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生死)를 넘나든 헌신의 역사…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쾌거도

▲ 고된 작업 후 잠시 숨을 돌리는 해녀.


[투데이코리아=오주한 기자] 올해는 ‘제주해녀’가 국가중요어업유산으로 지정된지 3년, 유네스코(Unesco)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지 2년째 되는 해다. 우정사업본부는 이를 기념해 11월의 우표로 제주해녀문화를 선정하고 오는 21일 42만장을 발행할 예정이다.


‘해녀(海女)’는 한국과 일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독특한 어업종사자들이다. 말 그대로 물질하는 여성이다. 이들은 남성에 비해 평균적으로 불리한 신체조건을 딛고 바다 깊숙이 잠수해 해산물을 채취한다. 물속에서의 그녀들은 최정예 특작부대로 알려진 해군 수중폭파팀(UDT/SEAL) 대원들도 ‘울고 갈’ 정도로 날렵하고 강인하다.


▲ 동계훈련 중 상의탈의하고 구보 중인 UDT/SEAL 대원들. 예로부터 바다는 남성의 상징이었다.


‘사회적 편견’ ‘가혹한 환경’에 맞서 싸우다


‘수중채취’라는 행위는 인류가 바다라는 환경을 목격한 직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석기 시대의 비밀을 품은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는 다양한 해양생물들이 묘사돼 있다. 한반도의 인류는 오래전부터 바닷 속을 헤엄치면서 수산물 채집에 나섰다.


바닷 속은 지상과는 전혀 다른 환경이다. ‘수압’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보이지 않는 물살이 이리저리 오고간다. 자연히 인간이 버틸만한 곳이 아니다. 때문에 물질을 위해서는 강한 근력, 체력, 정신력이 요구된다. 해녀들은 수십kg 무게의 무거운 장비를 걸치고서도 호흡기 없이 4분 내외를 버틸 수 있다.


보다 더 효율적인 잠수를 위한 인류의 도전은 지속되어 왔다. 잠수는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기술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잠수사들은 평시에는 어업에 종사하다가 전시(戰時)가 되면 해군에 징집돼 적함 근처로 수중침투해 구멍을 뚫어 격침시키거나 진군에 걸림돌이 되는 각종 장애물을 제거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도 자신만의 잠수장비를 설계한 바 있다. 19세기 들어 효과적인 장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20세기 초중반 발발한 1~2차 세계대전 때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많은 잠수부대들이 활약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물질’은 사회적으로 그리 대접받지 못하는 직업이었다. 조선시대만 해도 수군(水軍)은 백정, 기생, 노비, 무당, 광대 등과 함께 ‘칠반천인(七般賤人)’으로 분류됐다. 어부·수군장병 등 해양종사자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다가 죽어도 ‘시체조차 못 건지는’ 가혹한 환경에 노출됐다.


바다는 늘 요동치기에 신체에 심각한 무리를 준다. 수온은 온혈동물인 인간이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차갑다. 모든 작업은 오로지 두 팔의 근력만으로 해결해야 한다. 게다가 바닷속은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수압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사지를 옥죈다. 설상가상 이 수압은 신체 질소농도를 높여 ‘잠수병’을 유발한다. 수십년간 바다를 누빈 노장(老將)이라고 해도 위험에서 예외는 아니다. 천안함 피격사태 당시 실종장병들을 구조하기 위해 몸을 돌보지 않고 바다에 뛰어들었던 UDT/SEAL 소속 고(故) 한주호 준위도 잠수병으로 인해 순직한 바 있다.


이같은 멸시의 대상이 안 그래도 유교적 논리 아래 갖은 차별에 노출됐던 여성, 즉 해녀라면 사람들의 시선이 어떠했을지는 두말 할 나위가 없다.


▲ ‘덩실덩실’ 청명하늘 아래 노래 한 구절에 시름을 잊는 해녀들.


해녀, 문화산업으로 재탄생하다


사회의 편견과 멸시, 생(生)과 사(死)를 오가는 극한의 현장 속에서 오로지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바다로 나아갔던 해녀들. 그들의 수는 우리나라가 산업화의 길로 들어서고 평균적 국민 경제수준이 높아지면서 점차 감소했다. 해녀의 존재가 매스컴의 주목을 받고 규모가 복원되기 시작한 건 20세기 말에 들어서다.


1990년대 지방자치 시대가 열리면서 각 지자체들은 무한경쟁에 뛰어들었다. 지역산업을 활성화시키고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저마다 특산물, 전통문화 발굴·복원에 나섰다. 이 와중에 사방이 바다인 제주도가 주목한 건 해녀였다.


과거 남성들은 주로 배를 타고 조업에 나섰기에 수중채취는 대부분 여성들의 몫이었다. 많은 남성들이 조업 도중 험란한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기에 여성이 생계를 책임지는 비중은 갈수록 늘어났다. 제주도를 일컫는 삼다도(三多島)의 ‘삼다’에서 ‘여자가 많은 지방’이라는 건 이같은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제주어민들이 이상향으로 꼽으며 노래로 불렀던 ‘이어도(離於島) 전설’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아버지 혹은 남자형제 혹은 남편을 잃고 외로이 가족을 책임져야 했던 해녀들의 강인함은 시대적 추세였던 여권(女權)신장에 딱 들어맞는 아이템이었다. 제주도는 지자체 차원에서 해녀산업을 육성하기 시작했으며 제주해녀는 급기야 2015년 국가중요어업유산으로, 이듬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전세계가 인정하는 자산으로 자리잡았다.


제주에 한수풀해녀학교라는 전문 교육기관까지 설립되고 21세기 들어 현장에는 젊은 해녀들도 등장하고 있다. 지난 2016년에는 제주 최연소 해녀 정소영(33)씨가 언론에 소개돼 화제를 모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수영을 시작했던 정 씨는 수영단체 관계자와의 갈등으로 한 때 방황하다 현직해녀였던 어머니의 권유로 바다로 나섰다. 현재 제주에는 30~40대 해녀들로 구성된 ‘해수다’라는 모임이 운영되고 있다.


작년에는 경남 거제에서 해녀로 활동 중인 진소희(27)·우정민(33)씨가 공중파 방송에 출연하면서 인기몰이를 하기도 했다. 현지에는 ‘해수다’와 비슷한 성격의 ‘숨비회’라는 모임이 해녀문화 전승에 매진하고 있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10대 소녀인 오무카이 미사키(大向美咲)가 ‘얼짱해녀’로 유명세를 탔다. 가녀린 외모에도 당차게 물질을 하는 모습에 일본은 물론 우리나라 네티즌들도 주목했으나 악플(악성댓글) 등에 시달린 끝에 결국 조기은퇴해 팬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2015년에는 미에(三重)현 시마(志摩)시가 허벅지를 훤히 드러낸 해녀캐릭터를 공개했다가 해녀를 성(性)적으로 이용한다는 비난여론 끝에 철회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우리나라가 세계적 수산대국으로 성장하면서 해녀 조업량이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많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해녀라는 존재가 문화산업 측면에서 갖는 잠재력은 높다. 무엇보다 한국적인 색채가 급격히 사라져가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전통문화 유지가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해녀라는 존재를 우리가 유지·보존해야 하는 까닭이다. <끝>

키워드

#해녀
저작권자 © 투데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