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치는 활동영역 두고 수백만년간 ‘전쟁’… ‘학살’에서 ‘학살’로, 그리고 ‘공존’으로

▲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늑대.


[투데이코리아=오주한 기자] 인간은 본능적으로 ‘송곳니’를 두려워한다. 유아들은 대체로 송곳니를 드러낸 동물을 보기만 해도 운다. 성인이라 해도 적대감을 드러내는 맹수에게 다가가기 어렵다.


곡물을 인위적으로 재배하는 농경기술이 개발되기 이전까지 인류는 무려 수백만년이라는 억겁의 세월 동안 수렵, 채집으로 연명했다. 인류의 운명을 뒤바꾼 ‘불의 발견’ 이후에는 익힌 고기를 자주 섭취할 수 있게 됐으며 이는 신체로의 단백질공급량을 비약적으로 높여 지능발달의 결정적 원인 중 하나가 된 것으로 학계는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육식은 큰 리스크도 불러왔다. 생태학적 관점에서 비정상적일 정도로 두뇌만 발달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육체는 희생됐다. 사람은 모든 동물 중 근력 또는 운동신경 면에서 가장 약한 축에 속한다. 자연히 들소나 매머드(Mammoth)를 사냥하다 들이받히거나 밟혀 죽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이 얻은 고기를 빼앗으려 들거나 아예 인간 자체를 ‘먹이’로 여기는 육식동물들이었다. 맹수들은 한 번 인육에 맛들일 경우 인간만을 골라 집요하게 사냥했다. ‘가장 약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같은 맹수들 중 최고로 위협적인 존재는 단연 ‘늑대’였다.


늑대는 몸길이 1~1.6m에 몸무게는 최대 ‘80kg’ 안팎에 달한다. 수명은 14~16년이며 주로 야간에 활동한다. 서식지는 ‘숲’이나 습지로 근거지를 중심으로 무리지어 다니면서 먹잇감을 덮쳐 ‘조직적인 사냥’ 끝에 날카로운 송곳니로 절명시킨 후 잡아먹는다. 의사소통은 하울링(howling) 등 소리로 한다.


늑대가 인간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이유는 활동지역이 상당부분 겹치면서 영역을 침범당하는 걸 상당히 싫어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필품을 얻기 위해 숲을 필요로 했다. 숲에는 집을 짓고 무기를 만들며 장작불을 피울 나무가 있다. 농경사회가 시작된 이후부터는 인류는 더 많은 밭을 개간하기 위해 화전(火田)을 행했다.


곰, 호랑이 등은 단독생활을 하기에 많은 수의 침입자가 발생하면 맞서기보다는 피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들이 민가를 습격한 사례는 늑대에 비하면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하지만 상술했듯 늑대는 무리지어 생활하며 침입자를 매우 싫어한다. 먹이를 충분히 먹은 상태에서도 침입자는 예외 없이 쫓아가 죽여버린다. 이같은 늑대의 습성은 2012년 개봉한 헐리웃영화 ‘더 그레이(The Grey)’에 상세히 묘사되고 있다.


게다가 자신들의 터전인 숲을 불태우고 먹이를 빼앗아가는 인간은 늑대에게 있어서 침입자를 넘어 적대적인 존재였다. 인간과 늑대 간의 ‘전쟁’은 피할 수가 없는 셈이었다.


▲ 먹이를 사이에 두고 조우한 늑대와 인간. 태고적에는 이런 장면이 자주 연출됐을 것이다.


늑대와 인간, ‘학살’과 ‘학살’을 주고받다


가장 유명한 ‘전쟁’은 1450년 프랑스에서 벌어진 ‘파리의 늑대(Wolves of Paris)’ 사건이다.


악명을 떨쳤던 ‘늑대왕’ 쿠르토(Courtaud)는 무리를 이끌고 대담하게도 ‘파리 시내’를 공격한다. 이들은 성벽을 넘어 도심으로 진격해 무차별 학살을 벌였으며 무려 40여명이 쿠르토 단 한마리의 송곳니 아래 죽음을 맞았다. 쿠르토는 복잡한 도심에서 궁지에 몰린 끝에 덫에 걸려 죽었으며 기록에 의하면 시민들은 노트르담대성당 앞에 전시된 쿠르토의 시체에 돌을 던치고 침을 뱉었다고 한다.


이같은 늑대에 대한 공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양한 민담 소재가 됐다. 서양에서는 그 유명한 ‘늑대인간’ 전설이 있다. ‘늑대와 빨간머리(Beauty and The Big Bad Wolf)’ 등 동화에서도 늑대는 악역으로 그려진다. 늑대는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해 전설상의 로마제국 건국 영웅인 로물루스(Romulus)는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고 기록돼 있다.


북미대륙에서는 인디언들이 자식에게 이름을 붙일 때 늑대를 넣기도 했다. 영화로 친숙한 ‘늑대와 춤을(Dances witn Wolves)’이 대표적이다. 동양도 늑대를 숭상하기는 마찬가지라 몽골에는 “늑대는 바람을 따라 움직인다”는 속담이 있다. 늑대처럼 날렵한 용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늑대는 인류가 요즘 말로 ‘희대의 사기 아이템’을 손에 넣으면서 패전의 길로 접어든다. 바로 ‘화약’과 ‘총’이다.


고대중국의 연단술사들이 불로장생(不老長生)의 비약을 만드는 과정에서 발명된 화약은 17세기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이 나침반, 인쇄술과 함께 ‘세상을 바꾼 3대 발명’으로 꼽을 정도로 중요한 물건이었다.


