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순직 주간

눈 여겨 보면 건물이나 터널 도로 등 각종 시설물에는 시공사와 시공책임자 공사기간 등이 적힌 조그만 비석이 발견된다. 공사에 참여한 회사나 사람들의 공적을 기리는 의미도 있고, 한편으로는 ‘우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지만 그래도 혹시 잘못이 발견되면 우리 책임’이라는 다짐이 담겨있다고 본다. 후에 하자가 생기면 보수도 책임져야하고, 회사의 명예실추도 뒤따를 것이다.
이처럼 행위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하는 실명제는 필요하다. 특히 국민 전체 삶의 질은 물론이고 국가의 미래와 직결되는 경제정책은 그것을 설계하고 실행한 시행자의 실명을 반드시 남겨야 한다. 이 경우 시행사 사주는 대통령이다. 최종 책임은 물론 사주가 진다. 고도로 복잡한 경제정책은 각 분야 전문가에게 맡겼기 때문에 시행자 즉 시공책임자는 관련 공무원이다. 그래서 사주인 대통령 못지않게 시공책임자인 장관이나 관련 수석비서관의 책임이 막중하다.
과거엔 경제정책에 문패를 안달아도 별 문제가 없었다. 왜냐하면 거시경제 정책은 경제기획원이, 재정 금융는 재무부가, 산업정책은 상공부가 책임지는 식으로 정책의 수립과 수행 주체가 명확했다. 그 과정에서 부처간 의견이 갈리면 경제장관회의에서 얼굴 붉히며 싸움도 하고 이론다툼도 하며 조화를 이뤄나갔다. 그래서 경제부총리가 필요했다.
지금은 어떤가. 경제장관회의가 있기나 한지, 경제부총리의 역할은 뭔지, 정책을 누가 수립하고 누가 시행하는지 국민들 보기에 애매하다. 청와대 비서실만 있지 장관들은 그저 심부름꾼일 뿐인 것 같이 보인다.
정책 수행에 명예를 걸어야...
그렇다면 지금 논란이 빚어지고 있는 문재인정부의 주요 경제정책에 관한 공과(功過) 어떻게 가릴 것인가. 주요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책임자는 대학교수출신이건, 시민운동가 출신이건, 정통관료 출신이건 그들 스스로의 명예와 자존심을 걸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그들이 소신 있게 밀고나가는 정책에 대해서 실명화를 해야 한다.
실패한 정책에 책임을 묻기 힘들다. 실제로 재임 중 결정한 사안이 잘못된 결과를 초래한 사건을 놓고 사후 문제가 불거져 관련 책임자가 법원까지 간적이 있지만 법원은 정책실패에 사법책임을 묻지는 못했다. 그래서 더욱 정책에 입안자와 시행자의 문패를 달아 엄중한 책임을 지워놓아야 한다. 책임추궁을 위한 실명제가 아니라 명예를 걸고 신중하게 정책을 판단하라는 경고의 의미다.
현 정부는 출범 1년을 보냈다. 공과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남북정상회담의 성사는 물론이고 미국 중국 일본 등을 포함한 성공적인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정책은 큰 성과다. 최근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문재인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율은 83%로 고공행진이다. 그러나 경제정책에 대한 긍정평가는 47% 수준에 머물렀다.
이 정부가 중점 추진해온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근로시간 단축 등 친노동 성격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지금도 논란중이다. 일자리 중심이라며 내세운 각종 정책에도 불구하고 고용지표는 긍정적이지 않다. 경제부총리는 오히려 고용사정이 악화한 것은 정책의 부작용이 아니며, 정책효과는 몇 달 더 두고 보아야 한다고 한다.
천문학적인 규모의 재정투입으로 정책실패를 막아보려 하지만 별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모든 정책이 시행과 동시에 겨냥한 대로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러 정책은 이미 잘못 설계된 것 같은 조짐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음에도 돈을 쏟아 붇는 임기응변 처방으로 대응한다. 잘못된 정책임을 알았으면 그동안 투입된 비용과 노력을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경제학에서 이르는 매몰비용이다. 머뭇거리면 경제주체의 피해는 피해대로 커지고 매물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뿐이다.
그러면 누가 문패를 달아줄 것인가
왜 이 시점에서 정책 실명제를 주장하는가. 책임소재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책임을 힘도 없는 경제부처에 묻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국무위원 놔두고 청와대 비서실에 묻기도 그렇다. 그러나 실제로는 비서실 주도가 아닌가. 소득주도 성장론의 신봉자이거나 시민운동가 교수출신이 이 정부의 경제정책 추진 주류다.
장하성정책실장 홍장표경제수석 김현철경제보좌관 등 세사람이 J노믹스(문재인경제정책)를 만들고 추진하는 실체다. 정통경제관료로 비교적 합리적인 김동연경제부총리는 존재감이 별로 없다. 가끔 이론을 제기하지만 지극히 소극적이다. 훗날에 대비한 면피성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정도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소신대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잘하느냐 못하느냐인데, 그것이 당장 판별하기 어렵다. 정확한 평가는 후대 몫이다. 총괄적인 평가는 물론 대통령이 받게 되겠지만, 그에 앞서 실무총책의 책임소재를 가릴 메커니즘이 마련되어 있어야 좀더 신중하고 정교한 정책이 나오리라고 본다.
정책의 문패는 정부가 선명하게 내걸어야 옳다. 경제수석이건 장관이건 정책 설계 입안자를 확실하게 밝혀두어야 한다. 대통령을 위해서, 나라를 국민을 위해서 바람직하다고 본다. 정부가 정책실명제를 실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면 언론이 나설 수밖에 없다. 실질적인 정책 주도자를 가려내 그의 문패를 정책에 달아주고, 힘도 실어주고, 그리고 훗날 그의 정책을 평가하여 상도 주고 벌도 주는 사회적 시스템을 마련했으면 한다.<투데이코리아 논설주간>
필자약력
△전)동아일보 경제부장. 논설위원
△전)재정경제부장관 자문 금융발전심의위원
△현)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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