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은경 작가


계절이 일주일 만에 봄으로 바뀌었다. 3월 8일에 종일 눈이 펑펑 쏟아지더니 일주일 만인 14일 낮 기온이 22도까지 올라갔다. 다음날인 15일 하루 내내 촉촉이 비가 내렸다.

가늘고 굵기를 반복하는 빗발을 바라보며 봄이 온 것을 실감했다. 다시 눈이 올 것 같진 않았다. 지난 초겨울 텃밭에 심어 놓은 시금치가 조금 자란 것 같다. 겨울 내내 너무 추워서 비닐을 단단히 덮어 놓았었다. 아기 시금치의 모습으로 겨우내 자라지 못하더니 비닐을 벗겨 주자 기다렸다는 듯 쑥쑥 키가 큰다. 큰 놈만 뽑아서 나물을 무쳤다. 보드랍고 맛있다고 남편이 엄지 척 한다. 뾰족한 씨를 몸소 뿌리고 겨울 내 보살핀 시금치를 이렇게 초봄에 먹게 될 줄이야 예전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빗속에서 텃밭 정리를 하고 말렸던 우거지도 정리해서 냉장고에 보관해 놓았다. 김치 냉장고 속에 보관되어 있는 겨울 반찬들도 점검해 본다. 지난 가을에 배추 농사를 한 덕분에 밑반찬 재료가 풍부해서 좋다. 형님이 언제 준비해 놓았는지 상추씨를 텃밭에 솔솔 뿌려 준다. 황금의 손이라도 되는 듯 씨를 뿌리는 형님의 손을 황홀하게 바라본다.

형님이 묘목 시장에 가는데 같이 가자고 한다. 얼씨구나! 싶어 따라나섰다. 대구 가까이 하양이란 곳까지 갔다. 아주버님의 친척 동생 되는 분이 운영하고 있는 곳이란다. 키가 1미터 미만에서 3-4미터까지 되는 묘목들이 있었는데 다행히 이름들이 전부 써져 있기에 그런가 보다 하지 내 재주로는 분간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맛있는 과일이 열리는 과일나무인지 예쁜 꽃이 피는 꽃나무인지 어떻게 알 수가 있으랴. 이런 곳이야말로 절대적으로 신용이 중요할 것 같았다. 그러니 아주버님도 이 먼 곳까지 와서 사려는 것이겠지. 한 바퀴 농장을 둘러보았다. 형님이 무슨 꽃나무를 심을 생각이냐고 물었다. 바로 앞에 라일락 팻말이 보였다. 옛날 친정에 있던 나무 중 내가 가장 좋아했던 나무가 라일락이었다. 5월을 지배하던 라일락의 향기, 지금은 많이 보기 어려운데 그 라일락이 여기 있다니........사장님이 종이와 볼펜을 내어 주었다. 형님과 나는 각자 종이 한 장 씩을 받아들고 원하는 나무의 이름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장님, 아까 본 매실나무, 그거 열매가 실한 것 맞아요?” 형님이 물었다. 매실나무라고? 그게 뭐지? “아! 노란 꽃 핀 것 말입니까? 그건 매화지, 매실나무 아닙니다.” 갑자기 어지러워졌다. 그럼 홍매실 마을에 피는 꽃은 매화가 아니고 뭐지? 아니 열매가 열리려면 꽃이 필 텐데 그 꽃은 뭐라고 부르나?

하여간에 사장님의 애기인즉슨 꽃을 보는 매화와 열매를 맺는 매실은 나무 종류부터가 다르다는 것이다. 난 두 가지 종류를 다 사기로 했다. 형님은 꽃으로서의 매화에는 관심이 없다. 옛날 선비들이 좋아하던 사군자 중의 으뜸이 매화라고 아는 척을 해 가면서 권해봤지만 형님은 끄덕도 안 한다. “혹시 홍매나 백매는 없나요?” 선암사와 화엄사의 백매 홍매를 연상하며 다시 물어 봤지만 황매 밖에는 없단다. 장미도 열 그루 골랐다. 백목련 둘, 배롱나무 두 그루, 라일락 두 그루. 그리고 또 뭐더라, 호두나무, 구지뽕, 엄나무.

아주버님은 언제나 일년생 정도의 작은 놈을 고른다고 말한다. 처음엔 3년생을 비싸게 주고 샀지만 그 다음은 별로 크지를 않기 때문에 가성비로 보면 어린 묘목이 제일이라고 했다. 일년생을 샀을 경우, 첫 이년 동안 쑥쑥 자라는 재미가 만만치 않다고 했다. 나무란 놈은 3년까지 자라고 나서는 성장이 둔화되는 모양이다.

다음날 오전 내내 나무를 심었다.
매화를 빼놓고는 모두가 작대기 같아 보이는데 어쩌나.
나무야, 나무야, 쑥 쑥 잘 자라다오!

<작가>
조은경 약력
△2015 계간문예 소설부문 신인상 수상
△소설 '메리고라운드' '환산정' '유적의 거리' '아버지의 땅'등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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