동물 입장에서 화약은 ‘우뢰’와 ‘불길’로 압축요약된다. 화약은 폭발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굉음을 낸다. 천둥소리와도 맞먹을 정도다. 스페인의 남미침략 때 원주민들마저 그 소리에 놀라 달아나다 자기들끼리 밟혀죽었을 정도로 인간마저 놀라는 그 소리를 동물이 감당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화약은 번개와 마찬가지로 불을 동반한다. 본능적으로 번개와 불을 두려워하는 동물, 특히 불에 취약한 숲에 사는 늑대가 화약 앞에 받았을 충격은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심리적 충격은 차차 익숙해지면서 견딜 수 있다 해도 물리적 위해를 가하는 ‘총’ 앞에서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14세기 초 서유럽에서 등장한 총은 전쟁의 판도를 일거에 바꿔놨다. 이전까지는 갑옷 입은 기사들이 창 들고 누차 돌격하면 보병이 무너지는 시대였지만 총은 강철마저 꿰뚫는 파괴력을 선보이면서 기병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피부가 겹겹이 둘러싸인 무쇠가 아닌 이상 수십~수백명이 일제사격하는 총 앞에 늑대무리가 떼죽음당하는 건 당연했다.


동물치고는 상당한 지능을 가진 늑대들 사이에서는 “저 두 발로 걷는 생물에게 맞서면 죽음 뿐”이라는 인식이 확산됐으며 이들은 인간을 보면 대부분 내빼기 바쁜 신세로 전락했다. 상술한 ‘파리의 늑대’처럼 예외도 있지만 쿠르토처럼 인간을 해친 늑대는 반드시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다.


‘학살당하는’ 입장에서 이제는 ‘학살하는’ 입장이 돼 마침내 억겁의 세월 동안 치러진 ‘전쟁’에서 승리한 인류는 숲을 밀어버리고 개간하면서 영토를 늘려나갔으며, 늑대의 인간 습격은 어쩌다 한 번씩 뉴스에 나오는 가십거리가 됐다.


설원을 내달리는 늑대들.

‘한반도 늑대복원’ 찬반여론 대립
복원 시 ‘멧돼지 개체수 조절’ 등 순기능도


늑대와 인간이 마냥 적대적이었던 건 아니다. ‘공생(共生)’의 대표적 사례는 바로 개다.


일부 학계는 개와 늑대의 조상이 서로 다르다는 주장을 펼쳤지만 지금은 공통적이라는 게 주류다. 무리에서 도태된 늑대에게 인간이 먹이를 주고 길들이게 되면서 가축화 역사가 시작됐고, 수만년의 세월 동안 순종적인 개체만을 교배하는 과정에서 개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초창기의 늑대·개 혼혈의 습성은 오늘날에도 ‘늑대개’를 통해 볼 수 있다.


공존을 위한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일제(日帝)치하 당시 유해조수 퇴치사업으로 인해 1967년 늑대가 멸종된 한반도에서는 복원노력이 아직은 요원한 상태이지만 늑대가 희귀한 나라들은 적잖은 수가 늑대를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하고 관리하고 있다.


대표적 복원사례는 미국 옐로스톤(Yellowstone)국립공원이다. 수렵으로 인해 1926년 거의 사라졌던 옐로스톤 늑대들은 1975년 복원프로그램을 통해 기사회생하기 시작했다. 많은 논의 끝에 1991년 의회는 예산안을 승인했으며 1995~1996년 캐나다에서 들여온 31마리를 옐로스톤에 풀었다. 결국 2010년 옐로스톤 늑대는 멸종위기종 목록에서 제외됐다.


그러나 늑대복원을 두고 찬반여론이 대립하는 건 사실이다. 한 쪽은 생태계를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한 쪽은 사람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늑대복원을 주저하는 까닭이며 옐로스톤 늑대 복원작업이 무려 20년이나 걸린 이유다.


실제로 맹수와 인간의 공존을 미화한 각종 사진·영상작품들과 달리 사건은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2006년에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州)에서 한 여성이 애완용 늑대에게 물려 사망했다. 2010년에는 알래스카주에서 교사가 늑대습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올해 10월에는 인도의 한 소도시에서 13명을 살해한 식인호랑이 사살을 국제동물보호단체가 반대해 논란을 빚었다. ‘맹수’는 ‘맹수’일 뿐이라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충고다.


그렇다면 늑대와 인간이 서로를 해치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갈 방법은 없을까. 안타깝지만 아직은 뾰족한 수가 없는 게 현실이다. 애초에 생태계 자체가 약육강식(弱肉强食), 즉 먹고 먹히는 곳이기에 ‘먹는’ 역할을 하면서 자연에서 기능하는 늑대들에게 사냥하지 말라고 요구하긴 어렵다. 늑대들을 주민 미거주지에 몰아넣고 철통같은 강철 울타리를 친 뒤 자물쇠로 잠그는 방안이 있긴 하지만 이마저도 일부 동물보호단체들에 의한 동물학대 항의 소지가 있어 여의치않다.


오랜 세월 라이벌로 경쟁하면서 애증의 관계로 남은 늑대와 인간. 복원 찬반 측이 극단적인 입장을 배제하고 조금씩만 양보하면서 접점을 찾아간다면 언젠가는 우리나라에서도 안전하게 늑대를 볼 수 있는 날이, 늑대들은 한반도의 대자연에서 멧돼지 개체수 조절 등 제 역할을 다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끝>

키워드

#늑대
저작권자 © 투데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