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섬’에서 ‘구·신진세력 각축장’이자 ‘대(對)중국 최전선’으로

▲ 차이잉원 대만 총통.


[투데이코리아=오주한 기자] 24일 지방선거와 함께 진행된 대만 국민투표에서 ‘탈(脫)원전 중단’이 가결되면서 전세계, 특히 우리나라 이목이 쏠렸다. 정부가 적잖은 반대여론 속에 탈원전을 추진 중인 한국과는 정반대의 행보였기 때문이다.


탈원전 중단에 가려 부각되지는 못했지만 이번 국민투표에서는 일본 수산물 수입금지도 통과됐다. 후쿠시마(福島)원전 사고에 영향을 받은 일본 내 지역의 농수산물, 식품 수입금지 유지에 동의하냐는 질문에 찬성이 701만8584표로 반대(201만6347표)를 압도적으로 웃돌았다. 마찬가지로 후쿠시마산 농수산물 수입재개 위기에 직면한 우리나라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지방선거에서도 여당 민진당은 참패해 시장선거에서 6명을 당선시키는 데 그쳤다. 결국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민진당 주석(당대표)직에서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대만은 일본과 유사하게 내각수반이 집권여당 당수를 겸한다.


국민투표에서는 올림픽 등 국제사회 공식석상에서 정식국호(중화민국) 대신 ‘차이니즈 타이베이’ 사용을 유지하는 안건도 가결됐다. 대만은 G2로까지 부상한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하나의 중국’ 입김으로 ‘중화민국’ 국호를 대외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한 때는 ‘아시아의 네 마리 용’ 구성원으로서 한국과 경쟁하고, 한 때는 북한·중국 동맹에 맞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대만. 본 기획에서는 정치·사회적 이슈 중 하나로 떠오른 ‘대만’의 역사와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알아본다.


▲ 화려한 타이베이(台北)의 밤.


신비의 섬(Mysterious Island), 대만


대만은 중국대륙의 동남쪽, 즉 동중국해에 위치한 섬이다. 섬 자체의 별칭은 포르투갈어로 포르모사(Formosa), 표준중국어로 메이리다오(美麗島) 등이다.


면적은 3만5980㎢이며 지형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동고서저(東高西低)형이다. 인구는 2018년 기준으로 약 2천300만명, 국내총생산(GDP)은 6천26억달러(세계 21위)다. 북부는 아열대기후, 남부는 열대기후이며 종교는 불교, 기독교, 천주교, 도교 등 다양하다.


최초의 인류 흔적은 지금으로부터 약 3만년전에 나타나며 이들은 현재 동남아에서 뉴기니섬에 걸쳐 살고 있는 네그리토(Negrito)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외부세력이 이곳으로 이주했으며 이들은 고산족(高山族. 산사람), 생번(生蕃. 날야만인) 등 멸칭으로 지칭됐다. 따라서 대만여행 시 원주민들을 이같은 호칭으로 부르는 건 삼가는 게 좋다.


중국 한족(漢族)은 대만섬을 이주(夷州)라고 불렀다. 직역하자면 ‘오랑캐가 사는 고을’이다. 대만섬이 역사에 처음 기록된 건 우리에게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로 친숙한 중국 삼국시대이다.


당시 오(吳)나라를 세운 손권(孫權)은 잦은 전쟁으로 인구가 줄어들자 제갈직(諸葛直) 등에게 병력 1만을 내주고 ‘인간사냥’을 지시한다. 대만섬 원주민들을 대륙 강남지역으로 ‘납치’해 병역자원으로 활용하려 한 것이다. 이 계획은 ‘8천명’ 병력을 잃고 원주민 ‘1천명’을 납치하는 대실패로 끝난다.


이후 한동안 대륙사람들에게서 잊혀진 대만섬에는 서기 854년 다두왕국(大肚王國)이라는 독립국이 세워진다. 말레이계 원주민인 파이완족(排湾族)이 섬 북부로 이동해 다수 부족을 아울러 세운 왕국으로 내부다툼은 있었을지언정 외침은 거의 없어 대외정복으로 악명높은 몽골족의 원(元)나라 때도 형식적인 지배만 받을 뿐 자치를 이어나갔다.


