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수궁 중명전의 전경 (사진=권규홍 기자)

[투데이코리아=권규홍 기자]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유명한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올라가면 건물사이에 가려진 조그만 골목이 나온다. 그 골목으로 들어서면 작고 아담한 고풍스런 건물하나가 사람들을 맞이한다.


바로 덕수궁 중명전이다. 중명전은 덕수궁을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정비해 가는 과정에서 황실의 서적과 보물들을 보관할 고종황제의 서재 역할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하지만 1904년 덕수궁에 큰 불이 일어나자 고종은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며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정동의 상징인 덕수궁, 그 중에서도 덕수궁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이 건물은 대한제국의 아픔을 품은 상징적인 건물로 현재 남게 되었고 문화재청 역시 이 같은 사실을 살려 현재 1층을 전시관으로 개조하여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기자가 방문했을때 중명전에는 역사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을 비롯, 나이가 지긋하신 노년층과 점심시간을 이용해 산책에 나선 직장인들 다양한 연령층이 중명전을 찾았다.


중명전은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곳으로도 유명하기에 문화재청은 1층의 한쪽 방을 을사늑약 체결의 방으로 구성하여 당시의 상황을 재연했다.


▲ 당시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던 인물들, 가운데가 이토 히로부미 (사진=권규홍 기자)


1905년 11월, 일제는 무력을 동원한 강압적인 방법으로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 당하고 주권이 흔들려 나라의 근간을 서서히 일제에 빼앗기게된다. 고종은 을사늑약이 무효라고 선언하고 이를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임명하여 네덜란드 헤이그로 파견한다.


이들은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전 세계에 주장하려 했으나 미리 헤이그에 도착해 있던 일본의 집요한 방해공작과 서구 열강들의 방관으로 회의참석이 전면적으로 거부되고 호머 헐버트 박사의 주선으로 '국제주의재단' 강연에서 연설을 하는것 으로 그치게 된다.


이 사건때문에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한 이준은 지병이 도져 헤이그 현지에서 숨을 거두었고 이 사실을 알게된 일제는 고종 황제를 강제로 폐위한다.


▲ 고종 퇴위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권규홍 기자)

▲ 을사늑약이 벌어진 이후 세계정세 (사진=권규홍 기자)

▲ 을사늑약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 (사진=권규홍 기자)

▲ 강제로 체결된 을사 늑약문 (사진=권규홍 기자)

▲ 고종이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 (사진=권규홍 기자)

▲ 헤이그 특사단이 머무른 호텔의 모습을 재구성했다 (사진=권규홍 기자)

중명전은 본래 덕수궁 궁궐 권역에 원래는 연결되어 있는 건물이었지만 구한말 일제가 도시정비를 명목으로 궁궐 사이사이에 길을 내고 차도를 내면서 덕수궁 권역은 이리 저리 쪼개졌고 덕수궁의 담장들 역시 부수고 세워지길 반복하여 오늘날의 정동 모습이 만들어 졌다.


현재도 정동에는 미국대사관저, 영국 대사관, 캐나다 대사관등의 외국 대사관들이 도처에 존재하고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이화여고 교정과 예원학교를 비롯 다양한 문화재들이 이곳저곳에 널려있다.


대한제국의 역사공부도 하고 봄날의 가벼운 나들이를 원한다면 이곳 정동으로 주말여행을 오는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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