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민단체들이 사법부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투데이코리아=권규홍 기자]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으로 박근혜 정부가 탄핵된 뒤 국민들은 문재인 대통령을 임명하고 문 대통령에게 적폐청산을 강조하였다.

이에 문재인 정부는 취임하자마자 이명박, 박근혜 정부시절 있었던 적폐들을 취임초기부터 하나씩 척결해 갔다.

문재인 정부는 취임 초기부터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관련자들의 대한 처벌을 이어 나갔고 BBK와 다스 실소유주 의혹에 휩싸였던 이명박 전 대통령을 구속시켰다. 이어 기무사의 쿠테타 문건이 발각되자 기무사를 해체시키고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와 척결을 이어가고 있다.

그 와중 국민들을 경악시킨 사건이 또 하나 터졌으니 그것은 바로 ‘사법농단 사건’, 2011년 제15대 대법원장으로 취임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휘하 법원행정처 직원들이 박근혜 정부와 재판거래를 했다는 의혹이 터진 것이다.

사건은 우연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지난 2017년 2월 이탄희 판사가 일련의 사건을 통해 사표를 제출하게 되었는데, 사표를 제출하게 된 이유가 바로 법관 블랙리스트와 관련이 되어있다는 경향신문의 충격적인 보도가 사법농단 사건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당시 법원행정처는 정권의 정치성향과 반대되는 판사들을 추려내 이른바 판사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있었고 이들 판사들에 대한 동향 추적과 함께 업무적, 인사적 불이익을 주려 했다는 의혹이 드러난 것이다.

이로 인해 당시 많은 판사들이 지방 한직을 돌거나 승진에 있어 고배를 마신 사실이 드러났고 최근엔 양 전 대법원장이 리스트에 직접 체크표시를 해가며 판사들을 자신의 잣대로 평가한 경악스런 사실까지 드러났다. 사법부의 독립과 법관의 독립을 줄곳 주장해 왔던 양 전 대법원장이 자신과 뜻이 맞지않는다는 이유로 판사들을 솎아내려 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에 국민들은 경악했다.

이후 김명수 대법원장이 임명되고 꾸려진 추가 조사위의 결과 박근혜 정부와 양 전 대법원장은 상고법원 설치를 매개로 박근혜 정부와 재판거래 의혹을 하려했다는 메가톤급 의혹까지 드러나며 사건은 걷잡을수 없이 커졌다.

드러난 문서들에 의하면 당시 대법원은 국정원 여론조작사건을 시작으로 위안부 할머니 손해 배상 판결, 일제 강제 징용노동자 손해 배상 판결등 박근혜 정부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회적 논제들에 대해 상고법원 설립을 해주는 댓가로 박근혜 정부가 원하는 판결을 해주려 했다는 사실까지 드러났다.


▲ 양승태 전 대법원장



예고된 재앙

사실 이러한 사법농단은 예견 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지난 197~80년대 공안 판사로 군림하며 수많은 인권유린 사건에 대해 군사정부 입맞에 맞는 판결을 내려가며 살아왔던 양 전 대법원장.

양 전 대법원장은 지난 7월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에 의해 반 헙법행위자로 분류될 정도로 법관의 양심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열전에는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해 “양승태가 처음 법관으로 임명된 1975년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와 사법 역사에서 가장 암흑의 시기였다. 그 시절 많은 법조인들이 민주주의와 인권이 유린당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는 길을 선택했다. 반면 양승태는 유신체제에 순응하며 간첩조작 사건과 긴급조치 위반 사건의 재판관이 됐다”고 열전에 기록이 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양 전 대법원장이 담당했던 재일동포 간첩사건 4건이 모두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중앙정보부에서 맡았던 사건이다. 두 사람은 8년 차이로 경남고‧서울대 법대를 졸업했고, 1970년 같은 해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이어진 인연으로 사법농단 파트너가 됐다"고 주장하며 사법농단 사건역시 예견 된 비극일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양 전 대법원장은 대법원장 후보로 거론될 당시에 시민사회를 비롯한 야당으로부터 임명은 안된다는 목소리가 이어졌으나 이를 가볍게 무시한 이명박 정부는 결국 임명을 강행했고 결국 사법 역사상 최악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계속된 검찰의 수사와 새로이 드러나는 충격적인 문건들에 시민사회는 분노하고 있지만 정작 이 사건을 책임지고 해결해야할 김명수 대법원장에 대한 비판도 무시할 수는 없다.

김 대법원장은 사법농단 사건에 연루된 판사들이 주요 관련자에 대한 검찰의 수색영장을 방해하거나, 구속영장을 매번 기각하며 ‘방탄판사’들이라는 비판을 받음에도 불구 아무런 입장 표명을 내지 않아 사건 해결에 의지가 없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결국 22일 ‘사법발전위원회 건의 실현을 위한 후속추진단’의 김수정 단장(변호사)은 법원 내부망에 김명수 대법원장에 대해 개혁의지가 없어 보인다며 강한 어조로 비판을 하는 사태까지 벌어지며 사법농단사건은 법조계를 혼돈에 빠뜨리고 있다.

▲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쯤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의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 선생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김병로 선생은 어릴적 성리학을 배우며 자랐지만 유년기에 신식교육을 배우며 근대교육에 눈을 뜨고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법대를 졸업한 뒤 귀국해 변호사로 활동했다. 김 선생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다양한 사회활동을 전개했으며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된 독립 운동가들을 무료로 변론했다. 당시 김병로 선생은 법정에서 “피고인들이 마음에 독립을 품었다는 이유로 이들을 처벌하려면 조선인 전체를 처벌해야 할 것이다”라고 일본인 판사를 일갈하며 수많은 조선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김병로 선생은 계속된 일제의 만행에 본인이 가진 법 지식을 이용해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 싸웠고, 계속된 일제의 방해로 법조인으로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조선총독부의 배급도 거부한 채 독립이 될때까지 초야에 묻혀 자급자족하는 농부로 지내며 강직한 삶을 살았다.

해방 후엔 초대 대법원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승만 정권이 반민특위를 해산시키고, 그 유명한 ‘사사오입’사건으로 헌법을 유린하며 강제로 개헌을 시도하려 하자 이는 헌법에 위배된다며 이승만 대통령을 향해 “이의 있으면 항소하라!”고 일갈하며 대한민국 헌법의 가치와 자존심을 수호하려 애썼다.

김병로 선생은 현재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김병로 선생은 살아 생전 “법관이 국민으로부터 의심을 받게 된다면 최대의 명예 손상이 되는것”이며 “법관은 최후까지 정의의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법관의 청렴성이야 말로 법관의 생명이라고 말했다.

현재 사법농단 사건에 대해 더불어민주당의 최고의원인 박주민 의원은 '특별재판부'의 설립을 주장하고 나선 상황까지 왔다. 판사가 판사를 판결한다는것조차 이젠 못 믿겠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 같은 제안에 시민사회단체는 환영의 뜻을 드러냈지만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야당은 이를 반대하고 나섰고 역시 김명수 대법원장 역시 특별재판부를 반대한다고 나섰다.

이렇듯 애석하게도 김병로 선생의 말과는 달리 현재 사법부는 국민의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렸고 특별재판부 도입 주장까지 나오며 사법 역사상 최악의 코너까지 몰리게 되었다.


과연 사법부가 스스로 실추된 명예를 다시 세울 그날이 언제가 될 것인지, 사법부가 국민의 요구에 부합하는 모습을 언제 보여줄것인지 그 날은 참으로 요원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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