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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 ‘소확행’ 카우보이의 세계와 유언비어

    자위(自衛)를 위해 집총하고 묵묵히 목장을 지킨 카우보이들
    기사입력 2018.12.07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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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jpg▲ 로데오 경기를 즐기는 카우보이들.
     

    [투데이코리아=오주한 기자] “전직 치과의사였던 주인공은 서부에서 가장 빠른 총잡이로 ‘전업’한다. 어느날 형의 복수를 하겠다고 덤비던 사람을 죽이고 교수형에 처해질 위기를 맞지만 전설적인 보안관의 도움으로 피신한다. 훗날 재회한 두 사람은 은행강도범들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을 처치한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한 여인을 두고 묘한 갈등이 생겨나는데...”

    1958년 개봉해 전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끈 미국영화 ‘OK 목장의 결투’의 줄거리다. 이 영화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총싸움’이다. 두 사람이 서로를 등지고 한발자국씩 내딛다가 허리춤의 권총을 번개처럼 뽑아들면서 몸을 돌려 사격하는 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이같은 영화장르를 ‘서부극(Western)’이라고 부른다. 도대체 미국 서부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같은 결투극이 벌어졌던 것일까. 알 사람은 다 안다. 1850~1890년 서부개척시대 당시 한 뼘의 목초지를 두고서 서로 총질을 했던 ‘카우보이(Cowboy)’들의 ‘생존게임’이 그것이다.

    9.jpg▲ 서부개척시대 당시의 마차.
     

    “내 땅, 내 재산은 내가 지킨다”

    카우보이. 일반적으로 이들의 직업을 ‘전문 총잡이’로 아는 사람이 많지만 실은 ‘목동’이다. 이름부터가 ‘카우(소)+보이(남성)’이다. ‘보이’에는 소년이라는 뜻도 있지만 ‘특정한 일을 하는 남성’을 일컫는 의미도 있다.

    신대륙을 발견한 유럽인들은 모두 대서양을 건너 보스턴 등 미 동부지역에 상륙했기에 미국은 이곳을 중심으로 발전한다. 지금도 워싱턴, 뉴욕, 보스턴 등 주요도시는 동부에 몰려 있다. 미국인들이 서부로 향하게 된 계기는 ‘절대권력’ 나폴레옹(Napoleon)이 미 중부의 루이지애나 식민지를 ‘헐값’에 미국에 팔아버린 사건이다.

    길이 뚫리자 미국인들은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서 너도나도 서부로 향한다. 그런데 초창기 미 서부는 말 그대로 ‘무법(無法)지대’였다. 아직 연방정부의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으며 때문에 이주민들이 땅을 차지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먼저 도착한 사람이 깃발 꽂고 ‘우리 땅’이라 선언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치안부재의 상황에서 ‘네 땅은 곧 내 땅’이었다. 총 든 침입자들이 남의 영역을 침범하는 사례가 빈번했으며 먼저 정착한 사람도 그때마다 총을 들고 응수해야만 했다. 서로를 죽이고 죽는 건 서부에서 ‘흔한 일상’이었다.

    침입자들이 노리는 대상에는 땅 뿐만 아니라 소 등 ‘가축’도 있었다. 서부에는 이렇다 할 농경지가 없었다. 농사라는 건 그저 아무 땅에다 모종을 심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 일구고 또 일군 끝에 지력(地力)을 만들어야 가능하다. 자연히 이주민들은 ‘유목민’이 돼 가축을 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주로 키운 동물은 소였으며 이 ‘소’와 ‘목초지’를 두고 목장주와 강도떼 간의 싸움이 벌어졌기에 ‘카우보이=총잡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카우보이의 날렵한 총솜씨는 실내사격장이 아닌 ‘실전’에서 단련된 셈이다.

    10.jpg▲ ‘빌리 더 키드’의 흑백사진.
     

