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 한 행사에 참여해 단군탄신일을 축하하는 학생들. 사진은 기사내용과 관련 없음.


[투데이코리아=오주한 기자] 곧 있으면 개천절(開天節. 10월3일)이다. 기원전 2333년 단군왕검(檀君王儉)이 고조선을 건국한 날을 기리는 공휴일이다. ‘하늘이 열린 날’ 말만 들어도 마음이 탁 트이는 느낌이 든다.


고조선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역사 기록은 13세기경 작성된 삼국유사(三國遺事)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조선은 한반도 북부와 요동(遼東) 등 중국 동북지방에 걸친 국가였다.


그런데 과연 우리 한(韓)민족이 고조선 하나에서만 태동한 민족일까. 본 기획에서는 우리 민족에게 전승되어 내려오는 창세신화, 그리고 동북아에 분포해있던 한민족 원류(源流)를 찾아 떠나본다.


마고할미 창세신화


여느 민족이 그렇듯 우리 한민족에게도 창세신화는 있다. 전국 각지에 전해내려오는 전승 등을 종합하면 우리 민족의 창세신은 ‘마고(麻姑)할미’다. 이 마고할미는 마고할망, 마고할머니, 마고선녀 등으로도 불린다.


현대에 들어서는 식량부족, 육식동물 습격 등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여성이 미래를 점치는 제사장의 역할을 행하면서 남성보다 지위가 높았던 석기시대 모계(母系)사회 때의 전설로 분석하고 있다. 농사로 인한 안정된 식량수급과 마을 형성 등 보다 안정된 치안 속에 남성의 근력이 중시된 부계(父系)사회로 넘어오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잊혀지게 됐다는 것이다.


신화에 의하면 마고할미는 온 세상을 덮을 만한 체격의 ‘거인’이었다. 제주 설문대할망 전승을 예로 들면 마고할미는 얼마나 큰지 한라산을 베고 누우면 발끝이 제주도 북방 관탈섬에 닿을 정도였다. 이 마고할미가 치마폭에 싸서 나르던 흙이 산 또는 섬이 됐고, 방뇨가 산이나 하천이 됐다는 게 마고할미 전설의 주된 내용이다.


언뜻 봐도 알겠지만 후대로의 전승 과정에서 농경사회 이후 시대상에 맞게 변질된 것을 알 수 있다. 석기시대 때는 추위를 막기 위해 가죽옷을 해 입는 게 전부였지 치마는 존재하지 않았다. 치마가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곳은 삼국시대 문헌들이다.


고조선이 상고시대 한반도 유일국가는 아니다


하지만 이 마고할미 신화를 한민족 공통의 신화라고 볼 수는 없다. 애초부터 한민족은 한(韓)족의 진(辰)나라, 예맥(濊貊)족의 부여, 한족·한(漢)족·예맥·숙신(肅愼)·동호(東胡) 등이 혼합된 고조선 3개 국가가 삼국시대를 거쳐 신라에 의해 통합된 뒤 탄생한 민족 개념이기 때문이다.


3개 국가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곳은 고조선이다. 정확한 사료는 없어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하지만 고려의 승려 일연(一然)이 저술한 삼국유사에 따르면 건국연도는 기원전 2333년(기원전 24세기)이다.


우리 정부는 삼국유사를 기준으로 단기(檀紀)를 연호로 사용하고 있다. 다만 역사기록에 고조선이 처음 등장한 건 기원전 7세기 중국 제(濟)나라의 재상 관중(管仲)이 저술한 관자(管子)다.


고조선의 본시 국명은 조선(朝鮮)이다. 훗날 14세기 이성계(李成桂)에 의해 건국된 조선과의 구분을 위해 학자들이 고조선이라 명명한 것이다. 관자는 고조선을 발조선(發朝鮮)이라고 칭하고 있다.


고조선이 여러 사서에 뚜렷하게 언급된 사건은 중국 한(漢)나라 건국 시기인 기원전 2세기 무렵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고조선을 차지하고 왕에 오른 ‘위만조선’ 건국이다. 고조선을 구성하는 민족에 중국 한족이 포함되는 건 이 때문이다. 참고로 중국 사서를 인용하는 이유는 국방TV 프로그램 ‘토크멘터리 전쟁사’에 출연 중인 임용한 박사도 늘 강조하는 바이지만 우리 선조들이 남긴 상고시대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 고조선이 차지한 강역은 상술했듯 한반도 북부, 중국 동북지방에 그쳤다. 나머지 땅은 다른 두 나라가 차지했다. 기원전 2세기경 지금의 만주지방에는 부여가, 기원전 3세기경 한반도 남부에는 진나라가 세워졌다.


