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차산업

    [기획] 끝나지 않은 한반도 ‘대구전쟁’ - 치명적 매력의 역사 (上)

    한국 넘어 전세계 식도락가들의 혀끝을 사로잡은 대구
    기사입력 2018.03.13 17:06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내용 메일로 보내기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1.jpg▲ 싱싱한 자태로 손님맞이 준비에 나선 대구들.
     

    [투데이코리아=오주한 기자] 바야흐로 ‘대구전쟁’의 시대다. 대단한 먹성으로 ‘클 대(大)’ ‘입 구(口)’ 합쳐서 ‘대구’라는 이름이 붙은 대구목 대구과의 이 어류를 ‘국민생선’으로 다시 소생시키기 위해 전국 각 지자체에 비상령이 내려진 상태다.

    살이 희고 담백하며 쫄깃하고 크기도 커서 탕, 찜 등 다양한 요리재료로서 사랑을 받아온 대구는 한때 한반도 수역에서 자취를 감출 뻔 했다가 인위적 노력으로 근래 겨우 개체수가 늘어나고 있다.

    1980년대 이전만 해도 풍부한 조업량을 자랑하던 대구는 이후 무분별한 남획, 중국 어선 불법조업 등 영향으로 수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유통량이 낮아지면서 가격은 폭등해 1990년대에는 60~70cm 길이의 대구 한마리가 20만~30만원에 팔리면서 ‘금대구’라는 칭호가 붙었다.

    이로 인해 대구는 서서히 국민들의 밥상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유통업계 통계에 의하면 한때 수산물 판매량에서 고등어, 갈치와 함께 상위권을 차지하던 대구는 작년 밑바닥 순위까지 추락했다. 그 자리는 대신 연어 등 수입산 수산물이 채웠다.

    어민 파산이 잇따르고 국민 불만도 가중되자 정부, 지자체는 1987년부터 시작된 수정란 방류사업을 확대하고 1월 한달 간 금어기를 설정하는 등 자구책을 마련했다. 다행히도 실효를 거둬 1990년 487톤이라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한 대구 어획량은 2000년대 들어 1천톤대를 회복해 2014년 9940톤의 실적을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대구 판매량은 좀처럼 늘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아 각 지자체는 지금도 수정란 방류사업을 지속하는 한편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판촉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1990년대부터 시작된 ‘대구전쟁’은 약 2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은 셈이다.

    2.jpg
     
    ▲ 영국의 대표적 서민요리인 ‘피시 앤드 칩스’. 현지인들은 신문지에 싸먹는 것을 최고로 친다.
     

    바이킹 ‘베르세르크(광전사)’의 입맛까지 사로잡은 대구

    대구는 사실 우리 민족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사랑받은 생선이다. 서구권에서 가장 유명한 대구 요리는 아무래도 영국의 ‘피시 앤드 칩스(Fish and Chips)’다. 단순하기로 유명한 영국요리답게 피시 앤드 칩스는 말 그대로 물고기(Fish)를 튀긴(Chip) 것이다. 대구와 감자를 함께 튀긴 채 나오는 게 일반적이다.

    대구는 중세 서양판 흉노, 몽골족이라 할 수 있는 바이킹(Viking)의 전투식량으로 쓰이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바이킹이 살던 북유럽은 춥기로 유명한 곳이다. 자연스럽게 대규모 농사는 사실상 불가능했으며 북유럽 남성들은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특유의 곡선형이 특징인 선박 롱십(longship. 당대 현지어로 랑스킵)을 타고 서유럽, 멀게는 남유럽까지 ‘털러’ 나섰다.

    롱십은 길이가 평균 25m에 불과할 정도로 소형선박이었기에 사람과 약탈물만 겨우 실을 수 있는 크기였다. 제대로 된 식량을 넉넉히 실을만한 면적의 여유가 없었기에 바이킹은 함내 보존식으로 말린 대구를 널판지처럼 쌓아 갖고 다녔다. 이 말린 대구가 없었다면 바이킹의 유럽 원정과 왕조 건설도, 빈란드(Vinland)사가의 전설도, ‘그린란드(Greenland)’ 발견이라는 희대의 사기극도 존재할 수 없었다.

