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를 강요하지 말라” 선지자 무함마드의 등장

▲ 수니·시아파 갈등에서 촉발된 예멘 내전.


[투데이코리아=오주한 기자] 문재인정부 들어 대한민국 민심은 ‘예멘 난민’ 수용여부를 두고 두 쪽으로 갈라졌다. 한편에서는 난민 인권을 부르짖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국민 인권을 호소하고 있다.


반대 측은 구체적으로 국제사회가 대부분 ‘이슬람 난민 반대’로 돌아서는데 왜 유독 한국만 이같은 추세에 역행하느냐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이슬람 난민을 받아들인 유럽 각 국에서 발생한 테러, 집단성폭행 등 강력범죄에 한국인도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달구고 있는 뜨거운 감자인 ‘예멘 난민’ 문제를 다루기 앞서 이슬람의 역사를 먼저 짚어본다.


▲ 천사 지브릴로부터 계시를 받는 무함마드.


‘18억 신도’ 이슬람, 바위동굴에서 탄생하다


학술적으로 이슬람은 기독교, 유대교 등과 함께 아브라함(Abraham) 계통 종교로 분류된다. 선지자 무함마드(Muhammad. 570~632)가 7세기경 천사 지브릴(Jibril. 가브리엘)로부터 계시를 받아 창시한 유일신교(唯一神敎)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조부, 숙부 아래에서 자란 무함마드는 11살이 될 무렵 부족장 자리를 이어받는다. 늦은 나이까지 결혼하지 못한 그는 자신이 일하던 상단의 여(女)주인과 혼인하게 된다. 40세가 되던 무렵부터 메카(Mecca) 북쪽의 한 산에 있는 암혈(巖穴. 바위에 뚫린 동굴)에서 기도와 명상을 하던 중 천사 지브릴과 조우하게 된다.


코란 96장에 의하면 훗날 라마단(Ramadan)으로 지칭되는 어느날 무함마드는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된다. 돌연 한 남자가 그의 앞에 나타나더니 뜬금없이 “읽어라(혹은 선언하라 또는 낭송하라)!”고 외친다. 당황한 그는 “읽을 수 없습니다(혹은 무엇을 읽을까요)”라고 답한다. 그러자 남자는 무함마드를 무시무시한 힘으로 꽉 껴안고 풀어주더니 다시 “읽어라!”고 요구한다.


무함마드가 재차 답변을 얼버무리자 남자는 다시 무함마드를 꽉 껴안고 놔 주더니 “읽어라.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지으시고 응혈(凝血) 한 방울로 인간을 만드신 주님(알라)의 이름으로 읽어라. 주님께서는 관대하시고 그 분은 깃털로 가르치셨으며 인간에게 그들이 모르는 것도 가르쳐주셨노라”고 말한다. 후일 전세계 18억 인구가 믿게 되는 이슬람교는 이렇게 한 바위동굴에서 시작됐다. 그 때 그 장소는 지금도 성지(聖地)로 보존되고 있다.


처음에 무함마드는 대단히 당혹스러웠다고 한다. 자신이 혹시 악마에게 홀린 게 아닐까 걱정하자 아내는 그 남자가 다시 나타나면 자신을 부르라고 한다. 얼마 후 남자가 재등장하자 아내는 그의 앞에서 ‘옷’을 벗는다. 무함마드가 그 남자가 갑자기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자 아내는 그 남자는 아마 천사였을 것이라며 무함마드가 계시를 받은 것이라고 안심시킨다.


무함마드는 그때로부터 3년 뒤인 613년 본격적인 포교활동에 돌입한다. 최초의 신자는 단 ‘4명’이었다. 그의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친구이자 훗날 초대 칼리파(Khalifha)로 등극하는 아부 바크르(Abu Bakr)다. 숙부를 포함한 그의 씨족은 무함마드를 열성적으로 지켰으나 주변에서는 그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곧바로 혹독한 종교탄압이 가해졌다. 아내의 상단은 파산했으며 아내와 숙부가 잇따라 사망했다.


▲ 신자들에게 설교하는 무함마드.


‘황금기’에 피어난 재앙의 씨앗


그러나 무함마드는 좌절하지 않았다. 암살 시도가 발생하자 메디나(Medina)로 피신하는 헤지라(Hegira)를 단행하고 이슬람 원년을 수립한 그는 그 유명한 지하드(Jihad. 성전)을 선포한다. 1만명의 대병력이 무함마드를 제거하기 위해 진군했지만 그는 한싸움에서 적을 물리치고 메카를 무혈(無血)정복했다. 그때 그는 “진리가 이제 왔으니 거짓은 무너졌도다”고 외친 것으로 알려진다.


기록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절대권력자의 길을 택할 수도 있었느나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 옥좌 대신 마룻바닥에 앉아 통치하고, 스스로 옷과 신발을 꿰맸으며, 대추야자와 보리빵을 먹었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 남긴 재산은 당나귀 한 마리와 약간의 땅이 전부였다고 한다.


후일 2대 칼리프에 등극해 이슬람제국을 건설한 우마르 이븐 알 하탑(Umar ibn al Khattab)은 “로마나 페르시아 황제들은 현세를 즐기는데 하나님의 사도이신 당신께서는 이런 보잘 것 없는 것들만 갖고 계신다”고 말하며 눈물 흘렸다고 한다. 참고로 다혈질에 싸움을 좋아했던 우마르는 자신의 여동생과 처남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실을 알게 되자 길길이 날뛰며 이들을 살해하려 했으나 코란을 읽고서는 크나큰 충격을 받고 누구보다 열성적인 무슬림이 된 인물이다.


무함마드 사후(死後) 이슬람은 무서운 속도로 뻗어나가기 시작한다. 우마르는 동로마제국, 사산조 페르시아 등과의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끌며 무슬림 인구를 급속도로 늘려나간다. 637년 성지 예루살렘(Jerusalem)에 입성한 우마르는 강제로 모두를 개종시킬 수도 있었지만 “종교는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킨다.


하지만 이슬람은 이같은 ‘황금기’ 때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무시 못할 후유증도 겪게 된다. 바로 수니(Sunni)파와 시아(Shia)파로 나뉘게 된 것이다. 두 종파의 등장은 20세기 들어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자의대로 해석하는’ 소위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의 출현으로 이어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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