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의리’ 이미지의 해적… 실상은 “씹고 뜯고 빼앗고 죽이고”

▲ 영화에서 종종 ‘쾌남아’로 그려지는 해적(사진=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中).


[투데이코리아=오주한 기자] 2000년대 초부터 작년까지 시리즈로 개봉한 헐리웃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은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끈 바 있다. 영화에서 묘사된 해적은 낭만적이고, 활달하며, 이익을 추구하지만 정의롭다. 고비가 다가와도 날렵하게 모면하고 역습해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해적(海賊)은 국제법에서 ‘공해상에서 국가 또는 자치단체의 명령 또는 위임에 의하지 않고 사적목적으로 다른 선박의 안전을 위협하는 폭력행위를 하는 자’로 정의된다. 해적은 ‘인류의 공공의 적’으로 규정돼 어떤 나라든 해적을 나포해 자국법에 따라 처벌할 수 있다.


해적은 정말로 ‘낭만’과 ‘정의’의 존재일까. 아니다. 알 사람은 다 안다. ‘현실의 해적’은 이미 우리가 겪은 바 있기 때문이다. 2011년 1월 우리 해군이 소말리아해적으로부터 삼호주얼리호 선원들을 구출하는 ‘아덴만 여명작전’ 과정에서 해적은 석해균 선장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해 그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간 바 있다. 해적은 ‘해상강도’이자 ‘살인자’일 뿐 결코 ‘영웅’이 아니다.


미국을 비롯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 국가들과 한국, 일본 등이 연합해군을 조직해 퇴치에 나선 결과 소말리아해적은 세력을 크게 잃었다. 그러나 비단 동아프리카뿐만 아니라 말라카해협, 서아프리카 등 세계 곳곳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해적들이 준동하고 있어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 ‘노다치’를 든 사무라이.


해적, 동서양을 휩쓸다


해적은 이족보행으로 인해 두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 인류가 선박을 만들고 바다로 진출하면서부터 생겨났다. 역사상 처음 기록된 대규모 해적은 청동기시대 말기까지 지중해를 중심으로 출현한 ‘바다민족(Sea People)’이다.


바다민족은 남유럽 에게해에서 출항해 지중해를 통과한 뒤 아나톨리아, 시리아, 가나안, 키프로스, 이집트 등을 침공한 해양민족의 총칭이다. 기원전 1234년부터 이집트 제19왕조를 다스린 파라오 메르넵타(Merneptah)는 이들을 ‘바다의 외지인’이라고 명명했다. 가는 곳마다 약탈을 일삼았던 이들의 정체는 상당부분 베일에 가려져 그리스인이라는 설, 트로이 연합세력이라는 설 등 의견이 분분하다.


중세에는 단연 북유럽 바이킹(Viking), 일본 왜구(倭寇) 등이 유명하다.


동토의 땅에서 항상 식량부족에 시달려야 했던 노르만족은 8세기 말부터 해상을 통해 서·남유럽, 러시아 등을 침공한다. 나침반도 없던 시절에 이들은 낮에는 해를 따라, 밤에는 별자리를 따라 항해해 목적지에 정확히 도착할 정도로 뛰어난 항해술을 지니고 있었다. 바이킹이 건설한 도시는 영국 요크, 아일랜드 더블린 등이다. 바이킹에게 항해술은 축복이었지만 유럽인들에게는 ‘재앙’ 그 자체였다.


이들은 체력과 끈기도 우수해 오로지 돛대와 노젓기만으로 무려 ‘대서양’을 건너 11세기 초 북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하기도 했다. 한때 이는 가설에 불과했으나 북미에서 바이킹 유물이 발굴됨에 따라 사실로 굳어지고 있다. 주역은 비아르니 헤리올프손(Bjarni HerjolFsson)으로 알려진다. 바이킹은 북극과 인접한 거대한 얼음섬을 발견하고 ‘그린란드’라 호칭한 뒤 이주자를 모집하는 ‘희대의 사기극’을 벌이기도 했다.


왜구의 잔학성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고려, 조선, 명(明)나라, 동남아 등 각지를 휩쓸고 다닌 왜구는 본국의 쇼군(將軍), 다이묘(大名)들까지 치를 떨 정도로 악명을 떨쳤다.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왜구는 어디까지나 ‘무법집단’이었으며 따라서 본국도 털어먹고 학살하기 일쑤였다.