    부연하자면 당초 약탈에 열중했던 각 바이킹 부족들은 영국 등지에 정착해 노르만 왕조 등의 시대를 열었다. 빈란드사가는 아이슬란드에서 기록된 두 서사시인 ‘그린란드 사가’ ‘붉은 머리 에리크 사가’를 통칭하는 말로 바이킹의 빈란드(지금의 북미대륙) 발견을 담고 있지만 진위여부를 둘러싼 학계 의견은 분분하다.

    그린란드는 이 동토의 땅을 처음 발견한 인물이자 ‘붉은 머리 에리크(Erik)’의 아버지인 ‘붉은 수염 에리크’가 이주자 모집을 위해 ‘허위로’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99%가 얼음으로 뒤덮인 이 땅에도 ‘1%’의 따뜻한 지역이 있어 완전사기는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3.jpg▲ 3차 대구전쟁 과정에서 교전 중인 영국·아이슬란드 군함.
     

    英·아이슬란드 전쟁까지 야기한 ‘전범’ 대구

    대구는 인류 전쟁사에도 길이 남을 ‘족적’을 남겼다. 영국과 아이슬란드는 이름 그대로 ‘피 터지는’ 대구전쟁을 1958~1976년 사이 벌인 바 있다.

    발단은 1945년 발표된 미국의 ‘대륙붕 선언’이었다. 당시 대구잡이로 생계를 이어나가면서 은근슬쩍 조업을 방해하는 영국을 곱게 보지 않던 아이슬란드인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어업전관수역을 기존 3해리에서 4해리로 늘렸다가 1958년 아예 12해리로 늘리겠다고 선포했다. 이에 영국이 강력항의하면서 자국 선단에 구축함 등을 호위로 붙여 아이슬란드 수역에 파견함으로써 대구전쟁의 막이 올랐다.

    그해 10월 아이슬란드 경비정이 영국 선단에 3발의 위협사격을 가하면서 긴장은 고조됐다. 11월에는 양국 군함 대치상황까지 발생했지만 1961년 영국 정부가 아이슬란드 어업전관수역을 12해리로 인정하고 대신 분쟁 재발 시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하기로 제안함으로써 1차 대구전쟁은 다소 싱겁게 끝났다.

    하지만 바이킹의 피를 이어 받은 ‘근성의’ 아이슬란드인들은 약 10년 뒤인 1972년 어업전관수역을 무려 50해리로 늘리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영국은 약속대로 ICJ 제소를 경고했지만 아이슬란드 정부가 거부함에 따라 2차 대구전쟁이 시작됐다.

    제대로 된 해군전력이라고는 갖추지 못했던 아이슬란드였지만 해양경비대 총전력인 경비정 6척을 동원해 커터로 영국 트롤어선 그물을 자르는 등 영해사수에 나섰다. 1년 간 영국 어선 68척, 그리고 어느새 영국 뒤를 따라 아이슬란드 영해로 들어온 서독 어선 15척이 피해를 입자 영국은 미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군함을 파견하기로 했다.

    미국은 아이슬란드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를 탈퇴해 소련 영향력 하에 들어갈 가능성을 우려했지만 영국이 순순히 물러서기에는 대구가 갖는 경제력이 엄청났다. 또 한 때 로열네이비(Royal Navy)를 앞세워 전세계를 정복했던 영국이 보기에 아이슬란드 해상전력은 그야말로 ‘당나라군대’ 수준이었다.

    급기야 1973년 5월 아이슬란드 경비정이 영국 어선에 함포 4발을 명중시키는 상황이 발생했다. 같은해 8월에는 영국 선박과 충돌한 아이슬란드 경비정에서 수병 1명이 사망하는 최악의 사태가 빚어졌다. 설상가상 아이슬란드가 나토 탈퇴를 선언하자 위기를 느낀 미국이 중재에 나서 이번에도 영국이 양보하는 것으로 2차 대구전쟁은 아슬아슬하게 막을 내렸다.

