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넘어 전세계 식도락가들의 혀끝을 사로잡은 대구

▲ 싱싱한 자태로 손님맞이 준비에 나선 대구들.


[투데이코리아=오주한 기자] 바야흐로 ‘대구전쟁’의 시대다. 대단한 먹성으로 ‘클 대(大)’ ‘입 구(口)’ 합쳐서 ‘대구’라는 이름이 붙은 대구목 대구과의 이 어류를 ‘국민생선’으로 다시 소생시키기 위해 전국 각 지자체에 비상령이 내려진 상태다.


살이 희고 담백하며 쫄깃하고 크기도 커서 탕, 찜 등 다양한 요리재료로서 사랑을 받아온 대구는 한때 한반도 수역에서 자취를 감출 뻔 했다가 인위적 노력으로 근래 겨우 개체수가 늘어나고 있다.


1980년대 이전만 해도 풍부한 조업량을 자랑하던 대구는 이후 무분별한 남획, 중국 어선 불법조업 등 영향으로 수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유통량이 낮아지면서 가격은 폭등해 1990년대에는 60~70cm 길이의 대구 한마리가 20만~30만원에 팔리면서 ‘금대구’라는 칭호가 붙었다.


이로 인해 대구는 서서히 국민들의 밥상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유통업계 통계에 의하면 한때 수산물 판매량에서 고등어, 갈치와 함께 상위권을 차지하던 대구는 작년 밑바닥 순위까지 추락했다. 그 자리는 대신 연어 등 수입산 수산물이 채웠다.


어민 파산이 잇따르고 국민 불만도 가중되자 정부, 지자체는 1987년부터 시작된 수정란 방류사업을 확대하고 1월 한달 간 금어기를 설정하는 등 자구책을 마련했다. 다행히도 실효를 거둬 1990년 487톤이라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한 대구 어획량은 2000년대 들어 1천톤대를 회복해 2014년 9940톤의 실적을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대구 판매량은 좀처럼 늘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아 각 지자체는 지금도 수정란 방류사업을 지속하는 한편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판촉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1990년대부터 시작된 ‘대구전쟁’은 약 2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은 셈이다.



▲ 영국의 대표적 서민요리인 ‘피시 앤드 칩스’. 현지인들은 신문지에 싸먹는 것을 최고로 친다.


바이킹 ‘베르세르크(광전사)’의 입맛까지 사로잡은 대구


대구는 사실 우리 민족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사랑받은 생선이다. 서구권에서 가장 유명한 대구 요리는 아무래도 영국의 ‘피시 앤드 칩스(Fish and Chips)’다. 단순하기로 유명한 영국요리답게 피시 앤드 칩스는 말 그대로 물고기(Fish)를 튀긴(Chip) 것이다. 대구와 감자를 함께 튀긴 채 나오는 게 일반적이다.


대구는 중세 서양판 흉노, 몽골족이라 할 수 있는 바이킹(Viking)의 전투식량으로 쓰이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바이킹이 살던 북유럽은 춥기로 유명한 곳이다. 자연스럽게 대규모 농사는 사실상 불가능했으며 북유럽 남성들은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특유의 곡선형이 특징인 선박 롱십(longship. 당대 현지어로 랑스킵)을 타고 서유럽, 멀게는 남유럽까지 ‘털러’ 나섰다.


롱십은 길이가 평균 25m에 불과할 정도로 소형선박이었기에 사람과 약탈물만 겨우 실을 수 있는 크기였다. 제대로 된 식량을 넉넉히 실을만한 면적의 여유가 없었기에 바이킹은 함내 보존식으로 말린 대구를 널판지처럼 쌓아 갖고 다녔다. 이 말린 대구가 없었다면 바이킹의 유럽 원정과 왕조 건설도, 빈란드(Vinland)사가의 전설도, ‘그린란드(Greenland)’ 발견이라는 희대의 사기극도 존재할 수 없었다.


부연하자면 당초 약탈에 열중했던 각 바이킹 부족들은 영국 등지에 정착해 노르만 왕조 등의 시대를 열었다. 빈란드사가는 아이슬란드에서 기록된 두 서사시인 ‘그린란드 사가’ ‘붉은 머리 에리크 사가’를 통칭하는 말로 바이킹의 빈란드(지금의 북미대륙) 발견을 담고 있지만 진위여부를 둘러싼 학계 의견은 분분하다.


그린란드는 이 동토의 땅을 처음 발견한 인물이자 ‘붉은 머리 에리크(Erik)’의 아버지인 ‘붉은 수염 에리크’가 이주자 모집을 위해 ‘허위로’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99%가 얼음으로 뒤덮인 이 땅에도 ‘1%’의 따뜻한 지역이 있어 완전사기는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 3차 대구전쟁 과정에서 교전 중인 영국·아이슬란드 군함.


英·아이슬란드 전쟁까지 야기한 ‘전범’ 대구


대구는 인류 전쟁사에도 길이 남을 ‘족적’을 남겼다. 영국과 아이슬란드는 이름 그대로 ‘피 터지는’ 대구전쟁을 1958~1976년 사이 벌인 바 있다.