왕국이 위기를 맞은 건 건국으로부터 약 800년이 지난 17세기 무렵이다. ‘비단’ ‘도자기’ 등 ‘메이드 인 차이나’에 열광하다가 중동세력 부흥으로 무역로가 끊길 위기에 처하자 직접 배를 타고 ‘총칼’을 앞세워 교역로를 닦은 끝에 대항해시대를 연 유럽세력이 들어온 것이다. 섬 북부는 스페인세력이, 남부는 네덜란드세력이 점령했으며 다두왕국은 1624년 네덜란드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 정성공 주력군의 갑주.


‘반청복명’의 거점이 되다


중국 한족이 이 섬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만주지역에서 세력을 기르던 여진족이 대륙을 침공하고 설상가상 대륙 내부에서도 이자성(李自成)의 난이 발발하자 명(明)나라는 풍전등화의 운명을 맞게 된다.


대세가 기운 것을 안 명나라 장수들이 철벽요새였던 산해관(山海關)의 문을 열자 여진족은 거침없이 남진했으며 복명(復明)세력은 새로운 거점으로 대만섬을 주목한다. 해전에 약한 여진족을 막을 수 있으며 힘을 기른 후 조선 등과 연합해 반격을 꾀할 적임지였기 때문이다.


이같은 반청복명(反靑復明) 운동의 중심에는 ‘일중(日中) 혼혈’이면서 ‘해적왕’의 아들이었고 허수아비 황제에게 끝까지 충성을 바쳤던 ‘국성야(國姓爺)’ 정성공(鄭成功)이 있다.


정성공은 ‘조정대신’이라 쓰고 ‘국가 공인 해적’이라 읽는 정지룡(鄭芝龍)의 아들이다. 명나라의 해금정책을 뚫고 밀수에 종사해 엄청난 부를 쌓아 관직에까지 오른 정지룡은 일본 나가사키(長崎) 히라도(平戶)에서 한 하급무사의 딸과 동침해 정성공을 낳는다. ‘사생아’ 격이었던 정성공은 유년시절을 일본에서 지내면서 후쿠마츠(福松)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주색을 탐하다가 뒤늦게 자식 귀한 줄 깨달은 정지룡은 아들을 일본에서 중국으로 불러들였으며 마치 ‘못 배운 한’을 풀려는 듯 정성공을 태학에 보내 당대의 학자로부터 사사받게 한다. 그렇게 정성공은 문관으로서 명나라의 기둥이 되는가 했지만 ‘여진족 남침’이라는 운명의 대사건이 발생한다.


결국 외세가 산해관의 빗장을 열고 이자성이 수도 베이징(北京)을 함락해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자 정성공은 부친과 함께 당왕(唐王) 주율건(朱律健)을 융무제(隆武帝)로 옹립하고 남명(南明)정권을 수립한다.


피로 얼룩진 반청복명의 깃발 아래 그는 한때 옛 고도인 난징(南京)을 포위하는 기염을 토했지만 조정대신들의 이탈은 막을 수 없었고 여진족의 파죽지세에 밀린 정성공은 대만섬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는 대포, 총, 강철 검·갑옷으로 무장한 네덜란드군이 버티고 있었다. 몽골제국의 서진 이래 서양과 동아시아 세력이 다시금 맞붙는 순간이었다.


이 당시 정성공의 군대는 기존 중국의 군대와는 달랐다. 정성공이 일본에서 나고 자라면서 사무라이(侍)에게서 받은 영향인지 그의 주력군은 안면 전체를 덮는 투구를 써 방어력이 강했다. 여기에 방패와 대도(大刀)를 들고 돌격했으며 ‘야차(夜叉)’와 같은 외모의 군대를 처음 접하는 네덜란드군은 기세에서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군대가 냉병기로만 무장한 건 아니라서 대포 등 원거리 화기(火器)도 막강해 본국의 지원을 받지 못한 네덜란드군은 결국 항복하고 만다.


