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무 회장


‘향약’은 ‘조선시대 농어촌 마을 단위의 자치 법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주된 내용은 양반 계층의 지도아래 하층민을 통제하면서, 유교적 예절을 보급하고 미풍양속을 진작시키는 동시에 질서를 확립하고 상부상조하는 관습을 조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의 북송(北宋) 말기에 산시(陝西)성에서 행해졌다고 알려진 ‘여씨향약(呂氏鄕約)’의 4대 강목(綱目), 즉 덕업상권(德業相勸, 좋은 일은 서로 권함), 과실상규(過失相規, 허물과 실수는 서로 규제함), 예속상교(禮俗相交, 예절풍속은 서로 나눔), 환난상휼(患難相恤, 우환과 재난은 서로 보살핌)을 벤치마킹했다고 할까요. 이 여씨향약이 남송시대 주희(朱熹)가 증보하여 그의 저작 전집인 ‘주자대전(朱子大全)’에 수록된 것이 주자학의 영향으로 조선시대 향약에 채택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저는 이 향약이 단순히 중국 것을 모방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이러한 관습적 법규가 우리 민족의 오랜 전통에서 비롯된 ‘공동체적 상규·상조(相規·相助)의 자치제도’가 발전된 형태라고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삼한시대 씨족사회의 ‘마을 계(洞契)’에서 원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동제(洞祭)를 위시해서 마을 운영과 농사에 필요한 집단행사를 위해 서로 규제하고 감찰하는 동시에 길흉사에 부조하고 환난에 공동대처할 목적으로 결성된 마을단위의 원시적 자치조직이 이미 그 당시부터 존재했다는 것이니까요. 신라의 향도(鄕徒), 고려시대의 유향소(留鄕所) 등을 거쳐서 조선 중종 때 조광조, 김안국 등 개혁파가 공식 조직으로 향약을 시행했다가 기묘사화 이후 폐지되었는데, 이후 시행과 폐지가 반복되면서 향촌사회의 자생조직과 중앙의 통치방책이 적당히 결합된 형태로 정착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율곡 선생은 일생을 향약과 관련, 시골마을 주민 계도에 진력한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분이 제정했던 ‘서원(西原)향약’은 양반, 양민, 천민이 모두 참여한 계(契) 조직으로서, 당시의 행정조직과 연계하여 과실상규와 환난상휼을 상세히 규정하고 있지요. 향촌의 사족, 향족의 권익을 대변하면서 상부상조의 공동체적 관계를 유지하려는 ‘향촌권익활동’으로서, 특히 지방 관속의 중대범죄에 대비한, 여론을 통한 ‘관권(官權) 견제와 향권(鄕權) 수호’라는 주민자치, 지방자치의 성격까지 지니고 있었답니다.


1938년에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러한 마을 단위의 자치조직은 480종, 3만여 개에 이르며, 조직원 수가 90만을 넘었다고 합니다. 대부분 불문율과 관습으로 전승되어온 이 조직은 연 1~2회의 마을 제사(洞祭, 村祭)를 지내는 데서부터 제사 후의 축제인 당굿과 풍악놀이를 비롯한 주민의 친목과 상규·상조의 마을회의(洞會)를 주관하는 주민자치 조직이었지요. 그런데 이 조직의 핵심역할을 한 것이 바로 ‘두레’였다고 합니다.


신라 향가 ‘도솔가’에 ‘두레놀애’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오래 전부터 농경사회의 공동경작 관습이 점차 공동작업과 함께 상부상조의 자주적 협동조직으로 발전한 것이 두레라고 생각됩니다. 마을의 15~55세 남자 전원으로, 대개 30명 내외로 구성되었고, 이는 의무이자 권리였습니다. 두레에 가입하는 것이 일종의 성년식과도 같았다고 하지요. 상부상조의 엄격한 규율로 전투력까지 갖춘 이 조직은 ‘두레기’ 깃발 아래 농번기의 공동 작업을 비롯하여 동제와 풍물놀이, ‘두레싸움’ 등을 주관하는 원초적 협동조직이었습니다. ‘두레꾼, 두레패, 두레밥, 두레상’ 등의 말이 아직도 남아있지요. 이 두레는 노약자와 병자는 노역을 면제해주고, 어려운 이웃은 힘을 모아 거들어주었답니다.


향약과 두레, 우리가 지키고 더욱 키워야 할 주민자치와 협동의 빛나는 전통유산이 아닐까요? <투데이코리아 회장>
필자 약력
△전)농림수산부 기획관리실장
△전)세계식량농업기구(FAO)한국협회 회장
△전)농어업농어촌 특별대책위원회 위원장
△전)한국농어촌공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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