    하지만 한번 불 붙은 양국 감정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1974년 전세계를 덮친 중동발 오일쇼크(Oil Shock)는 3차 대구전쟁의 도화선을 당겼다. 무역적자 1억5천만달러를 기록하는 등 경제파탄 위기를 맞은 아이슬란드가 영국과의 협약은 ‘쌈 싸먹고’ 1975년 어업전관수역을 200해리로 대폭 확대하겠다는 일방적 선언을 내놓은 것이다.

    1~3차 대구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것이 3차 대구전쟁이다. 양국은 해상전력을 총동원해 선체충돌, 함포사격 등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이번에도 ‘냉전카드’를 꺼내든 아이슬란드는 미국으로부터 애쉬빌급 고속정 수입이 거부당하자 소련의 미르카급 호위함을 구매하겠다면서 소련과 접촉하는 대형사고를 쳤다.

    소련이 아이슬란드에 활주로와 잠수함·미사일기지를 건설하고 유럽 전역에 핵공격 위협을 가하는 악몽에 시달리던 나토는 이번에도 개입해 피 말리는 심정으로 양국 화해를 주선했다. 그러나 영국은 이번에는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1976년 또다시 양국 함정이 충돌하고 아이슬란드가 영국과의 국교를 단절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갈 데 까지 갈 것 같던’ 이 3차 대구전쟁이 전환점을 맞은 건 영국 내부의 자국 비판여론이었다. 대구 조업량 좀 늘리겠다고 우방국을 적국으로 돌려 전유럽에 핵전쟁 위기를 불러올 수는 없다는 지적이 이어진 것이다. 결국 이번에도 영국이 아이슬란드에 ‘항복’함으로써 장장 약 20년을 끌어온 대구전쟁은 완전한 종결을 맞을 수 있었다.