많은 네덜란드 남성들이 노예가 됐으며 여성들은 남명장수들의 처첩이 됐다. 이 사건을 다룬 한 중국 드라마는 정성공과 네덜란드 여성의 ‘로맨스’를 그리고 있기도 하다. 융무제는 대만섬 점령 공로를 치하해 정성공에게 국성(國姓)을 하사했으며 정성공은 이름을 ‘주성공’으로 바꾸고 ‘국성야’라 불리게 된다.


이같은 ‘업적’은 오늘날에도 각국에서 인정받아 중국공산당은 서양세력을 몰아낸 영웅으로, 대만 국민당은 대륙을 수복하려 한 영웅으로, 대만 민진당은 대만섬을 개척한 한족의 선지자로, 일본은 모계혈통 등을 이유로 정성공을 기리고 있다.


▲ 지난 대선에 출마한 친민당 쑹추위(宋楚瑜), 국민당 주리룬(朱立倫), 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 후보(왼쪽부터).


‘대만독립’이냐, ‘대륙수복’이냐


대만섬에 오랜 과거 정착한 원주민, 정성공을 따라 이주한 본성인(本省人)이 어우러져 살던 대만섬에 또다시 외부인들이 들어온 건 20세기 중반이다.


대륙에서 국민당을 이끌던 장제스(蔣介石)는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하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제(日帝) 식민지배를 받던 대만으로 대피한다. 이들은 외성인(外省人)으로 일컬어졌으며 ‘대만독립’을 외치는 민진당으로 상징되는 본성인과 ‘대륙탈환’을 노리는 국민당으로 상징되는 외성인 간 갈등은 이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변변한 정치세력이 없는 원주민들은 소외돼 그들의 목소리는 묻히고 있다.


유혈사태까지 초래한 양측 대립 속에 국민당은 1949년부터 1987년까지 약 40년간 서슬 퍼런 계엄령을 발동했으며 공산당과의 전투도 지속됐다. 1958년에는 진먼(金門)포격전이 발발해 중공군이 대만령 진먼섬에 무려 47만발의 포탄을 사격하기도 했다. 국민당은 지금도 대만의 상징적 수도를 대륙의 난징으로 규정하고 있다.


중국과 대만 간 교전은 미국이 개입하면서 중단됐으며 계엄령은 아이러니하게 장제스의 아들로서 총통에 취임한 장징궈(蔣經國)에 의해 해제된다. 장징궈는 혈통세습을 하지 않았으며 국민당, 민진당은 경쟁하면서 각자의 총통을 배출했다. 여담이지만 일제 식민지배 영향인지 본성인 노년층을 중심으로 대만에서는 일본어가 많이 쓰인다. 젊은층에서도 일본 문화가 유행해 차이잉원은 대선 때 자신을 일본 망가(漫畵)풍으로 캐릭터화하는 파격적인 선거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비록 국공내전에서 패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으로서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중 하나였던 대만은 1971년 중국에게 상임이사국 지위를 빼앗기면서 점차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기 시작한다.


이듬해에는 일본이 대만과 국교를 단절했으며 1979년에는 미중(美中)수교가 단행되면서 급기야 미국이 대만과의 외교관계를 중단했다. 1992년에는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과 단교하기도 했다. 당시 주한(駐韓) 대만 대사는 양국 관계유지를 눈물로 호소했지만 한국 정부는 대사관 철수를 요구했으며 이 여파로 지금도 대만 현지에서는 한국을 ‘배신자’로 규정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사실상의 미승인국인 대만은 빈곤국들에 ‘돈’을 푸는 방식으로 몇몇 나라들로부터 겨우 국가로 인정받는 형편이지만 경제를 비롯해 많은 분야에서 주요국과 협력하고 있다. 미국은 대만관계법을 통해 각종 무기, 군사기술을 제공하고 있으며 수시로 항공모함 전단을 동중국해로 출격시켜 중국을 긴장하게 만들고 있다. 국민당 소속이었던 마잉주(馬英九) 전 총통은 대선과정에서 ‘제2의 이명박’을 선언하기도 했다.


한국, 대만은 민간에서도 활발한 교류를 펼치고 있다. 올해에는 사상 처음으로 한국을 찾는 한해 대만관광객 수가 100만명을 돌파하기도 했다. 대만을 관광하는 한국인 수도 작년 처음으로 100만명을 넘어선 바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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