    ‘선량한’ 카우보이와 ‘전업’ 카우보이

    서부개척시대가 장기화되고 카우보이 중 일부는 아예 ‘전업 총잡이’로 나서기도 한다. 서부에서 많은 금광이 발견되면서 ‘엘도라도’를 찾으러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자연히 이를 약탈하려는 ‘전업 도적떼’도 생겨났기 때문이다. 누구는 강도가 되는가 하면 누구는 보안관의 길을 택하고, 누구는 목장주의 ‘보디가드’가 되는 등 진로는 세분화된다.

    오늘날까지 명맥이 이어진 유구한 전통의 직업인 보안관 중에는 ‘연방보안관’이라 부르는 ‘국가 공인 인간백정’도 있다. 이들은 미 연방 법무부 소속으로 공무원이지만 남북전쟁 등에서 실전으로 단련된 퇴역군인 출신들이 다수를 이뤘다. 자연히 피의자들은 제대로 된 재판 없이 체포 즉시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되기 일쑤였다.

    19세기 말에는 금을 둘러싼 ‘추잡한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존슨 카운티(Johnson County) 전쟁’ 당시 개척지를 선점한 이주자들은 후발주자들을 총과 협박을 동원해 내쫓았다. 그러나 누구도 이 땅을 포기하지 않은 탓에 용병, 갱조직까지 개입하게 되고 급기야 연방군 기병대까지 참전해 후발주자들을 ‘학살’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연방군이 선(先)이주자들 손을 들어준 이유는 ‘금’ 때문이었다.

    가장 유명한 총잡이 중 한 명이 1859년 태어나 1881년까지 ‘짧고 굵은 인생’을 살다 간 ‘빌리 더 키드(Billy The Kid)’다.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12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를 괴롭히던 남자를 접이식 나이프로 찔러 죽이는 등 호전성을 드러냈다.

    감옥에 갇히거나 유랑생활을 하던 빌리는 1877년 뉴멕시코주(州)의 한 마을 지주 밑으로 들어가 ‘보디가드’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한가지 더 임무가 주어지니 바로 ‘암살’이다. 지주는 그에게 사업 라이벌 제거를 지시했으며 일이 꼬여 자신의 주인이 보안관의 총에 맞아 숨지자 빌리는 다른 총잡이들을 인솔해 라이벌을 덮쳐 보안관까지 덤으로 살해해 ‘악명’을 떨쳤다.

    21세기까지 ‘전설적인 총잡이’로 유명세를 떨친 그의 사진들은 2010년에야 비로소 발굴된다. 한 시민이 골동품가게에서 단돈 2달러를 주고 산 흑백사진의 주인공이 빌리인 것으로 판명된 것이다. 총을 들고 포즈를 취한 사진은 2011년 경매에서 230만달러(약 24억원)라는 거액에 낙찰돼 또 한번 주목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선량한’ 카우보이들은 있었다. 이들은 골드러시 등 허황된 유횩에 빠지는 대신 묵묵히 목장을 지키며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11.jpg▲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를 빙자한 사실상의 ‘반미(反美)시위’에 나선 사람들.
     

    카우보이, 유언비어에 굴하지 않다

    오늘날에도 카우보이는 있다. 물론 고전적인 의미의 카우보이는 사라졌다. 대다수 목장은 현대식 방목을 하면서 굳건한 공권력 아래 더 이상 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소몰이를 길들인 야생마를 타고 했지만 지금은 심지어 ‘헬기’가 동원되기도 한다.

    시절은 바뀌었지만 적잖은 미국인들이 그때 그 시절의 옷을 입고 포장마차에 세간을 모두 때려넣은 채 유유자적 이동하면서 ‘소 고환요리’를 먹는 등 ‘전통’을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카우보이들에게 우육(牛肉)은 시장에 내다팔아야 할 귀중한 상품이었으며 때문에 그들은 남들이 안 먹는 부산물을 식사거리로 삼았다고 한다.