오죽했으며 막부(幕府)도 명나라, 조선 등에 사신을 보내 왜구토벌을 요청할 정도였다. 물론 왜구와 유착하고서 ‘뒤’를 봐주면서 ‘수수료’를 떼먹는 일부 다이묘가 존재하긴 했다.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 침공 과정에서 아예 왜구 출신들을 선봉에 내세우기도 했다. 대표적 인물이 이순신 장군과 해상에서 맞붙은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다.


약 100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센고쿠시대(戰國時代)를 겪으면서 ‘인간백정’이 다 된 왜구는 특히 도법(刀法)에 능했다. 길이가 최대 3m에 달하는 노다치(野太刀)라는 큰칼을 쓰기도 했다. 뿐만아니라 조총 등 화기(火器)도 운용해 원거리 화력도 우수했다. ‘평화’에 익숙해져 있던 명나라, 조선의 군대는 이들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급기야 명나라 장수 척계광(戚繼光)은 ‘가지 달린 대나무’ 등 기기묘묘한 병기로 무장한 병사들로 구성된 원앙진(鴛鴦陣)이라는 새로운 진법까지 고안하게 된다. 쉽게 말하면 한 명의 왜구에게 ‘수 명’이 달려들어 누구는 막기만 하고, 누구는 찌르기만 하는 방식이다. 속된 말로 ‘다구리’를 치는 셈이다. 모양새는 좀 사나웠지만 효과는 확실했으며 친(親)조선, 친명(親明) 정책을 펼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치안을 확립한 끝에 왜구는 16세기 무렵 자취를 감추게 된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한반도에도 해적은 있었다. 대표적 예가 바로 ‘신라구’다. 신라구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일본에 있다. 신사략기(神社略記)에는 645년 신라구를 토벌했다는 내용이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일본후기(日本後紀),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 등에도 신라구가 언급된다. 물론 전세계적으로 연안국 중 해적이 없었던 나라를 찾는 게 더 힘든 건 사실이다.


▲ 오늘날 복원된 전열함 HMS빅토리호.


‘해적면허’의 시대… 女해적도 등장


해적 중에는 독특한 해적도 있다. 바로 사략선(私掠船)이다. 우리 말로 풀이하자면 ‘국가 공인 해적’이다. 개인이 국가로부터 특허장을 받아 자신의 선박을 무장하고 노략질에 나선 뒤 포획물 중 일부를 국가에 바치는 해적을 일컫는다.


사략선이 등장한 까닭은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수군(水軍)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천대받았다. ‘육지에 발 붙일 곳이 없어 쫓겨난 인생낙오자’ 쯤으로 여겨졌으며 실제로 혹독한 중노동, 생명의 위협에 내몰렸다. 자연히 지원자가 적을 수밖에 없었고 강제징집으로 병력을 충당하기에도 한계가 있었기에 국가는 해적과 손 잡는 게 이득이었다. 체포 시 이유불문하고 사형에 처해졌던 해적들로서도 ‘마음 놓고’ 본업에 종사할 수 있었기에 ‘대환영’이었다.


게다가 해적은 평생을 싸움질로 보냈기에 정규군처럼 막대한 국고를 소모해가면서까지 훈련을 시킬 필요도 없었다. 사략선의 횡포에 상대국이 항의하더라도 “우리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반 해적들의 소행”이라고 ‘입 닦으면’ 그만이었다. 사략선이 바치는 두둑한 재물은 덤이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략선장은 16세기 영국에서 활동한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다. 그렇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한 그 드레이크 맞다.


그는 유명세에 걸맞게 해적질도 ‘전지구적 스케일’이었다. 1577년 개인 소유의 약탈선단을 이끌고 출항한 그는 태평양의 주요 식민도시들을 휩쓰는가 하면 파나마 앞바다에서 보물선을 덮치는 등 ‘신들린 노략질’ 끝에 인도양, 희망봉을 거쳐 1580년 11월 귀국했다. 무려 마젤란의 뒤를 잇는 ‘제2의 세계일주’였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강력항의하는 스페인 펠리프 2세의 사신이 보는 앞에서 드레이크에게 ‘기사작위’를 서임해 ‘공로’를 치하했다. 아시아에는 명나라 해금정책을 뚫고 밀수로 부를 쌓은 끝에 관직에 진출한 정지룡(鄭芝龍) 등이 있다.


