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위해 싸운다” 용병 세계의 과거와 오늘날

▲ 미국 민간군사기업(PMC)인 블랙워터 소속 용병.


“대신 싸워 드립니다” 용병의 역사


[투데이코리아=오주한 기자] 세상에 많은 조직폭력단이 존재하지만 간혹 조폭인지 아닌지 ‘구별’이 가지 않는 존재들도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국가’와 정식계약을 맺고 ‘폭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바로 ‘용병’이다.


용병의 역사도 전쟁의 역사와 맞물려 유구하다. 멀리는 고대 이집트 때 타 민족에게 보수를 지급하고 군인으로 채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세유럽에서는 기업화 된 용병단이 활동했으며 근세에는 ‘국가 공인 해적’인 사략선들이 난무했다. 21세기 오늘날에도 용병은 ‘민간군사기업(PMC)’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았다.


고대에는 자국 상비군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용병을 고용했다. 특유의 밀집전투대형인 ‘팔랑크스(Phananx)’ 등 보병이 강했던 그리스 폴리스(Police. 도시국가)들은 유목민인 스키타이(Scythai)의 궁기병 등을 고용해 기동전에 사용했다. 기병이 강했던 페르시아(Persia)제국은 그리스 중장보병을 기용했다. 동양에서도 한(漢)나라는 흉노(匈奴) 기병 등을 써먹었다.


중세에서는 유럽이 ‘용병 전성시대’를 맞았다. 까닭은 ‘봉건제’에서 찾을 수 있다. 동양은 한나라 이후로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구축했다. 속된 말로 누구나 천자(天子)가 ‘까라면 까야’ 했다. 조정에서 파견된 태수들은 황제 지시 한마디면 군사를 이끌고 전선으로 향했다. 때문에 용병은 고대 때와 마찬가지로 부족한 전력을 보충하는 선에서 그쳤다.


하지만 유럽은 달랐다. 왕은 ‘귀족의 대표자’ 쯤으로 여겨졌다. 지방영주들과 왕의 관계는 주종(主從)이 아닌 ‘협력자’였다. 지방영주는 1년 중 자신에게 부과된 복무기한(통상 40일)만 채우면 그만이었고 그나마 태반은 군사를 끌고 가는 대신 ‘헌금’으로 대신했다. 왕을 위해 전쟁해봤자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은 없으며 차라리 그 시간에 농노들이나 열심히 부려 재산을 불리는 게 유리했기 때문이다. 왕이 죽든 말든 그들에게는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재정은 넘쳐나고 군사력은 부족한 왕들은 자연히 외부로 눈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중세 당시 ‘마굴’로 정평이 났던 스위스, ‘베르세르크(Berserk. 광전사)’로 유명한 북유럽, ‘술의 고장’ 독일 등 ‘싸움꾼’들은 넘쳐났다. 이들은 서유럽 왕들과 계약을 맺고 지방영주들을 대신해 전장으로 나아갔다.


가장 유명한 중세 용병단 셋을 꼽으라면 스위스 장창병과 독일 란츠크네히트(Landsknechts), 북유럽 바랑기안(Varangians)근위대다.


오늘날 시계, 금융 등으로 번성하는 스위스는 중세까지만 해도 악마와 귀신이 들끓는 ‘마굴’ 쯤으로 인식됐다. 국토의 태반이 알프스산맥 등 산악지대였으며 농사도 짓기 어려워 자연히 이 지역에서는 한정된 자원을 두고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스위스인들은 생존을 위해 누구나 무력을 키웠으며 서유럽 왕들은 이를 주목했다.


한 번 고용된 스위스 용병들은 전투력은 물론 놀라운 충성심도 발휘했다. 이들은 ‘신용’을 목숨처럼 지키며 고용주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1527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이 바티칸을 습격하자 정규군이 모두 달아난 가운데 오직 스위스 용병들만 끝까지 남아 전멸을 택했다. 때문에 교황청은 오늘날까지도 스위스인들을 근위대로 고용하고 있다. 물론 장창, 갑옷은 의전용으로만 사용되며 유사시에는 자동화기를 꺼내 든다.


스위스 용병들은 훗날 1792년 프랑스 대혁명 때도 마지막까지 왕궁을 수비하다 시민군에 의해 몰살당했다. 스위스 루체른(Luzern)주의 ‘빈사의 사자상(Löwendenkmal)’은 그때 전사한 700여명의 용병들을 기리고 있다. 최고의 신용을 입증한 스위스 전사들은 누구나 가장 먼저 선호하는 용병단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점차 기업화 돼 영업·현장·보급 등으로 업무가 세분화되기 이른다.


▲ 전선으로 떠나는 란츠크네히트 용병. 뒤의 여성은 부인이 아니라 용병단을 따라다니며 여러 일을 하는 잡부다.



‘돈’ 있으면 용병, ‘돈’ 없으면 조폭


그러나 용병들의 ‘신사다움’은 어디까지나 고용주가 ‘계약’을 지킬 때나 유효했다. 조금이라도 ‘수틀리면’ 이들은 곧장 ‘조폭’으로 돌변했다. 대표적 사건이 1527년 ‘사코 디 로마(Sacco di Roma)’다.


