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코리아=권규홍 기자]서울의 중심인 중구 정동은 구한말 대한제국시절 조선에서 가장먼저 외국문물을 받아들인 곳이었다. 당시 덕수궁을 중심으로 정동 주변에는 외국 선교사들의 주도로 학교와 교회, 서구식 병원들이 지어졌고 각국의 대사관들이 들어서 외국인들과 쉽게 교류할수 있는 곳으로 각광 받았다.


당시 조선에 선교를 목적으로 입국한 헨리 아펜젤러는 조선인들에게 서구식 신문물과 교육을 널리 전파하기 위하여 배재학당을 설립하기로 마음먹고 고종 황제를 알현하여 정동에 학교를 설립할수 있게 요청하였다. 아펜젤러의 계획을 들은 고종은 아펜젤러의 뜻에 감복하며 배재학당 설립을 인가하고 현판을 하사하며 아펜젤러의 교육사업을 지원하였다.


이후 1885년 중구 정동에 배재학당이 설립되고 영어를 배우고자 했던 1기 입학생 2명을 시작으로 배재학당의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되었다.
▲ 역사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배재학당 건물(사진=권규홍 기자)

정동 제일교회 뒷편 언덕으로 올라서면 고전적인 붉은벽돌로 마감된 서양식 건물 한채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배재학당 동관 건물이다. 현재는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 아펜젤러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권규홍 기자)

아펜젤러는 조선인들의 의식 고취와 서양식 신문물, 교육을 전파하기 위하여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직접 교과서를 비롯한 학용품들을 제작하여 학생들에게 보급하였고 필요하다면 고종황제를 자주 알현하여 조선인들의 신식교육 보급을 위해 힘썼다.



▲ 고종황제가 하사한 현판 (사진=권규홍 기자)



고종은 아펜젤러의 뜻을 높이사 집적 현판을 하사하며 배재학당의 설립을 허가 하였다. 아펜젤러를 시작으로 베델, 헐버트, 언더우드, 알렌등 서양 선교사들은 신식교육 전파를 목표로 서울에 곳곳에 학교를 세우게 된다.



▲ 배재학당과 관련된 전시물들이 전시되어있다 (사진=권규홍 기자)


배재학당이 설립된지도 어느덧 100년이 훌쩍 넘었다. 배재학당에서 공부했던 졸업생들은 졸업후에도 지속적으로 학교와의 연을 이어가고 있으며 다양한 활동으로 배재학당의 이름을 높이고 있다. 졸업생들은 당시 학교에서 썼던 책걸상을 비롯하여 교표, 교복, 뱃지등등 학교와 관련된 온갖 유물들이 기증하였는데 이 유물들이 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다.



▲ 초창기 선교사들의 저작물들 (사진=권규홍 기자)


아펜젤러를 비롯한 선교사들은 서양의 학문, 문물들을 전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구 세계의 유명한 문학 작품들을 번역하여 학생들에게 읽혔고, 서양의학을 비롯하여 수학, 과학, 스포츠등 다양한 문물들을 전파 시켰다. 이들은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 개성 멀리는 만주일대까지 지역을 넒히며 신식교육 보급에 앞장섰다. 배재학당출신으로는 이승만 전 대통령, 언어학자 주시경, 서재필, 여운형, 지청천등 한국 역사에 족적을 남긴 많은 위인들을 배출하였다.



▲ 정동의 역사를 기록한 전시관 (사진=권규홍 기자)


구한말 당시 정동은 조그마한 지구촌이었다. 강대국들의 대사관을 비롯한 다양한 신식 교육기관, 교회, 주거시설, 체육시설들이 곳곳에 들어섰으며 덕수궁과의 거리도 가까워 조정의 대신들과도 자주 교류하며 서양의 문물을 널리 전파하였다. 당시 양반들을 비롯한 조정의 높은 고위직의 자녀들은 영어를 배우며 선교사들의 지원으로 미국과 유럽등지에 유학을 가기도 하였다.



▲ 당시 사용되었던 피아노를 비롯한 악기가 전시되어 있다.(사진=권규홍 기자)

아펜젤러 부부는 서구식 음악을 전파하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피아노를 비롯해 바이올린, 트럼펫등의 악기를 집적 연주하여 음악교육도 실시했고 이후 아펜젤러의 자녀들 헨리와 앨리스 역시 대를 이어 교육에 힘썼다. 이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서 숨을 거뒀고 이들의 유해는 현재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현재 배재학당은 배재 중,고등학교를 비롯하여 대전에 배재 대학교를 설립하여 운영중이며 아직도 설립초창기에 썼던 교가를 그대로 쓰며 아펜젤러의 뜻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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