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무 회장


6월 27일은 저의 증조부 괴은(槐隱) 이 한기(漢基) 선생의 탄신일입니다. 그분은 1868년, 고종 5년, 일본의 메이지 원년에 태어나서 1945년에 일제의 패망을 보시고 10월에 별세하셨습니다. 괴은 할아버지는 일본 제국주의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77년 동안을 제 고향 경상북도 영천의 고경면 용전리 추곡 마을에서 사신 셈이지요. 금호강의 지류 고촌천 유역에 ‘달련들’이라는 조그만 평야를 앞에 둔 이 마을은 용이 마을 동쪽 못가의 밭에 앉았다가 승천했다는 전설로 인해 ‘용전리’가 되었답니다.


용전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만고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의 생가와 그분을 모신 영천 유림의 본거지, 임고서원이 있습니다. 괴은 할아버지는 일찍이 경상도 유림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한 대계(大溪) 이 승희(承熙)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셨고, 1903년 인종(仁宗)릉인 효릉(孝陵)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임고서원을 중심으로 평생을 초야의 선비로 보내셨지요. 집안을 자수성가하시면서 1924년에는 13대조 처야당 재실 중건, 1931년에는 9대조 송남공 문집 간행 등 선조를 현창하는데도 주력하셨습니다. 맏손자인 저의 아버지가 출생한 1925년에 고택을 지어 1936년에 지금 모습으로 중건, 환갑인 1928년에는 마을 건너편 산록에 침수정(枕漱亭)을 지었습니다. 정자 이름은 옛날 중국 죽림칠현의 ‘침석수류(枕石漱流, 돌을 베개 삼고 흐르는 물로 양치함)’처럼 산림에 은거하는 깨끗한 삶을 뜻하되, 진(晉)나라 손초(孫楚)의 ‘침류수석(枕流漱石, 흐르는 물에 귀를 씻고 돌에 이빨을 간다)’의 고사를 빗대어 일제하에 뒤집힌 세상을 은유하기도 하였답니다. 이런 일들은 저의 할아버지 여려(旅廬) 이 종택(鍾澤) 선생이 어른을 극진히 모시면서 함께 진행하셨지요. 부자(父子)분의 성심 합력하신 일화가 지금까지도 마을에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저의 외가는 경남 밀양의 부북면 퇴로리 여주이씨 집안인데, 제 어머니의 할아버지가 퇴수재(退修齋) 이 병곤(炳鯤) 선생입니다. 손주들의 가연으로 사돈이 된 괴은과 퇴수재, 두 분은 경상도 유림에서 꽤 알려져 있었지만 막상 혼인은 괴은 할아버지 별세 2년 후여서 직접 만나지는 못하셨답니다. 퇴수재 할아버지는 1882년에 출생,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보시고 10월에 67세로 서거하셨습니다. 저의 외가는 유가(儒家)이지만 방계선조인 성호(星湖) 이 익(瀷) 선생의 실학전통을 이어서 일찍부터 신학문 도입에 적극적이었습니다. 특히 퇴수재 할아버지는 영남유림 항일운동의 구심점이던 심산(心山) 김창숙 선생과 가깝게 지내시면서 서울에서는 위암 장지연, 육당 최남선 선생들과도 교유하셨습니다.


그분은 1909년에 퇴로 이씨 문중에서 설립한 신활자 인쇄소인 동문사(同文社)에서 ‘성호집’ 등의 실학 고전을 간행하는 한편, 사립보통학교로 역시 문중에서 설립한 ‘정진(正進)학교’ 교장을 역임하셨습니다. 1930년대 말 이후에는 ‘비협조 불복종’ 운동의 지도자로 일제의 감시와 사찰을 받다가 1944년에 경남 경찰 고등과에 체포 구금되어 40여일 고초를 겪기도 하셨지요. 해방 후에는 밀양유도회(儒道會)회장과 밀양향교의 전교(典敎)로 추대되셨다가 옥고의 여독으로 광복 3년 만에 타계하셨습니다. 이분도 부친 용재(庸齋) 이 명구(命九) 선생과 함께 퇴로 뒷산 중턱에 삼은정(三隱亭)을 짓고, 정자 앞에는 연못을, 후원에는 진귀한 수목과 화초를 가꾸어 인근에 명성이 자자하게 만드셨다지요.


저의 할아버지는 1899년, 19세기의 말년에 태어나서 1970년 12월 제가 대학교 졸업시험을 칠 때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은 일생을 부모님에 대한 지극한 효성으로 일관하셨고, 조상 모시고 손님 대접하는, 선비집안의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에 한 치도 소홀함이 없으셨습니다. 부친의 문집 ‘괴은유고(槐隱遺稿)’를 간행하고 영천 성산이씨 종중의 어른으로 사시는 한편, 자손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장남인 저의 아버지가 영남의 명문 경북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대구시 중구 삼덕동 1가 28의 12에 새로 집을 짓고 거처를 옮기셨지요. 고모님과 숙부님도 그 집에서 학교를 다녔고 저도 그 집에서 태어나서 자랐습니다. 고향을 떠나 살게 되면서 스스로 호를 ‘나그네의 집’이란 뜻인 ‘여려(旅廬)’로 지으셨는데, 이태백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 나오는 “무릇 천지는 만물의 여관(夫天地者 萬物之逆旅)”이라는 구절과 도연명의 “사람 가운데 집을 지어도 수레와 말의 시끄러움이 없네(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라는 싯귀에서 한 자씩 따오셨답니다.


여려 할아버지는 지금도 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면서도 제일 무서운 분입니다. 저를 끔찍이 사랑해주셨지만 훈육에는 추상과 같이 엄하셨지요. 사람의 도리와 세상을 사는 이치를 가르쳐주시면서, 시대에 맞추어 살되 고루하거나 옹졸하지 않게, 여유 있고 의연한 선비의 삶을 온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작년에 제가 고향집에 내려와 살면서 얼마 전 고택 안채에 올해 8순이 되신 저의 숙부님의 친필로 ‘여려(旅廬)’ 현판을 거는 행사를 했는데 할아버지께 뭔가 조금 해드린 것 같아 뿌듯했습니다.


괴은과 퇴수재, 그리운 여려 할아버지! 저를 세상에 있게 해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없이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투데이코리아 회장>

필자 약력
△전)농림수산부 기획관리실장
△전)세계식량농업기구(FAO)한국협회 회장
△전)농어업농어촌 특별대책위원회 위원장
△전)한국농어촌공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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