    미국산 소고기는 한때 우리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은 바 있다. 2008년 광우병촛불시위 당시 많은 국민이 ‘미국산 소고기를 먹으면 광우병에 걸려 뇌에 구멍이 뚫려 죽는다’ ‘한국인에게만 치명적이다’ ‘미국이 한국인들을 몰살시키려 일부러 수출하려 한다’ 등 허황된 선전·선동에 속아 거리로 나아갔다. 마치 ‘제2의 서부개척시대’를 보는 듯한 무법사태였다.

    물론 지금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미국산 소고기는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시장점유율은 50%를 넘어선지 오래다. 사실 광우병사태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렇다면 미국산 소고기를 숨 쉬듯이 먹는 그 많은 재미교포들은 이미 다 죽고 없어야 하는데’라는 의문이 들 수 있는 일이었다. 선전선동의 무서움을 새삼 깨닫는 사건이었다.

    지금도 우리 사회는 유언비어 투성이다. 선전선동에 넘어가 특정세력의 ‘정신적 노예’가 되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데 일조하는 대신 건전한 사회풍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확천금’ 등 허황된 유혹에 빠지지 않고 오로지 ‘소’만을 바라보며 묵묵히 일터를 지켰던 ‘선량한’ 카우보이들의 자세를 본받아 ‘정신적 무장’과 자각(自覺)에 힘쓰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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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코칼럼
  • [김성기 칼럼]‘脫원전’ 국민투표까지 갈 필요 없다
  • 김성기 부회장|2018-12-07
  • 대만이 지난 11월 탈(脫)원전 정책을 채택한 지 2년 만에 국민투표를 통해 정책을 폐기하자 국내에서도 비현실적인 탈원전 정책을 재고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과학적인 근거도 없이 막연한 불안감을 부추겨 탈원전으로 가는 정책은 에너지 수급에 중대한 장애를 초래, 나라의 장래를 크게 위협한다는 지적이다. 대만의 탈원전 정책 폐기를 주도한 대만 칭화대 원자과학원의 예쭝광 교수는 국민투표 직후 국내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원자력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불안, 유언비어에 현혹됐던 국민이 작년 대정전과 심각한 대기 오염을 겪으면서 원전 필요성을 깨닫게 됐다”고 전했다. 대만은 11월 24일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찬성 59.5%대 반대 40.5%로 탈원전 폐기를 선택했다. 대만은 환태평양지진대에 들어 있어 지진이 자주 발생하고 국민의 막연한 원전사고 불안감도 높았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불안감은 최고조에 달해 유언비어가 난무했고 2016년 탈원전 정책을 공약으로 내건 민진당 정권이 탄생했다. 그러나 예 교수를 비롯한 대만 과학자들은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원전의 안전성을 강조했다. 또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원전이 대기오염 방지에도 적합하다는 점을 대만 국민에게 널리 알려 탈원전 폐기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국내에서도 에너지 관련 학회를 중심으로 과학자들이 나서 꾸준히 탈원전 정책의 허상과 문제점을 지적해왔다. 지난달 하순에는 57개 대학 교수 210명이 가입한 ‘에너지 정책 합리화를 추구하는 교수협의회’가 국민투표를 촉구하는 대정부 성명을 냈다. 이들은 정부가 “국민의사와 전문가 의견을 반영하는 절차도 없이 무책임한 환경단체의 비현실적 주장만 반영했다”며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국민의 의사를 묻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정부는 “대만 사례는 우리와 다르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정부가 어떤 의미에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모르겠으나 우리나라가 지질과 자연환경, 과학기술 수준 및 원전 안전도 등에서 대만 사례와는 크게 다른 게 사실이다. 최근 크고 작은 지진이 발생했지만 대만 사례처럼 원전 안전을 직접 위협할 수준이 아니며 원전 건설과 운영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을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다. 