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은경 작가



지난주엔 귀향해서의 입택식 이후 가장 큰 행사를 치르느라 몹시 바빴다. 95년 된 고택의 현판식을 한 것이다. 이곳에 우리 살 집을 따로 지으면서 고택의 손질도 틈틈이 했었다. 친구이자 고택 전문가에게 지붕의 기와에 대해서 진단을 받고 그 조언에 의해서 지붕을 수리했다는 얘기는 전번에 쓴 적이 있다. 기와 외에도 몇 군데 손질을 했다. 이제는 고택을 쳐다보기만 해도 깨끗한 새 옷을 입은 할아버지를 뵙는 듯 기품 있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서울과 부산에서 몇 분의 친척들이 오셨다. 그 밖에는 동네 어른들, 영천 시내에 사는 친지 분들이다. 우리 가족으로는 큰 아들이 손자를 데리고 참석해 주었다. 우리 부부에게 하나뿐인 다섯 살 난 손자가 장난치며 손님 틈 사이로 이리 저리 쏘다니며 마치 자기 집에 온 것처럼 스스럼없이 행동하는 것이 신기하다. 그 애에게도 조상이 사시던 곳이라는 느낌이 전해졌을까? 현판식에 써진 글자는 ‘여려(旅廬)’이다. 시조부의 호로, 친히 고택을 지으신 분이기도 하다. 현판에 흰 천을 씌우고 양쪽에 줄을 매달아, 가슴에 꽃을 꽂고 흰 장갑을 낀 귀빈들이 그 줄을 잡아 당겨 흰 천을 벗기는 것이다. 그러면 마당에 있는 참석객들은 환호와 함께 박수를 치고........멋진 일이었다.

‘여려당’이라든지 ‘여려재’라는 말을 쓰는 대신에 ‘여려’ 자체로 현판을 삼은 이유는 ‘려’라는 글자가 ‘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란다. 여행을 떠나는 집, 또는 여행 중인 집, 또는 그 집에 머무는 것 자체가 여행이라는 의미도 된다. 인생이 여로이니 여로에 지친 여행객을 보듬는 심정으로 그 집을 지으셨나보다. 현판식, 기공식, 등등 흰 장갑을 끼고 행사를 치르는 경우를 뉴스에서 여러 번 보았지만 우리 집에서 손님들을 모셔 놓고 이런 행사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현판의 길이를 재어 흰 천을 박음질하여 가리개를 만들고 그 끝에 줄을 매달아 잡아당기는 것도 처음 본 것이었다. 동상 제막식에 주로 사용하는 형태인 것 같다. 이런 행사에 경험이 많은 분들이 자원해서 준비해 주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비가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하는 궂은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모인 분들에게 간단히 다과를 대접하는 일까지 모든 일이 자원 봉사자들에 의해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손님 모두가 축하하는 덕담을 남기고 가셨다.

남편은 아들과 짬짬이 대화를 나누었는데 아들이 조부와 증조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고 무척이나 기뻐하는 것 같았다. 시골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아들이 첫 번째 입택식에 이어 두 번째 이곳을 방문하면서 고향과 뿌리에 관해서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더욱이 손자의 자연스럽고 순수한 행동은 우리 부부에게 기쁨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했다. 아들은 택시 타고 오면서 운전기사가 한 말을 옮겨준다. 그 기사가 말하기를 전에 어떤 어르신을 태웠는데 그 분은 이곳이 고향이지만 고향으로 귀촌을 안 하고 그 옆 동네에서 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퇴직 후에 고향에는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고 그 기사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 말이 있어요?- 아들은 물어본다. 남편은 그만 웃고 말았다. -그런 말이 어디 있겠니? 그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겠지. 옛부터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말이 있지. 여우도 죽을 때엔 머리를 고향으로 향하고 죽는다고. 아마 그 사람은 고향 사람들을 섭섭하게 한 모양이다. 그러니까 고향에 돌아가지 못 하고, 그래도 마음은 그 쪽으로 가니 옆 동네에라도 살지.- 다행이다. 우리가 고향으로 돌아올 수가 있어서. 물론 우리야 귀향이니 귀촌이니 잘 했다고 생각하지만 돌아갈 고향이 없는 분들이 들으면 섭섭해 할 일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확대된 의미의 고향은 있을 수 있다.

너의 고향이 곧 나의 고향, 우리의 고향이 되었으면!

<작가>
조은경 약력
△2015 계간문예 소설부문 신인상 수상
△소설 '메리고라운드' '환산정' '유적의 거리' '아버지의 땅'등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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