    지금도 아이슬란드인들은 무적의 로열네이비를 꺾었다는 착각 아닌 자부심에 빠져 매년 6월17일인 내셔널데이(독립기념일)에서 대구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고 있다. 물론 전쟁 와중에도 양국 어선 그물에 정신없이 빨려들어가 튀김옷을 입어야 했던 대구들이 과연 누구 편을 들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계속>
    <저작권자ⓒ:: 투데이코리아 :: & www.todaykorea.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투코칼럼
  • [박현채 칼럼]위기의 자동차 산업, 수소차가 살릴 수 있으려나
  • 박현채 주필|2018-12-14
  • 현대자동자가 ‘수소연료전지자동차 (수소차, FCEV)’에 운명을 걸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총괄 수석부회장은 최근 현대모비스 충주공장에서 열린 수소전지 2공장 기공식에서 ‘수소연료전지자동차 비전 2030’을 발표하고 수소차 분야에서 세계시장을 선도하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수소차는 연관산업 파급효과가 크고 부품 국산화율이 99%에 달해 침체된 국내 자동차산업을 살리는 원동력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국가 차원의 신성장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수소차는 일종의 전기차다. 일반적인 전기차가 외부의 플러그를 통해 전기를 공급받아 배터리를 충전하고, 이 배터리를 이용해 모터를 구동하여 주행한다면, 수소차는 연료 탱크에 주입된 수소가 공기중의 산소와 화학 반응을 일으키면서 만들어진 전기로 배터리를 충전하고, 이를 통해 모터가 구동하는 방식이다. 수소를 주입해야만 갈 수 있기 때문에 통상 ‘수소차’라고 부르나 바퀴를 굴리는 최종동력은 전기니까 ‘수소전기차’나 ‘수소연료전지차’로도 일컬어진다. 수소차는 전후방연관효과가 무척 큰 시스템산업이다. 휘발유 등 내연기관 자동차는 부품수가 무려 2만2천여 개나 된다. 하지만 일반 전기차는 엔진이 필요없어 1만2천여 개에 불과하다. 수소차는 일반 전기차와 유사하지만 연료전지스택과 수소저장장치가 추가로 탑재되기 때문에 부품 수가 일반 전기차보다 훨씬 많다. 내연기관 자동차와 비슷한 수준이다, 수소차가 활성화되면 최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동차 부품업계 등에도 적잖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수소차의 장점은 많다. 우선 배기가스가 전혀 발생하지 않는데다 공기중의 미세먼지를 빨아들여 정화시키기 때문에 ‘돌아다니는 공기청정기’라고 불린다. 가장 진화한 수소차로 평가받는 현대차의 넥쏘에는 3단계 공기정화 시스템이 탑재돼 있다. 수소와 산소를 결합해 전기를 만들려면 순수한 산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외부로부터 유입된 공기는 공기필터를 거치면서 초미세먼지의 97% 이상이 걸러진다. 이후 건조해진 공기를 촉촉한 공기로 바꿔주는 가습막을 거치고 공기를 연료전지 셀에 골고루 확산시키는 장치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나머지 3%의 초미세먼지도 제거된다. 현대차에 따르면 넥쏘 한 대가 한 시간 운행할 때 정화되는 공기의 양은 26.9㎏로 성인 42.6명이 한 시간 동안 호흡하는 분량이다. 넥쏘 10만대가 하루 2시간을 달리면 서울특별시 전체 인구(985만명)의 86%에 해당하는 845만명이 한 시간 동안 숨을 쉴 수 있는 청정산소가 형성되는 셈이다. 가솔린이나 경유 자동차는 환경 오염의 주범이지만 수소차는 미세먼지까지 줄일 수 있는 청정산업이다. 수소차의 또 다른 장점은 짧은 충전시간과 긴 주행거리다. 현재 40kwh의 배터리를 장착한 일반 전기차는 한 번 충전으로 300㎞ 중반대를 달릴 수 있다. 충전에 걸리는 시간은 급속충전기를 이용할 경우 30분 안팎, 완속충전 시에는 4시간 이상이 걸린다. 그러나 넥쏘는 5분 만에 수소탱크를 다 채우고 600㎞를 달릴 수 있다. 하지만 차 값이 비싸고 충전소 등 인프라 구축에 돈이 많이 드는 것이 문제다. 수소차에 들어가는 연료전지 자체가 고가다. 지난 2013년 현대차가 처음 내놓은 투싼 수소차 가격이 1억5000만원에 달했지만 최근엔 기술 발전으로 비용 부담이 크게 줄기는 했다. 그래도 옵션을 넣고 나면 7천만 원이 넘는다. 또한 수소연료라는 특수성 때문에 여러 안전장치가 필요해 수소충전소 한 곳을 세우는데 20~30억 원이라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다. 그러니 민간 기업의 힘만으론 다량의 충전소를 설치하기가 힘들다. 