우리가 훨씬 더 안전하게 원전을 가동할 수 있는 여건을 갖췄다는 말이다. 정부와 관련 업계도 한국 원전의 기술수준과 안전성을 앞세워 해외진출을 홍보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신규 원전 건설 백지화와 노후 원전 수명연장 불허, 월성 1호기 조기폐쇄 등 탈원전을 선거 공약으로 내세워 집권했다. 취임후 신고리 원전 5, 6호기 공사를 중단시켰다가 공론화위원회의 배심원단 공론조사를 받아들여 공사를 재개했다. 공론화위원회는 약 60%의 공사재개 찬성으로 나타난 공론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막연하게 앞으로 원전비중을 축소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정부는 이후 지난해 말 제 8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탈원전 정책을 포함시켰고 한국수력원자력의 자발적인 사업포기로 신규 원전 4기 백지화, 월성 1호기 조기폐쇄를 구체화했다. 에너지 정책의 방향을 확고하게 세운다는 의미에서 탈원전에 대한 국민투표가 바람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문재인 정부가 추진해온 탈원전 절차를 감안하면 국민투표가 본래 취지와는 달리 정권의 명운을 건 치열한 정쟁으로 변질될 우려가 높다. 에너지 정책이 소위 ‘적폐청산’ 대상으로 떠올라 온갖 논쟁과 들쑤시기가 난무하고 또 하나의 거리 투쟁을 불러올 수도 있다. 지난 8월과 11월 원자력학회 등에서 실시한 두 차례 여론조사에서 원전 이용에 찬성한 응답이 70% 안팎으로 높게 나타났다. 여론의 흐름은 이미 방향이 잡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뻔한 흐름을 놓고 분쟁을 일삼기보다 그동안 정부가 취해온 정책의 역순으로 나아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전력수급기본계획을 현실에 맞게 수정하면서 원전의 안전도 요구를 대폭 강화해 국민 신뢰를 높이고 정책을 정상화해야 한다. 한수원의 정상화도 반드시 요구되는 부분이다. &lt;투데이코리아 부회장&gt; 필자약력 △전)국민일보 논설실장,발행인 겸 대표이사 △전)한국신문협회 이사(2013년) △전)한국신문상 심사위원회 위원장
  • [권순직 칼럼]국가 부도의 날
  • 권순직 논설주간|2018-12-06
  •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개봉 10일도 안되어 관객 6백만 명을 돌파하는 등 흥행이 성공적이다. 20여년 전 우리나라를 치욕의 현장으로 만든 이른바 IMF(국재통화기금)사태를 주재로 한 이 영화에 관객이 몰리고, 국민들이 뜨거운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당시의 악몽을 떠올리며 지금의 팍팍한 삶이 겹쳐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국가가 부도 위기에 몰려있던 당시의 상황을 재연하고 IMF와 협상과정을 그린 이 영화는 픽션과 넌픽션을 가미한 팩션이라고는 하지만 사실과는 많이 달랐다. 극적인 재미에 더 비중을 두어 그랬겠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의 생각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우리시대의 사건을 너무 흥미 위주로 하지 않았나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어쨌든 여러 측면에서 우리 국민에게 던지는 교훈은 적지 않다. 우리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고, 그 댓가로 금융 통화정책은 물론이고 기업구조조정 등 모든 정책을 IMF승인을 받아야한다는 내용의 양해각서를 체결하고서야 겨우 국가부도를 모면한 사건이다. 경제주권을 3년간 IMF에 넘겨준 것으로 그야말로 국치(國恥)였다. 하지만 국민들은 고개 숙이고 감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담함을 감출 수 없었던 협상내용을 간략히 살펴보자. 국회는 IMF기준에 맞춰 세입 세출을 맞춰야하고, 정부는 이 틀 안에서 정책을 수립한다는 내용이다. 심지어 국방 통일 문화정책까지 그들의 승인을 받아야했다. 이 양해각서는 국무위원의 서명도 모자라 국회의장과 대선 후보자들에게까지 서약을 받아갔다. 주권국가 국민으로서는 도저히 감내하기 힘든 굴욕이었고, 국민이 지도자를 잘못 선택하면 어떠한 댓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절감했다. 사태 1년전인 1996년 12월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 선진국 클럽에 들어갔다며 샴페인을 터뜨린다. 