부여, 진나라가 고조선에서 갈라져나온 게 아니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지만 학계는 ‘완전 다른’ 문명으로 분류한다. 부여는 지금의 중국 지린(吉林)성에 존재했던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를 전신(前身)으로 본다. 3세기 중국 서적 위략(魏略)에 따르면 기원전 5세기경 북만주에 건국된 탁리국(橐離國)에서 탈출한 인물이 세웠다. 이 인물의 정체에 대해서는 해모수(解慕漱), 동명왕(東明王) 등 의견이 분분하다. 둘이 동일인물이라는 설도 있다.


기록이 어느 정도 남아 있는 고조선, 부여와 달리 한반도 남부의 진나라는 미스터리 그 자체다. 다만 건국과정은 어느 정도 파악되고 있다.


“한(韓)은 세 갈래가 있는데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이다. 모두 78개국이다. 전부 옛날의 진국(辰國. 진나라)이다”라는 내용의 중국 남북조시대 후한서(後漢書) 기록, “진국이 천자에게 글을 올리려 했으나 (고)조선이 계속 가로막고 있어 한(漢)나라와 교통하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의 중국 후한(後漢)시대 한서(漢書) 기록, “내가 몸소 약취해 온 한인(韓人) 등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는 광개토대왕릉비 기록 등이 전부다.


위만에게 왕좌를 빼앗긴 고조선의 준왕(準王)이 한반도 남부로 내려와 진나라를 세웠다는 설도 있지만 한반도 남부 토착세력인 한(韓)족이 곳곳에 세운 도시국가들의 연맹체라는 설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거울이 뒤틀리면 사물도 뒤틀리게 보인다


이렇듯 본시 다른 뿌리를 둔 여러 민족들이 ‘하나의 민족’으로 묶인 때는 7세기 무렵이다.


진나라에서 뻗어나온 3개 한국(韓國) 중 진한을 구성하는 12소국의 하나인 사로국(斯盧國)을 모체로 하는 신라는 부여를 흡수한 고구려, 부여족(夫餘族) 일파에 의해 세워진 백제를 무너뜨리고 통일신라를 건국한 뒤 중국 당(唐)나라로부터 한반도 북부를 탈환해 한민족의 기틀을 세운다. 이 시기 단일민족이라는 정체성을 수립한 한민족은 고려, 조선, 대한제국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르게 된다.


부여, 진나라는 상대적으로 역사에서 소외되고 고조선만이 전면에 우뚝 올라서게 된 계기는 일제(日帝)치하다. 일본제국의 수탈 앞에 지식인들은 대중을 계몽할 방법이 필요했으며 민족주의 고취의 수단으로 고조선을 택했다는 게 학계 일각의 분석이다.


부여, 진나라는 상대적으로 기록이 적은 데다 구심점 역할을 할 인물로서 단군왕검이라는 실체가 존재하는(실존여부는 학자 입장마다 다르지만) 고조선은 독립운동가들에게 있어서 매력적인 나라였음이 틀림 없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지나치게 고조선만을 띄우는 감이 없잖아 있다는 우려도 시민들 사이에서 제기된다. 심지어 역사적 근거는 희박한 ‘고조선은 실은 최첨단문명이었다’ ‘고조선이 전세계 문명의 뿌리다’ 등 루머의 근간이 돼 일부 세력에 의해 돈벌이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북한에서는 “고조선이 위치했던 공화국(북한)에 민족의 정통성이 있고 단군 이래 영웅인 김일성이 민족의 지도자” 등 정권 차원의 역사왜곡이 자행되고 있기도 하다.


그나마 고조선에 이어 간간이 언론·방송에서 다뤄지는 북방국가 부여와 달리 남방국가 진나라는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런 나라가 있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통일신라 이래 1000년이 넘는 기나긴 세월 동안 같은 언어, 같은 문화, 같은 식습관을 갖고서 같은 역사 아래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으며 함께 호흡해 온 한민족은 분명 단일민족이다.


이웃나라 일본이 전국시대(戰國時代) 때 약 100년간 서로를 적대시하면서 오늘날까지 한국과의 비교를 불허하는 극심한 지역감정을 겪고 있음을, 중국에서는 남쪽의 광둥어(廣東語) 구사자와 북쪽의 표준어 구사자 간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실로 축복받은 민족이라 할 수 있다.


더 이상 일부러 민족성을 고취시키려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끈끈한 민족애가 한민족에게는 있다. 따라서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보여주고, 주관적 역사관을 주입하는 대신 객관적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자세를 심어주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개천절을 며칠 앞둔 지금 생각된다.


일각에서 공산주의자로 분류되는 영국의 역사학자인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 Carr. 1892~1982)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History i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라고 말했다. 과거를 거울 삼아 현재를 바라봐야 한다는 뜻이다. 말 자체는 맞는 말이다. 거울이 뒤틀리면 사물도 뒤틀리게 보이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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