국내 일반 소비자들이 접근 가능한 수소 충전소가 채 10곳도 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수소충전소 설치에 따른 각종 규제가 많다는 것도 수소차의 대중화를 막고 있는 주된 요인이다. 수소를 위험물로 인식, 규제를 하다보니 학교 부지로부터 200m 안이나 대형마트 등 상업시설 내에는 설치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등 도심충전소 설치가 어렵다. 또한 수소 충전은 충전소 직원만 할 수 있게 규정되어 있어 수소셀프충전소도 불법이다. 또 하나의 과제는 수소충전 가격이다. 현재 하이브리드나 전기차를 구매하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연료비 절감이 목표다. 일반 전기차가 차 값이 비싸고 주행거리나 충전 인프라 등에서 많은 제약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팔리는 것은 휘발유나 경유에 비해 충전비용이 무척 싸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소충전 가격은 비싼 운송비용 등으로 싸지 않고 충전소별 가격 편차도 크다. 수소탱크 용량이 6.33㎏인 넥쏘의 경우 수소충전비용이 가장 저렴한 울산에서는 2만8천원 선에서 완충이 가능하나 창원에서는 6만3천원대로 현재 디젤차량과 비슷한 수준이다. 굳이 값비싼 수소차를 살 만한 메리트가 없는 것이다. 수소차는 지난해 말 현재 일본, 미국, 유럽 등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5천여 대가 보급되어 있다. 그러나 현대차가 5년전 세계 최초로 수소차 상용화에 성공한 우리나라에서는 고작 183대가 보급되어 있을 뿐이다. 현대차의 수소차 판매량도 지금까지 1000여대에 그쳐 일본 도요타의 5300여대, 혼다의 2000여대에 훨씬 뒤진다. 기술력은 앞서 있지만 국내 수소차 판매량은 이처럼 미미하다. 충전소 등 관련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해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때문이다. 그러나 수소차가 대중화되면 다양한 비즈니스 기회가 발생한다. 일본과 독일, 중국 등 세계 강대국들은 산업 연관효과가 워낙 크고 환경 문제와도 직결돼 있어 보조금지급 등을 통해 국가적 산업으로 육성하는 등 수소경제 구현에 목을 매고 있다. 우리도 2005년부터 수소경제 마스터플랜을 기획했지만 여러 이유로 무산된 바 있다. 잃어버린 13년을 따라잡기 위해 지난 6월 ‘산업혁신 2030 로드맵’을 꺼내 들었지만 계획만 있을 뿐 구체적 시행방안은 없다. 이젠 대기 정화와 새로운 일자리 창출, 자동차 산업의 지속 성장 등을 위해 정부가 다양한 지원책을 내놓아야 하겠다. &lt;투데이코리아 주필&gt; 필자약력 △전)연합뉴스 경제부장, 논설위원실장 △전)언론중재위원회 중재위원 △전)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 [김성기 칼럼]‘脫원전’ 국민투표까지 갈 필요 없다
  • 김성기 부회장|2018-12-07
  • 대만이 지난 11월 탈(脫)원전 정책을 채택한 지 2년 만에 국민투표를 통해 정책을 폐기하자 국내에서도 비현실적인 탈원전 정책을 재고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과학적인 근거도 없이 막연한 불안감을 부추겨 탈원전으로 가는 정책은 에너지 수급에 중대한 장애를 초래, 나라의 장래를 크게 위협한다는 지적이다. 대만의 탈원전 정책 폐기를 주도한 대만 칭화대 원자과학원의 예쭝광 교수는 국민투표 직후 국내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원자력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불안, 유언비어에 현혹됐던 국민이 작년 대정전과 심각한 대기 오염을 겪으면서 원전 필요성을 깨닫게 됐다”고 전했다. 대만은 11월 24일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찬성 59.5%대 반대 40.5%로 탈원전 폐기를 선택했다. 대만은 환태평양지진대에 들어 있어 지진이 자주 발생하고 국민의 막연한 원전사고 불안감도 높았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불안감은 최고조에 달해 유언비어가 난무했고 2016년 탈원전 정책을 공약으로 내건 민진당 정권이 탄생했다. 그러나 예 교수를 비롯한 대만 과학자들은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원전의 안전성을 강조했다. 또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원전이 대기오염 방지에도 적합하다는 점을 대만 국민에게 널리 알려 탈원전 폐기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국내에서도 에너지 관련 학회를 중심으로 과학자들이 나서 꾸준히 탈원전 정책의 허상과 문제점을 지적해왔다. 