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오늘날을 통해 보는 문자의 ‘역동성’

▲ 전세계의 다양한 문자들.


[투데이코리아=오주한 기자] 9일은 한글이 탄생한지 572년째 되는 날이었다. 개화기 국어학자였던 주시경 선생이 1906년 작성한 대한국어문법은 서기 1446년 세종대왕(1397~1450)이 집현전(集賢殿) 학자들과 함께 한글을 창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서쪽의 이웃나라 중국은 천문학적 개수의 한자를 외우느라 전국민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한자는 매 글자 하나하나가 사물 등을 의미하는 뜻글자이기에 그 개수가 엄청나게 많을 수밖에 없다. 동쪽의 이웃나라 일본은 히라가나(平仮名), 가타카나(片仮名) 등 마치 ‘만들다가 만 듯한’ 문자 때문에 온 국민이 마찬가지로 한자 외우기에 시달리고 있다.


반면 한글은 소리글자이기에 자음, 모음만 외워서 조합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다. 이같은 과학적이면서 아주 쉬운 문자를 후손에게 남겨준 세종대왕에게 우리 모두가 감사해야 하는 이유, 한글날을 기려야 하는 까닭이다.


문명(文明)이 야기한 문자(文字)의 탄생


지금까지 학계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인류 최초의 문자는 기원전 3300년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5300년 전에 이라크 남부지방에서 탄생했다. 바로 쐐기문자(cuneiform)로 수메르(Sumer)인들이 만든 이 문자는 대단히 원시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대개 점토판에 기록됐으며 필기도구로는 끝을 뾰족하게 자른 갈대 가지가 쓰였다. 이 쐐기문자는 후대에 페르시아(Persia. 지금의 이란) 등 많은 문자에 영향을 끼쳤다.


문자의 필요성은 농경에서 야기된 것으로 학계는 추측하고 있다. 석기시대의 수렵·채집은 문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단순히 언어와 손짓만으로 어디에 어떤 과일이 있고 어떤 동물이 있는지 소통할 수 있다. 그러나 농사는 대단히 복잡한 체계를 필요로 한다. 쌀이든 밀이든 어떤 작물이든 대규모 재배과정에서 물(水)은 필수적이다. 특히 쌀의 경우 엄청난 양의 담수가 필요하다. 자연스럽게 큰 강줄기 옆에 터전을 닦을 수밖에 없고 필연적으로 적잖은 인적·물적피해를 불러오는 홍수를 감당해야 한다.


이 홍수를 막기 위해서는 치수(治水)가 선행되어야 하며, 제방 건설·수리를 위해 수시로 대규모 인력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행정이 발달할 수밖에 없고, 농경으로 인해 급속도로 불어난 영토 각지에서 인력을 모으기 위해서는 파발을 띄울 수밖에 없으며, 전령에게 명령서를 맡기기 위해서는 문자가 발달할 수밖에 없다. ‘문명(文明)’이라는 단어를 구성하는 한자에 ‘글월 문(文)’이 들어가는 까닭이다.


실제로 고대로부터 치수는 제왕(帝王)의 가장 큰 덕목이었다. ‘대홍수’는 전세계 어떤 문명을 막론하고 고대에 공통적으로 기록되는 사건이다. 농경과 함께 잉여생산물이라는 개념이 탄생해 가장 많은 재산을 갖게 된 이들이 왕이나 귀족을 구성했으며, 자신들과 공동체의 자산을 노리고 침입하는 외부세력을 막기 위한 병역자원 역할도 병행하는 백성들의 인력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치수에 매진했다. 기술의 발전은 문자의 더 큰 발달을 불러오는 선순환 현상을 야기했다.


▲ 종이에 쓰인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일부. 2015년 3월 화재로 일부가 불에 탔다(사진=배익기 씨).


‘종이’ 문자의 발달을 촉진하다


오늘날 전세계에서 사용되는 문자 체계는 크게 이집트 히에로글리프(Hieroglyph), 중국 갑골(甲骨)문자의 후손으로 학계는 정리한다.


히에로글리프는 지중해의 페니키아(Phoenicia)문자 등으로 이어졌으며 이 페니키아 문자는 그리스·아랍 문자로 발전했다. 그리스 문자는 오늘날의 영어 알파벳의 원조 역할을 했다. 기원전 1200년경 등장한 중국 최고(最古)의 ‘최초의 체계적’ 문자인 갑골문자는 한자로 이어졌으며 일본 히라가나 등에도 영향을 미쳤다.