사략선은 한반도와도 인연이 있다. 유럽 주요국은 17세기 무렵 아예 ‘동인도회사’라는 용병회사 겸 무역업체 겸 해적집단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동인도회사를 가장 먼저 설립한 나라는 네덜란드였으며 사략선 선원이었던 얀 야너스 벨테브레(Jan J. Weltevree)는 일본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제주도까지 표류한 끝에 조선에 정착하게 된다. 그는 박연(朴淵)으로 이름을 바꾸고 조선여성과 결혼해 자식까지 두게 된다.


하멜표류기(The Journal of Hendrick Hamel)에는 한양으로 압송됐더니 ‘갓 쓰고 한복 입은 백인’이 나타나 깜짝놀랐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인들은 피부색은 달라도 벨테브레를 같은 민족으로 대했으며 그는 병자호란에 참전하는 등 ‘조국’에 충성을 다했다. 이렇게 다방면에서 활동한 사략선은 1856년에야 파리선언을 통해 폐지된다.


‘해적의 황금기’는 17세기 말~18세기 초다. 많은 해적들이 대서양, 태평양을 누볐으며 특히 카리브해 해적들이 유명했다. 상술한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도 이들을 모티브로 각색한 것이다. 대표적 인물은 ‘검은수염’ 에드워드 티치(Edward Teach)로 포브스는 지금의 가치로 환산해 티치가 1천250만달러(약 140억원) 규모의 재물을 ‘털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영국 출신인 그는 치렁치렁한 수염을 달고 다니면서 두 개의 검, 많은 권총을 찼으며 반항하는 자는 잔인하게 죽여 같은 해적들 사이에서도 ‘악마’로 통했다. 프랑스, 영국령 북미 식민지(미국·캐나다) 등 국적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털었으며 결국 1718년 영국 해군과의 교전 끝에 사망한다. 시신을 살핀 결과 몸에는 탄환 5발이 박히고 20개의 자상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동명의 캐릭터로 등장하기도 한다.


여성해적도 있다. 아일랜드 출신의 앤 보니(Anne Bonny)는 붉은머리에 괄괄한 성격을 가진 여장부로 바하마에서 해적들을 상대로 술집을 경영하다가 아예 자신이 해적질에 뛰어들었다. 1720년 해적사냥꾼에게 붙잡혀 사형이 선고됐으나 임신 중이라는 점이 참작돼 죽음은 면했다.


2008년 타임지가 ‘역사상 10대 해적’ 중 하나로 꼽은 청(靑)나라 출신의 칭이쑤(鄭一嫂)는 무려 ‘5만명’의 부하를 거느리고서 약탈에 나섰다. 1810년 영국, 포르투갈, 청나라가 그녀에 대항해 연합할 정도로 막강한 위세를 떨쳤으나 황제의 권유로 은퇴한 뒤 사면받아 천수를 누렸다. 여담이지만 명나라는 정화(鄭和)가 이끈 대선단이 아프리카까지 향했을 정도로 조선술을 갖춘 나라였으나 해금정책을 펼쳐 중국의 해군력은 이후 급속도로 퇴보한다.


▲ 곳곳에 피탄자국이 남은 삼호주얼리호 선체.


‘공공의 적’으로 낙인 찍힌 현대의 해적


이렇게 때로는 국가와 협력하고 때로는 버림받으면서 유구한 세월 동안 존속한 해적은 19세기 중순부터 ‘공공의 적’으로 찍히게 된다. 이 무렵 유럽은 산업혁명을 통해 인구를 불리고 기술을 개발해 우수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시아에서도 탈아입구(脫亞入毆)를 추진한 일본, 전세계 은자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던 청나라 등에게 있어서 해적은 불필요한 존재였다. 한반도에서는 신라구 이래로 대규모 해적이 자취를 감춘지 오래였다.