지난달 하순에는 57개 대학 교수 210명이 가입한 ‘에너지 정책 합리화를 추구하는 교수협의회’가 국민투표를 촉구하는 대정부 성명을 냈다. 이들은 정부가 “국민의사와 전문가 의견을 반영하는 절차도 없이 무책임한 환경단체의 비현실적 주장만 반영했다”며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국민의 의사를 묻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정부는 “대만 사례는 우리와 다르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정부가 어떤 의미에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모르겠으나 우리나라가 지질과 자연환경, 과학기술 수준 및 원전 안전도 등에서 대만 사례와는 크게 다른 게 사실이다. 최근 크고 작은 지진이 발생했지만 대만 사례처럼 원전 안전을 직접 위협할 수준이 아니며 원전 건설과 운영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을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다. 우리가 훨씬 더 안전하게 원전을 가동할 수 있는 여건을 갖췄다는 말이다. 정부와 관련 업계도 한국 원전의 기술수준과 안전성을 앞세워 해외진출을 홍보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신규 원전 건설 백지화와 노후 원전 수명연장 불허, 월성 1호기 조기폐쇄 등 탈원전을 선거 공약으로 내세워 집권했다. 취임후 신고리 원전 5, 6호기 공사를 중단시켰다가 공론화위원회의 배심원단 공론조사를 받아들여 공사를 재개했다. 공론화위원회는 약 60%의 공사재개 찬성으로 나타난 공론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막연하게 앞으로 원전비중을 축소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정부는 이후 지난해 말 제 8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탈원전 정책을 포함시켰고 한국수력원자력의 자발적인 사업포기로 신규 원전 4기 백지화, 월성 1호기 조기폐쇄를 구체화했다. 에너지 정책의 방향을 확고하게 세운다는 의미에서 탈원전에 대한 국민투표가 바람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문재인 정부가 추진해온 탈원전 절차를 감안하면 국민투표가 본래 취지와는 달리 정권의 명운을 건 치열한 정쟁으로 변질될 우려가 높다. 에너지 정책이 소위 ‘적폐청산’ 대상으로 떠올라 온갖 논쟁과 들쑤시기가 난무하고 또 하나의 거리 투쟁을 불러올 수도 있다. 지난 8월과 11월 원자력학회 등에서 실시한 두 차례 여론조사에서 원전 이용에 찬성한 응답이 70% 안팎으로 높게 나타났다. 여론의 흐름은 이미 방향이 잡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뻔한 흐름을 놓고 분쟁을 일삼기보다 그동안 정부가 취해온 정책의 역순으로 나아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전력수급기본계획을 현실에 맞게 수정하면서 원전의 안전도 요구를 대폭 강화해 국민 신뢰를 높이고 정책을 정상화해야 한다. 한수원의 정상화도 반드시 요구되는 부분이다. &lt;투데이코리아 부회장&gt; 필자약력 △전)국민일보 논설실장,발행인 겸 대표이사 △전)한국신문협회 이사(2013년) △전)한국신문상 심사위원회 위원장
  • [권순직 칼럼]국가 부도의 날
  • 권순직 논설주간|2018-12-06
  •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개봉 10일도 안되어 관객 6백만 명을 돌파하는 등 흥행이 성공적이다. 20여년 전 우리나라를 치욕의 현장으로 만든 이른바 IMF(국재통화기금)사태를 주재로 한 이 영화에 관객이 몰리고, 국민들이 뜨거운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당시의 악몽을 떠올리며 지금의 팍팍한 삶이 겹쳐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국가가 부도 위기에 몰려있던 당시의 상황을 재연하고 IMF와 협상과정을 그린 이 영화는 픽션과 넌픽션을 가미한 팩션이라고는 하지만 사실과는 많이 달랐다. 극적인 재미에 더 비중을 두어 그랬겠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의 생각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우리시대의 사건을 너무 흥미 위주로 하지 않았나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어쨌든 여러 측면에서 우리 국민에게 던지는 교훈은 적지 않다. 우리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고, 그 댓가로 금융 통화정책은 물론이고 기업구조조정 등 모든 정책을 IMF승인을 받아야한다는 내용의 양해각서를 체결하고서야 겨우 국가부도를 모면한 사건이다. 