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은경 작가


태풍 지나는 길목에 있게 되니 영천에 종일 비가 내렸다. 지난 주 부터 시작된 장마 시기에는 비가 왔다 갔다를 반복했지만 태풍 때는 다르다. 가랑비 정도의 비가 줄기차게 내렸다. 작년에는 장마도 없었고 태풍도 없었다. 올해는 두 가지 다 있으니 덕분에 물 걱정은 안 하지만 조금 있으면 과일 동네인 이곳 영천에 일조량 부족을 우려하는 소리가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런 와중에 능계댁의 살구가 샛노란 색으로 익어서 우리의 눈길을 붙들었다. 아마 장마 전 뜨거운 날씨에 다 익었나보다. 별빛중 생활을 무사히 끝낸 외손녀들이 노란 살구에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고 딸과 나는 무작정 그 댁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귀여운 멍멍이가 먼저 컹컹 짖으니 이윽고 두 분이 머리를 내미신다. “저거 살구죠? 맛있어 보이는데요.” 외손녀들은 몇 개를 얻어먹고는 정말 맛있다고 찬탄 일색이다. 한국에서의 학교생활을 잘 보낸 상으로 한 상자 사 주기로 했다.


어제는 매호댁 아지매가 오셔서 갓 수확했다고 커다란 감자와 마늘을 한 보따리씩 주셨다. 마침 형님이 손녀 아이들 주라고 사다 준 조생 옥수수가 있어서 드실려나? 물어보았더니 옥수수는 좋아하신단다. 마당에도 있지만 아직 안 익었다고 하시면서 말이다. 옥수수로 말하자면 우리 텃밭에 있는 옥수수도 키는 장대 같이 크지만 아직 열매가 여물지 않았다. 장날 종자 한 봉지를 1200원에 사서 텃밭에 뿌렸더니 한 90프로 정도 발아했는지 텃밭의 두 고랑을 꽉 채웠다. 종자 한 봉지가 60그루의 옥수수가 되었으니 한 그루에 옥수수 서너 자루 씩이라고 계산해 보자면? 이런 공짜가 어디 있나 싶다. 게다가 우리 옥수수는 수염이 나기 시작하는데 신기하게도 핑크빛이다. 종자 봉지에 ‘알록이 옥수수’라는 이름으로 그림이 있는데 옥수수 이곳저곳이 핑크빛 얼룩인 옥수수였다. 처음 보는 모습이라 신기해서 샀는데 수염이 핑크빛이면 그림대로 옥수수 열매도 핑크빛일지 어서 보고 싶다.


오늘 아침엔 화남댁 아지매가 식전에 오셨다. 아지매는 벌써 아침을 끝내셨다는 것인데 알이 굵은 감자와 가지 오이를 몇 개씩 가지고 오셨다. 들어오시라고 했더니 감자가 맛있다고 연신 강조하신다. 보고 계신 중에 감자 껍질을 벗겨 채를 쳐서 볶음 반찬을 해 봤는데 쫄깃쫄깃 정말로 맛있었다. 확실히 쪄먹을 때 더 맛있는 포실포실한 김제 감자와는 다르다. 연신 맛있다고 했더니 마을 회관에도 다섯 번이나 가지고 가 할머니들과 같이 삶아 먹었다고 하신다. 다섯 번이나? 다른 할머니들은 장에 나가 팔기도 한다던데? 했더니 매달 연금이 20만원에다 국가에서 주는 노령연금이 또 20만원, 해서 40만원 받는데 그걸로 한 달 살면 남기도 한다고 하신다. 어제는 아들이 삼겹살을 사 가지고 와서 실컷 먹었다고 말씀하신다. 마을회관에서 무슨 일이 있어 주민들이 모이기라도 하는 날에는 항상 늦게까지 남아 설거지와 청소를 맡아 하시는 분인줄 잘 알고 있다. 냉장고 청소도 담당이다. 그 얘기를 했더니 그래도 그런 일을 누군가는 해야 하지 않겠냐고 하신다. 항상 웃음을 보이시는 그 분이 우리 집을 나가기 전에 해 준 이야기에 나는 그만 포복절도하고 말았다. 궁금하시죠? 그 이야기?


우리 마을 최고령자, 전오할매, 94세 이신데도 잘 걸어 다니고 식사도 잘 하신다. 물론 그 연세에 비해서다. 지금은 국가에서 일주일에 사흘은 사람을 보내 주어 식사와 살림을 돌보아 준다. 3년 전에 아드님이 어머님 혼자 사시는 것이 안쓰러워 요양원에 보냈는데 처음 면회하는 날, 그 분이 어디서 몽둥이를 준비했다가 아드님을 한바탕 요절내었다는 것. 그래서 ‘엇! 뜨거워라.’ 도로 모셔왔다는 것이다. 산이 있고 들이 있고 친구들 많은 고향을 가진 분이 어딜 떠나겠는가. 정신이 말짱한 동안은 나라도 이곳에서 살고 싶다.


여러분은 어느 쪽? 혹시 몽둥이를 준비해야 하는 쪽은 아니신가요?


<작가>
조은경 약력
△2015 계간문예 소설부문 신인상 수상
△소설 '메리고라운드' '환산정' '유적의 거리' '아버지의 땅'등 발표
저작권자 © 투데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