 권동진등 민족지도자들은 처음에는 건의서 형식의 ‘독립청원서’를 일본정부에 낼 것을 논의했으나, 2차 모임에선 청원서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동시에 발표하기로 합의한다. 그러나 최린 등 일부 인사가 청원서는 민족자결의 의미가 약할 뿐만 아니라, 대내외적으로 독립을 위해 싸우겠다는 결연한 민족적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선언서’를 강력하게 주장함으로서 기미독립선언서 채택에 이른다. 초안 작성은 최남선에게 맡겨졌다. 공약3장은 선언 후에 한용운이 추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삼일독립선언서의 전체적인 정신은 근대의 서구사상인 자유 평등 인권 도의사상을 반영하여 우리 민족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온 문화민족임을 강조, 일본의 침략에 대결하여 정의와 인도에 입각한 민족의 자유와 독립 평등을 요구한 것이다. 1,762자의 선언서에는 조국의 독립을 선언하는 내용과 인도주의에 입각한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족자결에 의한 자주독립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 전해오는 국내외 각국의 독립선언과 비교해도 결코 손색이 없는 명문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오늘날 읽고 또 읽어보아도 이보다 더 훌륭한 독립선언서를 누가 작성할 수 있을 것인가, 33인의 민족지도자들에게 고개 숙여 존경하는 바이다.
올해 3.1절 기념행사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거행됐다. 나름대로 의미 있는 결정이라고 생각된다. 1908년 경성감옥으로 문을 연 이곳은 일제 식민시대 내내 의병 또는 독립운동가들이 고초를 겪고, 갖은 고문을 겪고,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순국한 곳이다. 문재인정부가 출범 첫 3.1운동 기념식을 이곳에서 치른 것은 기미독립운동의 상징성과 현장성을 살렸다는 의미가 있다.

99번째의 3.1독립혁명일을 보내면서 내로라하는 정치인들이 현충원이나 국립묘지를 참배하는 형식적인 발걸음 행사가 눈에 어른거린다. 그들이 과연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던 순국열사들을 진심으로 기리며, 나라와 국민에게 봉사를 다짐하며 현충원을 다녀오는지 묻고싶다. 무능한 정권을 교체하는데 성공한 촛불시위를 저 유구한 역사적 민중봉기인 동학농민전쟁이나 3.1독립혁명 4.19학생혁명 그리고 6월민주항쟁과 동렬선상에 놓으려는 시도는 아직 성급하다는 것이 필자 생각이다. 좀 더 긴 호흡으로 역사에 맡겼으면 한다. 그리고 국민을 위한다는 위정자, 정치인들은 한 달에 한 번씩 기미독립선언서를 읽고 국가와 민족에게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길 기대해본다. <투데이코리아 논설주간>
필자약력
△전)동아일보 경제부장, 논설위원
△전)재정경제부 금융발전심의회위원
△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관리위원
저작권자 © 투데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