그러나 이 잔치는 한해도 못넘기고 재앙으로 다가온다. 1997년에 들어서면서 한달에 1천3백여개의 사상초유 기업 연쇄부도 사태가 빚어지는가 하면 한보 삼미 진로 기아자동차 등 재벌그룹이 도산위기에 몰리며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등 경제난이 심각해진다. 은행과 제2금융권의 부실로 이어진다. 여기에다 태국 바트화의 폭락 등 동남아시아 각국의 외환위기가 국내 외환 및 증시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기업의 대량 부도와 주가폭락 등으로 곳곳에서 적신호가 켜졌지만 당시 경제팀은 “우리나라는 경제의 기초체력이 튼튼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는 ‘강한 펀더멘털론’을 펼치며 경고음을 무시했다. 이처럼 곪을대로 곪은 경제체질을 놓고 건강하다며 내외로부터 다가오는 위기를 강건너 불보듯 한 정부 때문에 호미로 막을 위기를 가래로도 못막는 사태를 초래했던 것이다. 이것이 IMF사태의 본질이다. IMF사태의 여파는 그야말로 참혹했다. 기업의 대량 도산과 은행 및 종금사의 퇴출, 그에 따른 곳곳에서의 무더기 해고, 고공행진을 하는 실업률에 자살하는 인구가 급증하고 가정의 붕괴가 줄을 이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상황이다. 자, 그럼 국가부도의 날 영화가 지금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뭔가. 필자는 두가지를 생각했다. 첫째, 우리는 IMF사태를 조기에 성공적으로 극복했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아왔다. 물론 전 국민들이 뼈를 깎는 노력과 고통을 감내하여 경제를 안정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위기를 초래하고, 안이한 대처로 상황을 악화시킨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명확히 하지 않았다. 실패의 교훈을 얻는데 소홀했다. 둘째, 정책대응에 실패한 정책당국자에 대한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지 않았다. 정책의 실패에 형사책임을 묻기가 어렵다는 시각이 있지만, 실패한 정책이나 적절하지 못한 정책대응의 책임소재는 분명히 가려놓았어야 했다. 이 영화가 오늘도 빚어지고 있는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정책당국자들이 한번쯤 심사숙고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lt;투데이코리아 논설주간&gt; 필자약력 △전)동아일보 경제부장. 논설위원 △전)재정경제부장관 자문 금융발전심의위원 △현)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운영위원
  • [박현채 칼럼]철밥통을 걷어찬 이웅렬 회장
  • 박현채 주필|2018-11-30
  • 재벌 총수는 임기가 없는 만년 직장이다. 올해 62세로 적어도 10년은 더 회장직을 수행할 수 있는데도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이 철밥통을 걷어찼다. 1996년 코오롱 경영권을 승계한지 23년 만에 스스로 그룹 회장직을 비롯해 주요 계열사 직책을 모두 내려놓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새로운 창업의 길을 선택했다. 사실 그룹 오너의 퇴진 자체는 큰 이슈가 아니다. 갑질 논란이나 경영 실패 등 그룹을 둘러싼 잡음으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경영에서 물러났다가 사태가 진정되면 슬며시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그럴만한 특별한 사유가 없는데도 이 회장 스스로 퇴임을 선언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의 갑작스러운 은퇴선언 배경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창업주인 할아버지 이원만, 2세 아버지 이동찬의 뒤를 이어 자산기준 재계 순위 31위의 코오롱 그룹을 이끌어 온 그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덕분에 특별하게 살아왔지만, 그동안 금수저를 물고 있느라 이가 다 금이 간 듯하다”면서 '3세 경영자' 자리가 결코 쉽지 않았음을 토로했다. 이 회장은 "세상이 변하고 있고, 변하지 못하면 도태된다"고 전제하고 "매년 시무식 때마다 환골탈태의 각오를 다졌지만 미래의 승자가 될 준비는 턱없이 부족하다. 불현듯 내가 바로 걸림돌이구나, 내가 스스로 비켜야 진정으로 변화가 일어나겠구나 생각했다"고 밝혔다. 기업 환경의 급속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앞장서 달렸으나 한계를 느꼈음을 고백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 그 특권도, 책임감도 내려놓는다”며 홀가분해 했다. 