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파 갈등 속 강행된 ‘혁명수출론’에 불씨를 당긴 소련의 아프간 침공
무함마드 사후 왕좌를 다툰 무슬림들
[투데이코리아=오주한 기자] 이슬람은 평화를 강조하는 종교다. 경전인 코란은 이교도와 전쟁을 하더라도 방어가 우선이며 선제공격을 하는 자는 알라가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계급제였던 당시 시대의 한계상 일부 민족을 비하하는 내용도 있지만 이들도 선(善)을 추구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못 박고 있다.
빈자(貧者)에 대한 베풂을 의무화하고 있으며 속칭 ‘돈놀이’도 금지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절대권력자가 될 수 있었음에도 마룻바닥에 앉아 통치하고, 스스로 옷을 꿰매며, 한 줌의 대추야자와 보리빵으로 식사할 정도로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사후(死後) 남긴 재산은 당나귀 한마리, 한줌의 땅이 전부였다.
그러나 신도들은 무함마드가 사망하자마자 권력을 다투기 시작한다. 무함마드의 출생지인 메카, 그가 지하드(성전)을 선포한 메디나 세력은 각기 다른 사람을 무함마드의 후계자로 세우려 한다. 무함마드의 첫 제자였던 아부 바크르는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제3자였던 우마르를 지도자로 추천하지만 그가 질겁하고 도리어 바크르를 추대함에 따라 초대 칼리파에는 바크르가 등극하게 된다.
하지만 일부는 무함마드와 나이차가 30살 가량인 사촌이자 양아들 격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Ali ibn Abi Talib)’에게 정통성이 있다며 끝내 초대 칼리파를 인정하지 않았다. 더구나 바크르의 취임은 알리가 무함마드의 유해를 수습하느라 공석인 상황에 이뤄진 터라 분노는 매우 클 수밖에 없었다. 양측의 불같은 대립 과정에서 무함마드의 딸이자 알리의 부인이 유산하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바크르는 분열을 막기 위해 오늘날까지도 이슬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첫 종교선택은 자유이지만 이후의 배교(背敎)는 반역’이라는 선포를 내놓는다. 동시에 무함마드와 마찬가지로 온화하고 겸손하며 소박한 삶을 추구해 알리파의 불만을 잠재우려 애쓴다. 그러나 폭탄은 끝내 터지고 만다. 그의 사후 2대 칼리파에 우마르가 취임한 것이다.
사실 알리는 우마르의 칼리파 등극을 찬성했다. 하지만 알리파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반발했다. 오늘날 학계 일각은 그들에게 중요한 건 알리의 칼리파 취임 그 자체가 아니라 알리가 무함마드의 계승자가 되게 함으로써 그들이 ‘기득권층’이 되려는 속셈이었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속칭 ‘바지사장’을 세운 뒤 배후에서 실권을 행사하려는 자들은 역사상 많았다.
결국 우마르가 죽은 뒤 이슬람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만다. 알리파는 독립해 그들만의 종파를 세운다. 바로 ‘시아파’다. 바크르 등 역대 칼리파를 인정하는 쪽은 ‘수니파’로 지칭된다. 양측은 그때로부터 약 1400년 동안 대립과 반목을 거듭하면서 20세기까지 이른다.
호메이니, ‘이슬람 근본주의’를 수출하다
사실 이 기나긴 기간 동안 양측이 오늘날처럼 서로를 증오하면서 전쟁과 테러를 벌인 적은 거의 없었다. 지옥문이 열린 계기는 1979년 ‘아야톨라 호메이니(Ayatollah Khomeini. 1902~1989)’의 등장이다.
이슬람에서 소수종파인 시아파 성직자였던 호메이니는 이란을 이슬람 국가 중 가장 세속적인 나라로 이끈 팔레비(Pahlevi)왕조에 극도의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터키, 이라크, 프랑스 등을 전전하면서 팔레비왕조의 토지개혁, 여성해방 등을 비난했다. 오늘날에는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당시 이란 여성들은 남성 앞에서 수영복을 자유롭게 입을 수 있었다.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Mohammed Reza Pahlevi) 국왕은 자칫 그가 순교자가 될 가능성을 염려해 암살하지 않았지만 이는 결정적 실수가 됐다.
1979년 이란혁명이 발발하고 팔레비왕조가 붕괴되자 호메이니는 이란으로 귀국해 ‘이슬람 혁명정부’를 조직하고 그해 12월 새 헌법을 공표해 이란을 제정일치(祭政一致) 국가로 만든 뒤 스스로 ‘종신 지도자’에 올랐다. 대통령은 내각수반에 지나지 않았으며 모든 국가 대소사는 호메이니가 결정했다. 그는 또 코란의 내용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뒤 ‘모든 것은 코란을 중심으로’를 주장했다. 이른바 ‘이슬람 근본주의’의 시작이었다.
호메이니는 사실상 기독교 국가인 미국은 물론 원칙적으로 종교를 금지한 ‘소련’까지도 ‘이교도’로 규정하며 적대시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가장 증오한 세력은 다름아닌 ‘수니파’였다. 호메이니는 자국 내 수니파 교도들을 대거 탄압하면서 나아가 수니파 맹주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즘(Wahhabism)’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또 ‘혁명수출’을 추진해 해외 시아파 교도들이 수니파에 맞서 봉기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1988년 이란, 사우디 양 국은 국교단절에까지 이른다. 당시 발생한 ‘메카 시위사건’ 때는 메카를 순례하던 시아파 신도들이 ‘혁명수출론’의 영향으로 반(反)사우디 시위를 벌여 400여명이 사망했다. 작년 6월에는 수니파 무장세력이 호메이니묘에 폭탄테러를 가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호메이니는 1989년 사망했지만 그가 남긴 사상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호메이니의 ‘혁명수출론’은 한층 변질되고 왜곡된 극단적 사상이 전세계로 퍼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절묘하게 같은 시기에 벌어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1979~1989)은 이슬람 근본주의 사상과 자동소총으로 ‘동시’에 ‘무장’한 채 ‘이교도’를 척살하고 ‘천국행 티켓’을 따내려는 세력들의 등장을 야기했다. 이는 ‘종교를 강요하지 말라’ ‘선제공격하지 말라’ ‘누구나 선을 행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코란의 가르침에 명백히 위배된다는 게 많은 이슬람 성직자들의 지적이다.
무자헤딘(Mujahidin)이 대표적이며 9.11테러를 일으켜 이슬람 근본주의의 ‘새 시대 아이콘’으로 떠오른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도 무자헤딘 출신이다. 빈 라덴은 알카에다(Al-Qaeda)를 창설했으며 동시대에 헤즈볼라(Hezbollah), 하마스(Hamas) 등 무수한 이슬람 무장세력·정파가 출현했다. 21세기 들어서는 이 분야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이슬람국가(ISIS)가 등장했다. 예멘의 시아파 반군조직인 후티(Houthis)도 이 중 하나다. <계속>
오주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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