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위(自衛)를 위해 집총하고 묵묵히 목장을 지킨 카우보이들

▲ 로데오 경기를 즐기는 카우보이들.


[투데이코리아=오주한 기자] “전직 치과의사였던 주인공은 서부에서 가장 빠른 총잡이로 ‘전업’한다. 어느날 형의 복수를 하겠다고 덤비던 사람을 죽이고 교수형에 처해질 위기를 맞지만 전설적인 보안관의 도움으로 피신한다. 훗날 재회한 두 사람은 은행강도범들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을 처치한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한 여인을 두고 묘한 갈등이 생겨나는데...”


1958년 개봉해 전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끈 미국영화 ‘OK 목장의 결투’의 줄거리다. 이 영화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총싸움’이다. 두 사람이 서로를 등지고 한발자국씩 내딛다가 허리춤의 권총을 번개처럼 뽑아들면서 몸을 돌려 사격하는 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이같은 영화장르를 ‘서부극(Western)’이라고 부른다. 도대체 미국 서부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같은 결투극이 벌어졌던 것일까. 알 사람은 다 안다. 1850~1890년 서부개척시대 당시 한 뼘의 목초지를 두고서 서로 총질을 했던 ‘카우보이(Cowboy)’들의 ‘생존게임’이 그것이다.


▲ 서부개척시대 당시의 마차.


“내 땅, 내 재산은 내가 지킨다”


카우보이. 일반적으로 이들의 직업을 ‘전문 총잡이’로 아는 사람이 많지만 실은 ‘목동’이다. 이름부터가 ‘카우(소)+보이(남성)’이다. ‘보이’에는 소년이라는 뜻도 있지만 ‘특정한 일을 하는 남성’을 일컫는 의미도 있다.


신대륙을 발견한 유럽인들은 모두 대서양을 건너 보스턴 등 미 동부지역에 상륙했기에 미국은 이곳을 중심으로 발전한다. 지금도 워싱턴, 뉴욕, 보스턴 등 주요도시는 동부에 몰려 있다. 미국인들이 서부로 향하게 된 계기는 ‘절대권력’ 나폴레옹(Napoleon)이 미 중부의 루이지애나 식민지를 ‘헐값’에 미국에 팔아버린 사건이다.


길이 뚫리자 미국인들은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서 너도나도 서부로 향한다. 그런데 초창기 미 서부는 말 그대로 ‘무법(無法)지대’였다. 아직 연방정부의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으며 때문에 이주민들이 땅을 차지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먼저 도착한 사람이 깃발 꽂고 ‘우리 땅’이라 선언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치안부재의 상황에서 ‘네 땅은 곧 내 땅’이었다. 총 든 침입자들이 남의 영역을 침범하는 사례가 빈번했으며 먼저 정착한 사람도 그때마다 총을 들고 응수해야만 했다. 서로를 죽이고 죽는 건 서부에서 ‘흔한 일상’이었다.


침입자들이 노리는 대상에는 땅 뿐만 아니라 소 등 ‘가축’도 있었다. 서부에는 이렇다 할 농경지가 없었다. 농사라는 건 그저 아무 땅에다 모종을 심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 일구고 또 일군 끝에 지력(地力)을 만들어야 가능하다. 자연히 이주민들은 ‘유목민’이 돼 가축을 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주로 키운 동물은 소였으며 이 ‘소’와 ‘목초지’를 두고 목장주와 강도떼 간의 싸움이 벌어졌기에 ‘카우보이=총잡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카우보이의 날렵한 총솜씨는 실내사격장이 아닌 ‘실전’에서 단련된 셈이다.


▲ ‘빌리 더 키드’의 흑백사진.


‘선량한’ 카우보이와 ‘전업’ 카우보이


서부개척시대가 장기화되고 카우보이 중 일부는 아예 ‘전업 총잡이’로 나서기도 한다. 서부에서 많은 금광이 발견되면서 ‘엘도라도’를 찾으러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자연히 이를 약탈하려는 ‘전업 도적떼’도 생겨났기 때문이다. 누구는 강도가 되는가 하면 누구는 보안관의 길을 택하고, 누구는 목장주의 ‘보디가드’가 되는 등 진로는 세분화된다.


오늘날까지 명맥이 이어진 유구한 전통의 직업인 보안관 중에는 ‘연방보안관’이라 부르는 ‘국가 공인 인간백정’도 있다. 이들은 미 연방 법무부 소속으로 공무원이지만 남북전쟁 등에서 실전으로 단련된 퇴역군인 출신들이 다수를 이뤘다. 자연히 피의자들은 제대로 된 재판 없이 체포 즉시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되기 일쑤였다.


