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배우 신성일이 사망했다



[투데이코리아=이지현 기자]지난 1960~70년대 한국영화계의 톱스타였던 원로배우 신성일(본명 강신영)이 4일, 8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신성일은 지난해 6월 폐암3기 판정을 받은 후 병마와 싸워왔지만 결국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사망하루전인 3일 저녁 7시경 사망소식에 유가족들이 '아직 중환자실에 살아계신다'고 반발하며 한차례 오보소동이 일어났지만 결국 몇시간 뒤 4일 오전2시30분경 의사가 정식으로 사망판정을 내렸다.


신성일은 폐암 판정이후에도 각종 티비토크쇼와 영화촬영,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한 다양한 활동을 통해 건재함을 알리며 살아왔으나 결국 병마를 이겨내지 못했다.


1937년 대구에서 출생한 강신영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경북도청 공무원인 어머니의 보살핌속에서 자랐지만 어머니가 운영하던 계가 깨지며 의도치 않게 서울로 상경하여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대학진학에 실패하여 재수하던 도중 호떡장수를 비롯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꾸려나가던 도중 한국배우전문학원에 입학하여 배우의 꿈을 키워갔다.


1957년에 강신영은 한국영화의 족적을 남긴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의 공채배우 오디션에 합격하여 연예계에 발을 내딛었다. 신상옥 감독은 이때 강신영 이름대신 '신성일'이라는 이름을 쓰라며 이름을 지어주어 강신영은 신성일로 활동하게 된다.


신성일은 길쭉한 신체비율과 서구적인 마스크, 강렬한 눈빛, 반항아적인 이미지등으로 한국의 '제임스 딘'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당시 많은 여성들의 이상형으로 군림한다. 신성일은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뒤 1964년 아직도 회자되는 그 유명한 '맨발의 청춘'을 통해 톱스타의 반열에 올라선다.


이후에도 신성일은 왕성한 활동력을 뽐내며 총 507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신성일은 당시의 한국영화의 관행이었던 겹치기 출연(동시출연)속에서도 스타성을 발휘하며 당시로서는 거액인 45만원을 혼자 받으며(60년대 영화배우 평균 출연료는 1만8천원 수준) 사실상 독보적인 자리에 올라선다. 1964년 신성일은 '로맨스빠빠'에서 만났던 동료 여배우 엄앵란과 결혼식을 올렸는데 당시 하객으로만 수천명이 모여 그 스타성을 입증하기도 했다.
1971년부터는 제작과 감독에도 참여하여 다양한 작품들을 대중들에게 선보였고, 1981년부터는 정계진출을 시도하며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여러번 낙방하며 고배를 마셨지만 결국 2000년 치뤄진 16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여의도에 입성해 의정활동을 벌이기도했다.


신성일은 생전 청룡영화상, 아시아 영화제 남우조연상,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조연상,공로상,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특별공로예술가상, 백상예술대상 공로상등등 대다수의 영화에서 모조리 수상하며 한국영화의 레전드로 남았다. 신성일의 사망에 영화계는 애도를 표하며 영화인장을 논의중인것으로 알려졌다. 유족으로는 부인 엄앵란 여사, 아들 강석현씨, 딸 강경아, 수화씨가 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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