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무 회장


‘물 발자국’ 이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물 발자국은 어떤 물품의 생산부터 소비까지 직간접적으로 사용되는 물의 총량을 일컫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사과 10개 생산에 2,100리터의 물이 사용되고, 쌀 1㎏ 생산에 3,400리터, 닭고기 1㎏ 생산에는 3,900리터의 물이 사용된다는 것이지요. 유통과정과 소비단계에서 사용되는 물의 양까지 포함하면 물 발자국은 더 커질 것입니다. 우리가 마시는 물과 목욕이나 빨래 등 일상생활에 쓰는 물 이외에도 누구나 매일 먹는 농수산물을 비롯하여 우리가 사용하는 상품 하나하나에 물이 얼마나 사용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바로 이 ‘물 발자국’ 이라는 말을 통해 실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농사를 비롯한 모든 산업에 물이 실로 불가결한 요소라는 점을 일깨워주는 말이지요.

바야흐로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봄입니다. 농사는 바로 이 물을 어떻게 확보, 공급해주느냐 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즉, 어떻게 풍부하고 깨끗한 물을 안정적으로 농사에 쓸 수 있는 영농환경을 만들어서 농업인들이 농사에 쏟은 땀과 노력이 우수한 농산물이라는 열매로 맺어질 수 있도록 하느냐가 농사의 시작이라는 말이지요. 우리나라는 최근 몇 년간 봄 가뭄과 마른 장마, 집중호우와 태풍 피해 등 이상기후로 인한 자연재해를 여러 차례 겪었습니다. 때로는 물이 너무 적어서, 때로는 물이 너무 많아서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던 것이지요. 농사철을 맞아 모내기 중인 논을 보거나 밥상 위에 놓이는 농수산식품을 보면서 여기에 얼마나 많은 물이 필요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농업인의 땀과 노력이 담겨있는지 한번쯤 되새겨보게 됩니다.

서울 동대문 밖 제기동에 선농단(先農壇)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농사철이 시작될 때 임금이 몸소 밭을 가는 친경(親耕)과 함께 농사의 신인 신농(神農)에게 제사하는 선농제(先農祭)를 지내던 터인지라 제기(祭基)라는 동네 이름이 남아있는 곳입니다. 제수용 곡식을 관리하던 전농시(典農寺)가 있던 이웃동네가 전농동이 되었고요. 우리나라 선농제의 기원은 신라시대이며, 고려 성종 때의 기록이 남아있고, 조선시대에는 매년 우순풍조(雨順風調)의 풍년을 기원하는 나라의 주요행사로 자리 잡았습니다. 동대문구에서 1979년부터 4월 20일, 절기상 곡우(穀雨)에 해당하는 날에 지역 축제로 선농제 행사를 복원해서 거행해오고 있답니다. 이 행사에 참여하는 관원들과 인근 백성들에게 제사음식으로 나누어준 국밥 ‘선농탕(先農湯)’이 오늘날의 설렁탕이 되었다고 하지요.

조선시대에 지방의 농사 장려를 담당하던 ‘권농(勸農)’이라는 직책이 있었습니다. 송강 정철의 시조에도 나옵니다. “재 넘어 성 권농 집에 술 익단 말 어제 듣고, 누운 소 발로 박차 언치 놓아 지즐 타고, 아해야 네 권농 계시냐 정 좌수 왔다 하여라.” 좌수 (座首)였던 송강이 이웃동네의 권농이던 우계 성혼(成渾)과 서로 벗하고 지내던 모습이 마치 그림같이 묘사되어있는 걸작이지요.

권농은 농경시대 국가정책의 근간이자 목민관(牧民官)의 기본임무였습니다. 농사 독려와 수리시설 축조, 농서의 편찬 보급 등이 그 주요 내용이었지요. 세종대왕의 ‘권농교문(勸農敎文)’을 인용합니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농사는 의식(衣食)의 근원으로 국정에서 무엇보다 앞서는 것이다.” “내가 이를 위해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하여 반포한 것이니, 감사나 수령의 책임을 맡은 사람은 이를 널리 참작하여, 마음을 다하여 백성들을 농본에 힘쓰게 하라.” 세종대왕의 위대함이 다시금 돋보이는 글입니다. 4월 초, 올해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청명(淸明) 한식(寒食)의 절기에 농사와 물이 우리 일상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새삼 되새겨보고 싶어집니다. <투데이코리아 회장>

필자 약력
△전)농림수산부 기획관리실장
△전)세계식량농업기구(FAO)한국협회 회장
△전)농어업농어촌 특별대책위원회 위원장
△전)한국농어촌공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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