19세기 말에는 금을 둘러싼 ‘추잡한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존슨 카운티(Johnson County) 전쟁’ 당시 개척지를 선점한 이주자들은 후발주자들을 총과 협박을 동원해 내쫓았다. 그러나 누구도 이 땅을 포기하지 않은 탓에 용병, 갱조직까지 개입하게 되고 급기야 연방군 기병대까지 참전해 후발주자들을 ‘학살’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연방군이 선(先)이주자들 손을 들어준 이유는 ‘금’ 때문이었다.


가장 유명한 총잡이 중 한 명이 1859년 태어나 1881년까지 ‘짧고 굵은 인생’을 살다 간 ‘빌리 더 키드(Billy The Kid)’다.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12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를 괴롭히던 남자를 접이식 나이프로 찔러 죽이는 등 호전성을 드러냈다.


감옥에 갇히거나 유랑생활을 하던 빌리는 1877년 뉴멕시코주(州)의 한 마을 지주 밑으로 들어가 ‘보디가드’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한가지 더 임무가 주어지니 바로 ‘암살’이다. 지주는 그에게 사업 라이벌 제거를 지시했으며 일이 꼬여 자신의 주인이 보안관의 총에 맞아 숨지자 빌리는 다른 총잡이들을 인솔해 라이벌을 덮쳐 보안관까지 덤으로 살해해 ‘악명’을 떨쳤다.


21세기까지 ‘전설적인 총잡이’로 유명세를 떨친 그의 사진들은 2010년에야 비로소 발굴된다. 한 시민이 골동품가게에서 단돈 2달러를 주고 산 흑백사진의 주인공이 빌리인 것으로 판명된 것이다. 총을 들고 포즈를 취한 사진은 2011년 경매에서 230만달러(약 24억원)라는 거액에 낙찰돼 또 한번 주목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선량한’ 카우보이들은 있었다. 이들은 골드러시 등 허황된 유횩에 빠지는 대신 묵묵히 목장을 지키며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를 빙자한 사실상의 ‘반미(反美)시위’에 나선 사람들.


카우보이, 유언비어에 굴하지 않다


오늘날에도 카우보이는 있다. 물론 고전적인 의미의 카우보이는 사라졌다. 대다수 목장은 현대식 방목을 하면서 굳건한 공권력 아래 더 이상 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소몰이를 길들인 야생마를 타고 했지만 지금은 심지어 ‘헬기’가 동원되기도 한다.


시절은 바뀌었지만 적잖은 미국인들이 그때 그 시절의 옷을 입고 포장마차에 세간을 모두 때려넣은 채 유유자적 이동하면서 ‘소 고환요리’를 먹는 등 ‘전통’을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카우보이들에게 우육(牛肉)은 시장에 내다팔아야 할 귀중한 상품이었으며 때문에 그들은 남들이 안 먹는 부산물을 식사거리로 삼았다고 한다.


미국산 소고기는 한때 우리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은 바 있다. 2008년 광우병촛불시위 당시 많은 국민이 ‘미국산 소고기를 먹으면 광우병에 걸려 뇌에 구멍이 뚫려 죽는다’ ‘한국인에게만 치명적이다’ ‘미국이 한국인들을 몰살시키려 일부러 수출하려 한다’ 등 허황된 선전·선동에 속아 거리로 나아갔다. 마치 ‘제2의 서부개척시대’를 보는 듯한 무법사태였다.


물론 지금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미국산 소고기는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시장점유율은 50%를 넘어선지 오래다. 사실 광우병사태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렇다면 미국산 소고기를 숨 쉬듯이 먹는 그 많은 재미교포들은 이미 다 죽고 없어야 하는데’라는 의문이 들 수 있는 일이었다. 선전선동의 무서움을 새삼 깨닫는 사건이었다.


지금도 우리 사회는 유언비어 투성이다. 선전선동에 넘어가 특정세력의 ‘정신적 노예’가 되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데 일조하는 대신 건전한 사회풍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확천금’ 등 허황된 유혹에 빠지지 않고 오로지 ‘소’만을 바라보며 묵묵히 일터를 지켰던 ‘선량한’ 카우보이들의 자세를 본받아 ‘정신적 무장’과 자각(自覺)에 힘쓰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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