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원대 외래교수 류석호
▲ 강원대 외래교수 류석호

 

“여행은 새로운 경험을 얻게 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눈(시각)을 갖게 한다.”
(칠레 마푸체족 속담)

최근 한 달 가까이 중남미 8개국 여행을 다녀왔다. 지금까지 5대주(大洲)의 수 많은 나라를 가보았지만, 나머지 한 대륙 남아메리카에는 발을 들여놓지 못했었다.
그래서 중남미여행은 나에겐 ‘버킷 리스트(Bucket list)’의 첫 번째 항목이었다.
무려 15차례나 비행기를 갈아타는 장거리 여행에다 해발 3,000m가 넘는 고지대를 넘나드는 고단한 여정이었지만, 다녀오길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이다.

멕시코 일대의 아즈텍문명과 마야문명, 페루에서의 잉카문명 유적을 보면서 우리와 닮은 원주민(인디오)들의 찬란했던 문명과 삶의 흔적들을 반추해보는 것은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우리 인류가 중남미지역과 원주민들에게 크게 감사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오늘날 이처럼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은 이들의 농업과 식량자원 등에 빚진 게 많다는 점이다.

뭣보다 중남미는 식량작물과 채소, 과일의 보고(寶庫)였다. 수 많은 먹거리들의 원적지(原籍地)기 바로 이들 지역인 것이다.
세계 1위의 식량작물인 옥수수를 비롯, 퀴노아, 감자, 고구마, 토마토(채소 소비량 세계 1위), 고추, 호박, 파인애플, 파파야, 아보카도, 땅콩, 강낭콩, 카카오 콩(초콜릿의 원료), 얌, 아콘(땅에서 캐내는 배), 파프리카(피망), 해바라기 등등... 심지어 담배와 고무나무까지. 많은 사람들이 고무나무는 동남아시아 원산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아마존 열대우림이 고향이다.

특히, 현재 세계 4위의 식량작물인 감자의 경우, 페루에서 유럽으로 전파되면서 ‘감자혁명(Potato Revolution)’이란 용어까지 생겨날 정도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감자의 원조인 페루의 감자연구소에서는 현재 4,000여 종의 감자를 실험 연구 중이고, 수도 리마의 농산물시장에서 거래되는 감자의 종류만 300여 종에 이른다.)
유럽인들의 식단을 확 바꾸면서 영양분 공급(비타민 C가 사과의 6배, 식량작물 유일의 알칼리성 건강식품)과 함께 삶의 질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것.
다양한 식단 개발과 인구증가의 숨은 공로자가 바로 감자라는 얘기다.
추위 등 불리한 기상조건에서도 잘 자라는 감자는 어떤 종류의 먹거리와도 잘 어울려 가히 ‘신(神)이 내린 선물’로 통할 정도다.
또한 주식은 물론, 패스트푸드의 프렌치 프라이, 감자칩 과자 등으로도 이용이 활발할 뿐 아니라, 백신 등 다양한 의약 소재로도 활용되는 등 보폭을 넓혀가고 있다.
그러나 당초 감자가 처음 유럽에 건너갔을 때는 식용 보다는 관상용으로 더 인기를 끌었는데,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는 열렬한 ‘감자꽃’ 애호가 였다고 한다.

잉카인들의 실험농장 ‘모라이(Moray)’는 어떤가.
해발 3,500m 석회암 고원에 마치 원형경기장처럼 생긴 동심원 형태의 계단식 밭인 ‘모라이’는 날씨와 고도에 따라서 농작물이 어떻게 자라는지 연구하는 농작물 재배 실험지.
잉카인들이 감자, 옥수수 등의 품종 개량을 위해 조성한 일종의 농업기술 연구단지인 ’모라이‘는 총 24개의 계단으로 이뤄져 있으며, 바닥에서 꼭대기 까지 높이가 자그마치 140m에 이른다.
층 간 간격이 일반 성인 키 크기로 일정하게 고도를 유지, 층 간의 온도차를 이용해 옥수수와 감자 등 농작물의 적응력 등을 실험했다고 한다.
잉카의 농업기술이 뛰어난 이유도 이러한 연구 결과, 온도차를 이용해 따뜻한 곳에서는 옥수수 같은 농작물을 계단식 밭의 맨 아래에 심고, 감자와 같이 추위에 강한 농작물을 위쪽에 심은 데서 엿볼 수 있다. 이런 농업기술과 관개(灌漑)시설 기술에 힘입어 척박한 고산지대에서도 잉카제국은 찬란한 문명을 꽃피울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16세기 ‘대항해시대’ 스페인·포르투갈의 중남미지역 정복으로 이들 작물과 채소, 과일이 유럽으로 전파되지 않았다면 인류의 역사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유럽인의 중남미정복을 미화하려는 뜻이 결코 아니니 오해 없기 바람.)
그럼에도 오늘날 현대인들은 중남미지역이 선사한 이 같은 먹거리들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고 합당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이런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던 내 자신이 매우 부끄러웠다.

아울러, 비록 여러 요인으로 인해 현재 우리 보다 경제 사정은 좋지 않지만, 농산물을 비롯한 각종 풍부한 자원을 보유한 중남미국가들에 대한 연구와 교류의 활성화를 위해 가일층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류석호 강원대 외래교수>

필자 약력
△강원대 외래교수
△전 조선일보 취재본부장
△변협 등록심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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