검은색 터틀넥 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연단에 올라 은퇴선언을 한 것도 이러한 기분 탓이 아닌가 생각된다. 본인의 변화 속도가 느려 회사에 걸림돌이 된다고 느껴 퇴임을 결심했다는 이 회장의 솔직한 고백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재벌 기업과 총수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난 반세기동안 재벌의 오너 중심 지배구조는 과감한 의사결정, 빠른 추진력 등의 장점으로 산업화에 크게 기여했다. 한강의 기적을 이끈 주역으로 칭송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지구촌의 산업 생태계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는데도 대마불사라는 말만 믿고 안주하다가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변화의 물결에 올라타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다. 조선이 그렇고, 해운이 그렇고, 자동차가 그렇다. 기득권의 벽에 둘러싸여 작은 변화도 거부한 채 친인척 일감 몰아주기 등으로 자신들의 철옹성 지키기에만 몰두해 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오너 독단’의 폐해를 경계하며 스스로 그 그물을 제거한 이 회장의 ‘자의적 조기 퇴진’ 결정이 우리 기업문화를 돌아보는 신선한 자극제가 돼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 회장은 “이제 저는 청년 이웅열로 돌아가 새롭게 창업의 길을 가겠다”면서 “그동안 쌓은 경험과 지식을 코오롱 밖에서 펼쳐 보겠다”고 창업 의사를 내비쳤다. 스타트업은 대마가 아니라서 망해도 좋으니 마음껏 뜻을 펼쳐 보겠다는 얘기다. 번듯한 사업체를 놔두고 험난한 창업의 길을 택할 필요가 없는데도 이를 선택했다. 이 회장은 29일 신문방송편집인협회 회장단 초청 간담회에서 “창업 아이템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구체적인 아이템을 꼽지는 않았지만 주저 없이 “플랫폼 사업이 중요한 것 같다”고 답했다. 그는 “지난해 미국 실리콘밸리에 가서 블록체인을 공부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며 “앞으로 1년 정도 4차 산업 분야 인사들을 많이 만날 것”이라고 밝혀 블록체인 등 4차 산업혁명 관련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음을 내비쳤다. 이 회장은 “천천히 공부하며 창업을 준비하겠다. 창업 시기는 이르면 내년 상반기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1년이 넘을 수도 있다”고 말하고 “여러분들이 궁금해 하시는 그 모든 것들을 앞으로 행동으로 보여드리겠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는 경영권을 바로 아들에게 승계하지 않고 전문경영인에 맡긴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아들을 코오롱인더스트리 전무로 승진시켜 그룹의 패션사업을 총괄토록 했다. 경영수업을 받게 한 것이다. 언제 외아들인 이규호(35) 전무에게 경영권을 물려줄 것이냐는 질문에 “나중에 능력이 있다고 판단이 돼야 가능하다”며 “나는 기회를 주는 거다. (아들은) 현재 주요 회사 지분도 전혀 없다”고 답했다. 이 회장은 “아들에게 스스로 (능력을) 키우지 않으면 사회가 너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며 “하지만 나보다 훨씬 능력이 뛰어난 아들을 믿는다”고 말해 이 전무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이 회장의 전격 퇴진이 당장 코오롱의 소유구조나 경영 근간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는 그룹 지주사인 ㈜코오롱의 지분 49.74%를 보유하고 있는 1대 주주이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시장에선 이 회장의 퇴진을 4세 경영체제로 가는 징검다리에 불과하다면서 오너 경영이 언제든 재개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자의적 조기 퇴진’을 주목하는 것은 그 결정이 재벌가의 대물림 경영 관행에 익숙한 우리 기업문화를 뒤돌아보는 신선한 자극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lt;투데이코리아 주필&gt; 필자약력 △전)연합뉴스 경제부장, 논설위원실장 △전)언론중재위원회 중재위원 △전)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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