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순직 주간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이뤄졌다. 한편에선 드루킹이다 뭐다 해서 시끄럽다. 그래서 누군가는 대한민국은 언론 산업이 잘된다고 말했다. 끊임없이 별 사건이 다 터져 뉴스 꺼리가 많기 때문이다. 선진사회로 갈수록 사회가 가라앉아 조용하고 안정된 느낌이 드는 것과 대조적이어서 나온 말일게다. 최근에는 재벌기업 오너 따님들의 갑질까지 겹쳐 시끄럽다. 그런 와중에 재계 한켠에선 ‘일과 삶의 균형’을 일컫는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의 앞 글자를 딴 신조어) 움직임이 활발하다.

남북 정상회담과 같은 거대 이슈 못지않게 ‘갑질, 워라밸, 인구절벽’의 묶음 단어가 더 중요하다는 게 필자 생각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인구 구조의 급격한 변화, 즉 초저출산에 따른 인구절벽에 너무 무감각하다.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해야 한다는 인구학자들의 경고를 경청하는 국가지도자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기 힘들다. 눈앞의 이슈, 선거를 앞둔 표밭에만 눈이 가는 것이다.

천박한 기업의 갑질문화
대한항공 오너 첫째따님에 의한 KAL기 땅콩회항사건이 터진 것이 엊그제 같은데 또다시 둘째따님에 의한 물벼락 갑질, 거기에 그 따님들의 엄마까지 등장하여 화도 나고 창피하기도 하고 민망스럽다. 사실 재벌 오너 2세 3세들의 갑질, 상식이하의 행태는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다. 이런 일이 터진 뒤 만난 어느 재벌그룹 임원은 “뭐 어느 대기업이건 대동소이하다고 보면 크게 틀린 말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재벌가 가족들의 횡포가 만연하다는 얘기다.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더 볼멘소리다. 대기업 직원(乙)은 갑질을 당하면 폭로라도 하고 사회문제화 하기라도 하지만, 중소기업 종사자는 을도 못되고 병,정 (丙,丁)으로 하소연도 못한다고 한탄한다. 많은 중소기업 직장인들은 언론에 보도되는 재벌가 갑질 못지않은 인간이하의 취급을 받으면서도 내부 견제장치가 없거나 작동이 안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 갑질은 오너 가족만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안하무인의 중간관리자에 의한 횡포도 지나치리만큼 심하다. 창피한 일이지만 대한항공 갑질 사건을 보도하는 미국 언론에는 ‘코리안 갑질(Gapjil)'이란 용어까지 등장했다. 국제망신이다.

과거에도 이런 갑질 행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니 더 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먹고 사는 것 자체가 힘들었던 그 시대에는 그러려니 하고 참고 견뎌왔다. 정 못견디면 사표 쓰고 나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젠 달라졌다. 젊은 세대는 그런 불의를 간과할 수 없다. 미 투 (Mee too)운동도 마찬가지다. 특히 사람마다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핸드폰은 고감도 녹음기능과 카메라기능을 갖춰 맘만 먹으면 리얼하게 현장을 보존, 고발할 수 있게 되어있다. 그런 자료는 100% 증거능력을 자랑한다.
갑질 고발과 미 투 운동의 영향으로 달라진 풍속도도 쓴웃음을 짓게 한다. 어떤 회사에선 회의장에 휴대전화를 휴대하지 말라는 농담반 진담반 지시가 떨어진다고 한다. 직장 회식 문화도 달라져간다. 아예 남자 간부들은 여성 부하 직원들과 동석하는 회식자리를 기피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회식 자체가 줄어 회사 인근 식당이 타격을 입는다고도 한다.

재계에 번지는 워라밸, 반갑다

얼마전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이 주관한 ‘저출산 극복을 위한 기업의 대응’세미나에서 저출산에 대비해 기업이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직장에서부터 근무환경이 개선되어야 청년층의 ‘저녁이 있는 삶’과 출산으로 이어진다는 지적이었다. 문재인정부가 근로자들을 근무환경을 개선해주자는 주장은 사실 기업 현장에서 오래전부터 추진되어온 것이다. 유한킴벌리의 경우 약30연년 전부터 유연근무제, 영업직 현장출퇴근, 재택근무, 생산직4교대 근무제등을 실시하여 종업원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기여해왔다. 최근엔 직원들이 자율적으로 업무공간을 선택해서 근무하는 변동좌석제를 도입해 인기다. 다른 기업들도 앞다투어 워라밸 성격의 다양한 근무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요즘의 젊은 직장인들은 일의 목적과 의미, 수평적인 의사소통, 여가활용을 포함한 삶의 질을 중시한다. 직장 선택의 가장 중요한 기준중의 하나가 워라밸이다. 대기업이건 중소기업이건 이제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려면 직원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앞만 보고 달리는 하드워커(Hard worker)가 아니라 스마트워커(Smart worker)로의 변신이 요구되는 시대다. 주변에선 가장 선망하는 기업인 삼성전자에 취업한 젊은이가 몇 년 안가 이직, 다른 직장으로 옮기는 경우를 드물지 않게 볼 것이다. 자랑스런 회사에 보수도 좋지만 근무강도가 높고 삶의 질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느끼면 훌훌 털고 떠나는 것이 요즘 세대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워라밸 성격의 캠페인을 저출산 대책과 연계해서 추진해왔다. 우리 정부는 워라밸을 근로자 처우개선 차원에서 추진하는 것과는 다르다. 노동자 친화적인 정권이어서 그러겠지만, 사실 효율과 참여 유도를 위해선 국가 존망과도 걸려있는 인구절벽 명제와 연계시키는 것이 더 바람직할지도 모른다. <투데이코리아 논설주간>

필자약력
△전)동아일보 경제부장, 논설위원
△전)재정경제부장관 자문 금융발전심의위원
△현)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관리위원

저작권자 © 투데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