양손대검 ‘츠바이헨더(Zweihänder)’로 상징되는 란츠크네히트는 1487년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Maximilian) 1세가 스위스 용병단에 대항하기 위해 창설한 용병단이다. 싸움 잘하고 거칠었으며 무엇보다 ‘화려한 복장’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이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용병의 특성상 ‘짧고 굵게’ 살기 위해 치렁치렁한 레이스가 달린 옷을 선호했다. 당대에도 ‘저속하다’는 비판이 잇따랐으나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란츠크네히트는 그들이 진심으로 존경한 장군 ‘게오르그 폰 프룬츠베르크(Georg von Frundsberg)’를 따라 로마로 진군한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카를(Karl) 5세는 부족한 용병 계약금을 채우기 위해 아내의 보석장신구를 팔아치울 정도로 빈궁한 상태였다. 프룬츠베르크는 자식처럼 여긴 용병들을 달래려 애썼으나 ‘돈’ 앞에서는 ‘의리’도 먹혀들지 않았다.


마침내 프룬츠베르크가 분사(憤死)하고 마지막 안전핀마저 뽑히자 란츠크네히트는 ‘도적떼’로 변모했다. 그들은 모자란 계약금을 ‘약탈’로 충당하려 했다. 통제불가 상태에 빠진 이들은 곧장 로마로 진군했으며 수비군이 후퇴하고 스위스 용병단이 전멸하자 텅텅 빈 시내로 몰려가 대학살극을 저질렀다. 포로 1000여명이 공개처형당한 것을 시작으로 남성은 군인이건 사제건 모조리 살해당했으며 여성은 수녀까지도 강간당하고 처형됐다. 로마의 재물이란 재물은 모두 용병단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이 사건은 교황령 역사상 최악의 수난이자 굴욕으로 기록되고 있다.


당대 최대 논란거리로 떠오른 용병들의 이같은 만행은 군주론(Il principe)을 저술한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가 시민군 창설을 주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의 사상대로 훗날 유럽은 징병제를 실시해 기관총 앞으로 보병이 돌격한 끝에 수천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제1차 세계대전 등 전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으나 용병은 끝내 살아남았다.


▲ 영국 구르카(Gurkhas) 용병. 네팔 출신들로 구성돼 있으며 엄밀히 말하면 정규군 소속이라 용병단은 아니다. 비슷한 개념으로는 프랑스 외인부대가 있다. 한 구르카 용병은 낙향하던 중 열차를 덮친 도적떼 40여명을 칼 한자루로 ‘썰어버려’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용병, 21세기까지 살아남다


오늘날 용병은 ‘민간군사기업(PMC)’이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이다. 정규군의 경우 훈련에서부터 장비, 임금, 연금 등 병사 1명당 막대한 비용이 소모된다. 게다가 미국 등 민주주의국가의 경우 정규군이 사망할 때마다 매스미디어는 ‘반전(反戰)’을 선동하고 길거리에는 시위대가 몰려나온다. 비용 절감, 정치적 위기 근절 등 목적에서 용병은 많은 나라들이 선호하고 있다.


현대 들어 가장 유명한 용병단은 짐바브웨의 전신인 로디지아(Rhodesia)와 계약을 맺었던 국제용병단이다. 20세기 들어 인권이 부각되고 1964년 영국 정부는 아프리카에서 단 둘 뿐인 백인국가였던 로디지아(다른 하나는 남아공)에 흑인 인권탄압 중단을 지시했지만 로디지아는 ‘독립’으로 대답했다.


사방이 흑인국가들에 포위된 형국인 가운데 로디지아 정부는 징병제를 실시했지만 병역인구는 남녀노소 모두 끌어모아도 22만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유엔마저 로디지아를 제재하면서 무기수입도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로디지아 정부는 전세계에서 용병들을 끌어모았으며 여기에 미 육군 그린베레, 영국 SAS 등 내노라하는 특수부대 출신자들이 자원해 용병단이 결성됐다.


로디지아 정부의 도덕성과는 별개로 용병단은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이들은 최전성기에도 병력수가 2만5000명에 불과했으나 소련, 중국의 지원 하에 탱크 등으로 무장한 이웃나라 정규군들을 상대로 맹활약을 펼쳤다. 아이러니하게 흑인용병도 있었지만 이들은 피부색에 상관없이 투철한 동지애를 보여주기도 했다.


전쟁 과정에서 이들에 의해 ‘모잠비크 드릴(Mozambique Drill)’ 등 많은 사격술, 전술이 고안됐다. ‘다국적 전사들로 구성된’ 로디지아 용병단은 훗날 A특공대 등 많은 작품들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도 알려진다.


20세기 들어 용병은 철저히 기업화됐다. 시발점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정권 몰락 후 실업자가 된 남아공 특수부대원들이 만든 ‘EO’로 알려진다. 가장 유명한 기업은 미 해군 네이비씰(Navy Seal) 출신들이 설립한 블랙워터(Black Water)다. 이들은 미 행정부와 계약을 맺고 이라크전 등에 파견돼 교전, 경호, 구조 등 많은 임무에 투입됐다. 적잖은 전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 ‘논란들’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대다수 업체가 국가와 계약을 맺고 최대한 윤리에 충실하려 노력하지만 일부는 남미 마약카르텔 등 범죄조직과 연계돼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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