발단은 1945년 발표된 미국의 ‘대륙붕 선언’이었다. 당시 대구잡이로 생계를 이어나가면서 은근슬쩍 조업을 방해하는 영국을 곱게 보지 않던 아이슬란드인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어업전관수역을 기존 3해리에서 4해리로 늘렸다가 1958년 아예 12해리로 늘리겠다고 선포했다. 이에 영국이 강력항의하면서 자국 선단에 구축함 등을 호위로 붙여 아이슬란드 수역에 파견함으로써 대구전쟁의 막이 올랐다.


그해 10월 아이슬란드 경비정이 영국 선단에 3발의 위협사격을 가하면서 긴장은 고조됐다. 11월에는 양국 군함 대치상황까지 발생했지만 1961년 영국 정부가 아이슬란드 어업전관수역을 12해리로 인정하고 대신 분쟁 재발 시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하기로 제안함으로써 1차 대구전쟁은 다소 싱겁게 끝났다.


하지만 바이킹의 피를 이어 받은 ‘근성의’ 아이슬란드인들은 약 10년 뒤인 1972년 어업전관수역을 무려 50해리로 늘리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영국은 약속대로 ICJ 제소를 경고했지만 아이슬란드 정부가 거부함에 따라 2차 대구전쟁이 시작됐다.


제대로 된 해군전력이라고는 갖추지 못했던 아이슬란드였지만 해양경비대 총전력인 경비정 6척을 동원해 커터로 영국 트롤어선 그물을 자르는 등 영해사수에 나섰다. 1년 간 영국 어선 68척, 그리고 어느새 영국 뒤를 따라 아이슬란드 영해로 들어온 서독 어선 15척이 피해를 입자 영국은 미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군함을 파견하기로 했다.


미국은 아이슬란드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를 탈퇴해 소련 영향력 하에 들어갈 가능성을 우려했지만 영국이 순순히 물러서기에는 대구가 갖는 경제력이 엄청났다. 또 한 때 로열네이비(Royal Navy)를 앞세워 전세계를 정복했던 영국이 보기에 아이슬란드 해상전력은 그야말로 ‘당나라군대’ 수준이었다.


급기야 1973년 5월 아이슬란드 경비정이 영국 어선에 함포 4발을 명중시키는 상황이 발생했다. 같은해 8월에는 영국 선박과 충돌한 아이슬란드 경비정에서 수병 1명이 사망하는 최악의 사태가 빚어졌다. 설상가상 아이슬란드가 나토 탈퇴를 선언하자 위기를 느낀 미국이 중재에 나서 이번에도 영국이 양보하는 것으로 2차 대구전쟁은 아슬아슬하게 막을 내렸다.


하지만 한번 불 붙은 양국 감정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1974년 전세계를 덮친 중동발 오일쇼크(Oil Shock)는 3차 대구전쟁의 도화선을 당겼다. 무역적자 1억5천만달러를 기록하는 등 경제파탄 위기를 맞은 아이슬란드가 영국과의 협약은 ‘쌈 싸먹고’ 1975년 어업전관수역을 200해리로 대폭 확대하겠다는 일방적 선언을 내놓은 것이다.


1~3차 대구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것이 3차 대구전쟁이다. 양국은 해상전력을 총동원해 선체충돌, 함포사격 등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이번에도 ‘냉전카드’를 꺼내든 아이슬란드는 미국으로부터 애쉬빌급 고속정 수입이 거부당하자 소련의 미르카급 호위함을 구매하겠다면서 소련과 접촉하는 대형사고를 쳤다.


소련이 아이슬란드에 활주로와 잠수함·미사일기지를 건설하고 유럽 전역에 핵공격 위협을 가하는 악몽에 시달리던 나토는 이번에도 개입해 피 말리는 심정으로 양국 화해를 주선했다. 그러나 영국은 이번에는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1976년 또다시 양국 함정이 충돌하고 아이슬란드가 영국과의 국교를 단절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갈 데 까지 갈 것 같던’ 이 3차 대구전쟁이 전환점을 맞은 건 영국 내부의 자국 비판여론이었다. 대구 조업량 좀 늘리겠다고 우방국을 적국으로 돌려 전유럽에 핵전쟁 위기를 불러올 수는 없다는 지적이 이어진 것이다. 결국 이번에도 영국이 아이슬란드에 ‘항복’함으로써 장장 약 20년을 끌어온 대구전쟁은 완전한 종결을 맞을 수 있었다.


지금도 아이슬란드인들은 무적의 로열네이비를 꺾었다는 착각 아닌 자부심에 빠져 매년 6월17일인 내셔널데이(독립기념일)에서 대구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고 있다. 물론 전쟁 와중에도 양국 어선 그물에 정신없이 빨려들어가 튀김옷을 입어야 했던 대구들이 과연 누구 편을 들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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