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은경 작가


정월 대보름이 있는 주일이다. 은근히 이 날을 기다렸다. 시골에 있으면서 음력 정초보다 대보름에 더 많은 행사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선 먹거리가 화려하다. 떡국 한 그릇 먹고 보낸 설 보다 먹을거리가 많다. 이 곳 경상도에 내려와서 신기한 사실 중 하나가 정월 대보름에 진짜 약식을 먹는다는 것이다. 막연히 오곡밥을 먹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내가 잠시 있었던 전라도에도, 오랫동안 살았던 서울에서도 이 곳 경상도처럼 화려한 약밥을 먹어보지 못했다. 알아보니 신라의 전통이 경상도 이곳에 오랫동안 전해 내려왔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21대 소지왕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까마귀에게 은혜를 갚는 방법으로 약밥을 만들어 올린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게다가 약밥은 까마귀가 일어나기 전에 먹어야 한다는 속설 때문에 아침 일찍 먹는다고 했다. 찹쌀을 찌고 곶감, 밤, 대추, 땅콩에 잣과 호두 등을 넣어 꿀과 간장에 버무려 만든다는데 바로 그와 비슷한 약밥을 형님 댁에서 얻어먹게 되었다. 서울 일반 떡집에서 사 먹는 달콤한 약식과는 다른, 꿀과 간장을 자제한 주식으로서의 약식이다. 정말 맛있어서 염치 불구하고 두 그릇을 먹었다. 게다가 나물 숫자만 헤아려 봐도 여덟 가지다. 옛날 식 대로라면 지난 가을에 말린 나물들만 썼겠지만 지금 생산되는 햇나물까지 상에 올랐으니 그런 호사가 없었다. 귀밝이술에다가 부럼도 내어 주셨다.

마을에서는 대보름 전날 밤 12시에 동제를 지냈다고 한다. 한밤중이라 주민 중 젊은(?)몇 명만 당산나무 앞에서 제사를 올렸는데 정월 대보름에 하는 첫 번째 중요한 행사라고 했다.

마을회관에서는 동민들 모두가 모여서 회의를 하고 점심을 함께 먹은 후에 윷놀이를 했다.
윷놀이는 다음날까지도 이어졌다.

대보름날 어두워질 무렵, 영천시에서 주최하는 –달집 태우기 행사-에 갔다. 금호강변 멋있게 공사를 끝낸 수변공원 한 가운데에 보기에도 까마득하게 나무를 쌓아놓고 만일을 대비하여 옆에 불자동차가 대기한 채, 달집 한 끝에서부터 불을 붙여 태우기 시작했다. 풍요의 상징인 달이 떠오를 때, 부정과 사악함을 불살라버리는 정화의 상징으로서 달집을 태우는 것이다. 주변엔 갖가지 색깔의 한복을 입은 여인네들이 강강술래를 춤추며 돌아가고, 또 다른 동심원으로는 하얀 공연복을 입은 풍물패가 흥겹게 북과 꽹과리를 치며 돌아간다.

활활 타오르는 불은 따뜻하고 주변의 시민들은 서로가 박수를 치며 흥을 돋운다. 달집 태우기 전에 식전 행사로 농악대와 가수들의 무대도 있었다. 주변의 천막에선 서울에서 보기 드문 번데기도 팔고 솜사탕도 팔고 어묵과 막걸리도 판다. 하루 종일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이 조금씩 어두워지면서 달이 솟는다. 그것도 비현실적으로 크고 완벽한 둥근 달이.

이 완벽함을 준비하느라고 전날 그렇게도 바람이 불었고 이른 봄비가 밤새 내렸나 보다. 대보름날은 낮에 15도까지 올라간 푸근한 봄날이었다. 하늘은 종일 청명했고 자외선 지수는 낮음에 미세먼지 계기는 좋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울의 날씨가 아침 영하 5도의 반짝 추위를 보였던 것과 대조적으로 온화한 날씨였다. 따뜻한 남쪽 나라로 내려온 보람이 있었다.

시골에 있어보니 정월 대보름이야말로 한 해 농사의 시작인 것을 알겠다. 농사를 앞두고 둥근 달님 앞에서 저절로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경건한 마음이 되는 것은 귀촌주부인 내게나, 농촌에 사는 누구에게나 드는 당연한 마음일 것이다.

올해 정월 대보름날은 하루 종일 아름다운 날이었다.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에 가려 별님 하나 보이지 않았던 밤까지도.

넓은 밤하늘을 몽땅 차지하신 달님, 달님!
내 소원 들어주실 거죠?

<작가>
조은경 약력
△2015 계간문예 소설부문 신인상 수상
△소설 '메리고라운드' '환산정' '유적의 거리' '아버지의 땅'등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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