경제주권을 3년간 IMF에 넘겨준 것으로 그야말로 국치(國恥)였다. 하지만 국민들은 고개 숙이고 감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담함을 감출 수 없었던 협상내용을 간략히 살펴보자. 국회는 IMF기준에 맞춰 세입 세출을 맞춰야하고, 정부는 이 틀 안에서 정책을 수립한다는 내용이다. 심지어 국방 통일 문화정책까지 그들의 승인을 받아야했다. 이 양해각서는 국무위원의 서명도 모자라 국회의장과 대선 후보자들에게까지 서약을 받아갔다. 주권국가 국민으로서는 도저히 감내하기 힘든 굴욕이었고, 국민이 지도자를 잘못 선택하면 어떠한 댓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절감했다. 사태 1년전인 1996년 12월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 선진국 클럽에 들어갔다며 샴페인을 터뜨린다. 그러나 이 잔치는 한해도 못넘기고 재앙으로 다가온다. 1997년에 들어서면서 한달에 1천3백여개의 사상초유 기업 연쇄부도 사태가 빚어지는가 하면 한보 삼미 진로 기아자동차 등 재벌그룹이 도산위기에 몰리며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등 경제난이 심각해진다. 은행과 제2금융권의 부실로 이어진다. 여기에다 태국 바트화의 폭락 등 동남아시아 각국의 외환위기가 국내 외환 및 증시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기업의 대량 부도와 주가폭락 등으로 곳곳에서 적신호가 켜졌지만 당시 경제팀은 “우리나라는 경제의 기초체력이 튼튼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는 ‘강한 펀더멘털론’을 펼치며 경고음을 무시했다. 이처럼 곪을대로 곪은 경제체질을 놓고 건강하다며 내외로부터 다가오는 위기를 강건너 불보듯 한 정부 때문에 호미로 막을 위기를 가래로도 못막는 사태를 초래했던 것이다. 이것이 IMF사태의 본질이다. IMF사태의 여파는 그야말로 참혹했다. 기업의 대량 도산과 은행 및 종금사의 퇴출, 그에 따른 곳곳에서의 무더기 해고, 고공행진을 하는 실업률에 자살하는 인구가 급증하고 가정의 붕괴가 줄을 이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상황이다. 자, 그럼 국가부도의 날 영화가 지금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뭔가. 필자는 두가지를 생각했다. 첫째, 우리는 IMF사태를 조기에 성공적으로 극복했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아왔다. 물론 전 국민들이 뼈를 깎는 노력과 고통을 감내하여 경제를 안정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위기를 초래하고, 안이한 대처로 상황을 악화시킨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명확히 하지 않았다. 실패의 교훈을 얻는데 소홀했다. 둘째, 정책대응에 실패한 정책당국자에 대한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지 않았다. 정책의 실패에 형사책임을 묻기가 어렵다는 시각이 있지만, 실패한 정책이나 적절하지 못한 정책대응의 책임소재는 분명히 가려놓았어야 했다. 이 영화가 오늘도 빚어지고 있는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정책당국자들이 한번쯤 심사숙고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lt;투데이코리아 논설주간&gt; 필자약력 △전)동아일보 경제부장. 논설위원 △전)재정경제부장관 자문 금융발전심의위원 △현)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운영위원
  •  
     
     
    투데이코리아(http://www.todaykorea.co.kr)ㅣ등록번호 : 서울아 00214ㅣ등록일자 : 2006년 6월 12일
    제호 : 투데이코리아ㅣ사업자등록번호 : 254-86-00111
    발행인 : 민은경ㅣ편집인 : 김웅ㅣ주필 : 박현채ㅣ논설주간 : 권순직ㅣ편집국장 : 김신웅
    발행소 : 서울특별시 강남구 강남대로 310 유니온센터 1502호ㅣ발행일자 : 2006년 9월 15일
    대표전화 : 0707-178-3820ㅣ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정
    Copyright ⓒ 2006 투데이코리아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ostmaster@todaykorea.co.kr
    투데이코리아 ::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