최초의 문자가 탄생하고 억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소실되고 잊혀진 종류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두(吏讀)가 있다. 한자의 음과 훈(訓. 새김)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던 차자표기법(借字表記法)의 하나로 삼국시대에 발달하기 시작해 통일신라시대에 성립된 뒤 19세기 말까지 쓰이다 지금은 사실상 소멸됐다. 다만 고금석림(古今釋林) 등 문헌을 보면 이두가 어떤 모양이었는지 알 수 있다.


해외에는 요(遼)나라 시절 만든 거란(契丹)문자, 키릴(Cyrill)문자가 생기기 이전 슬라브족이 쓰던 글라골(Glagolitic)문자, 북유럽에서 사용된 룬(Runic)문자, 마치 그림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모양새의 마야(Maya)문자, 베트남의 쯔놈(Chữ Nôm) 등이 있다. 쐐기문자, 이집트 상형문자 등은 물론이다.


문자 사용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바로 ‘종이’의 발명이다. 종이가 나오기 이전에 사용된 비단, 점토, 파피루스(Papyrus), 갑골, 죽간(竹簡), 양피지 등은 무게도 엄청날 뿐더러 생산량도 제한돼 가격이 높아 서민이 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서기 105년경 중국 한(漢)나라의 환관 채륜(蔡倫)이 만든 종이는 문자 역사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우선 종이는 가벼웠다. 따라서 한 사람이 많은 양의 서류를 휴대할 수 있었으며 자연히 쓸 수 있는 글자의 양도 많아졌다. 가격도 마찬가지다. 물론 종이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사치품’으로 분류됐지만 원(元)나라의 서역원정 등을 통해 서구권에 전달돼 개량되는 과정에서 대량양산이 가능해졌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대량으로 생산되고 무게까지 가벼운 종이는 ‘글’만 안다면 누구나 문서를 읽고 작성할 수 있게끔 했다. 급기야 15세기 서양에서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에 의해 금속활자가 발명돼 서민에서부터 귀족까지 모두가 문자를 접하게 됐으며, 문자의 폭발적인 수요 증가는 문자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우리 한글의 탄생도 종이의 영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훈민정음(訓民正音) 서문은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한 사람이 많다”며 ‘백성’을 위해 한글을 만들었다고 못 박고 있다. 세종 시기에는 이미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등 문학작품들이 종이로 출판돼 서민층에서도 널리 읽혀지고 있었다. 종이가 없었다면 서민들이 문자를 읽고 나아가 써야 할 필요성도 상대적으로 적었을 수밖에 없으며, 세종대왕이 ‘백성’을 위해 간편한 새 문자를 만들 이유도 그만큼 줄어들었으리라.


‘제2의 종이 혁명시대’ 우리의 자세는


문자는 역동적이다. 고여있는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이다. 문자는 불과 한 세대만 지나도 다른 형태, 다른 뜻으로 변모한다. 특히 ‘제2의 종이 혁명’이라 할 수 있는 ‘인터넷’ ‘채팅 어플’의 탄생은 문자의 수요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켜 변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부모가 10대 자녀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모습을 우리 주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물론 부정적인 목소리도 있다. 10~20대 연령층에서는 흡사 ‘외계어’를 연상시키는 신조어들이 남발되고 있다. 30대 후반만 돼도 청소년들과 의사소통이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 “귀엽긔”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애초에 “긔”라는 단어 자체가 쓰인 적이 없다. 한글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문자’라 해도 무방하다. 많은 국민들 사이에서는 한글의 변질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변질 그 자체보다는 젊은층의 ‘탈선’을 염려하는 시선이 커지고 있다. 아직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10대~20대 초반 연령층이 비속어를 자주 사용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성품도 그에 맞게 형성된다. 많은 청소년·청년층이 공공장소나 인터넷·채팅 과정에서 아무렇지 않게 욕설의 의미가 담긴 ‘외계어’를 내뱉아 주변인들의 얼굴을 찌푸리게 만드는 게 현실임은 틀림없다.


문자의 변화가 필연적이라면 그것을 억지로 막기보다는 청소년·청년층을 계도하는 자세가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훗날 한글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재탄생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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