‘휴식기’를 보낸 해적은 국제사회가 1일생활권으로 묶이고 국가 간 무역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해진 20세기 말부터 재차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아프리카의 소말리아해적, 동남아의 말라카해적이 그들이다.


당초 천혜의 자연경관 등 성장잠재력을 보유했던 소말리아는 1990년대 초 내전이 시작되면서 ‘막장’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내전 현장은 영화 ‘블랙호크다운’에서 상세히 묘사된다. 주민들은 일자리를 잃고서 환각제인 카트에 찌든 채 군벌에게 학살당하고 때로는 미군 오폭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군부는 교묘한 선전선동으로 주민들의 적개심이 오로지 미국에게만 쏠리게 만든다.


결국 1993년 모가디슈전투에서 소수의 미군병사들이 다수 군벌, 민병대에게 포위된 끝에 전멸직전까지 갔다가 다국적군에 의해 구출되고 그 과정에서 블랙호크 헬기 수 대가 격추되는 상황이 벌어지자 미국은 철수를 결정한다. 마지막 안전핀마저 뽑히자 거리낄 게 없어진 군벌들은 내전을 재개하게 되며 소말리아는 경제순위에서 ‘뒤에서 1~2등’을 다투는 세계 최악의 빈곤국으로 전락한다. 일자리를 잃은 어부들은 그물 대신 총을 쥐고 바다로 나아가게 되며 이들이 소말리아해적이다.


해적질이 ‘돈’이 된다는 걸 안 국제사회의 ‘검은 투자’가 이뤄지자 소말리아해적은 하나의 ‘비즈니스’로 자리잡는다. 해적들은 군벌의 통제 하에 모선(母船)을 타고 나간 뒤 소형보트에 분승해 교통요충지인 아덴만을 지나는 유조선, 화물선, 원양어선 등을 납치함으로써 선원들 몸값을 받아내는 형태로 돈벌이를 한다. 석해균 선장처럼 피랍자들이 목숨이 위태로워진 경우도 부지기수다.


아덴만은 홍해, 수에즈운하와 함께 동서양을 잇는 무역로다. 막대한 경제적 피해를 입게 된 여러 나라들은 급기야 연합해군을 결성하기에 이르게 되며 말 그대로 전무후무한 ‘위아 더 월드’가 연출됐다. 연합해군에는 한국·미국·일본·영국·독일·이탈리아·스페인 등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물론 중국·러시아 등 범공산권 국가, 인도 등 비동맹국가들도 참여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아덴만 여명작전 당시 총기납치 사건으로서는 사상최초로 사망자 없이 피랍자 전원을 구출하는 쾌거를 거두기도 했다.


말라카해적도 탄생원인은 소말리아해적과 비슷하다. 동남아에서는 지금도 필리핀 민다나오 등 곳곳에서 반군과 정부군 간 교전이 발생하고 있다. 일터를 잃은 소수민족이나 범죄자들은 치안부재를 틈타 아시아 주요국들이 석유를 운송하는 요충지인 말라카해협에서 노략질에 나서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소말리아해적과 달리 지금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동남아 연합군이 단속에 나서고 있지만 2015년 한국 화학제품운반선이 공격받는 등 피해는 여전이 속출하고 있다.


이달 6일 해양수산부가 발표한 ‘2018년도 3분기까지 전세계 해적사고 발생현황’에 따르면 올해 3분기까지 세계 곳곳에서 발생한 해적피해는 총 156건으로 전년 동기 대비 28.9% 증가했다. 피해자도 164명으로 14.7% 늘어났다. 근래에는 말라카·소말리아에 이어 서아프리카에서도 해적이 준동하는 형편이다.


인류의 역사와 부정적 측면에서 호흡해 온 해적. 선(善)이 있으면 악(惡)이 있는 게 자연의 섭리라면 해적의 출현은 어쩌면 필연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지혜의 동물이다. 사람목숨을 파리처럼 여기는 악질적 해적은 엄벌로 다스리는 게 마땅하지만 적잖은 수의 해적은 ‘빈곤’ ‘소외감’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제2의, 제3의 해적 등장을 막기 위한 근본적 해결책이 마련된다면 세상은 보다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끝>

키워드

#해적
저작권자 © 투데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