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에 담아서는 안 될 그것’ 카니발리즘의 역사와 교훈

▲ 인류의 금기어 ‘카니발리즘’.


[투데이코리아=오주한 기자] 인류에게는 ‘절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될’ 금기어가 있다. 이 단어는 누구에게나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며 현대문명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받아들여진다.


엄연히 존재했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잊혀짐이 요구되며 또 마땅히 잊혀져야 할 존재. 바로 카니발리즘(Cannibalism)이다. 본 기획 내용은 일부 독자에게 정신적 충격을 야기할 수 있으므로 주의가 요구됨을 미리 밝힌다.


‘동족포식’은 적잖은 동물들의 ‘본능’이다. 귀여운 외모의 햄스터마저 새끼를 아무렇지 않은 듯 잡아먹어 어린이들의 ‘동심’을 파괴한 사례가 무수하다. 인간도 동족포식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허기’를 달래기 위한 목적에서부터 ‘기’를 흡수하기 위한 목적까지 태고적 인류사회에서는 카니발리즘이 공공연히 이뤄졌다.


동아시아에서는 ‘유교질서’가 확립된 후로 동족포식은 모습을 감췄다. 중국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는 인육을 젓갈로 담근 해(醢)라는 게 있었다. 유교를 국교(國敎)로 받아들인 한(漢)나라 때에도 종종 인육은 모습을 드러내다가 후대에 거의 완전히 사라진다.


다만 완전히 소멸된 건 아니라 오늘날에도 중국 도처에서는 인육이 밀거래되는 것으로 알려진다. 우리나라에서도 여성을 잔인하게 살해한 한 조선족 남성의 만행이 범국민적 공분을 일으킨 바 있다.


서양에도 식인풍습은 있었다. 영어에는 인육을 애둘러 표현하는 ‘롱포크(longpork)’라는 단어가 있다. 심지어 ‘십자군전쟁’ 때에도 카니발리즘이 행해졌다는 주장이 있다.


시오노 나나미(塩野七生)의 ‘십자군 이야기’ 1편에는 마아라트 알 누만(Maarrat al-Numan)에 주둔하던 레몽(Raymond)의 군대가 시체를 요리해 먹었다는 내용이 있다. 서양도 동양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흐르면서 동족포식은 일부 범죄자의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자취를 감춘다.


그런데 아직 태고적 인류의 습성을 그대로 간직한 중남미 대륙에서는 16세기까지도 카니발리즘이 ‘대중적이고 조직적으로’ 행해진 국가가 있다.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중미(中美)의 맹주 ‘아즈텍(Aztec)’이다.


▲ 현존하는 아즈텍 피라미드. 수백년 전 이곳에서는 ‘인신공양’ ‘카니발리즘’이 행해졌다.


아즈텍의 ‘꽃 전쟁’


아즈텍은 서기 1248년 건국돼 1521년 스페인 콩키스타도르(Conquistador)에 의해 멸망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다. 그러나 실상 아즈텍 붕괴의 결정적 원인은 ‘카니발리즘’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동족포식으로 인한 주변부족들의 ‘반란’이었다.


아즈텍은 훗날 유럽인들이 붙인 이름이다. 이전 시기에 존재했던 톨텍(Tolteca)문명을 이어받은 3개의 도시국가가 삼각군사동맹을 맺어 ‘에슈카 틀라톨로얀(Excan Tlatoloyan)’이라는 집단이 탄생했고 이것이 바로 아즈텍이다.


아즈텍의 외교정책은 매우 폭력적이었다. 이이제이(以夷制夷) 등 고도의 외교술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오로지 ‘전쟁’으로 주변민족들을 다스렸다. 주변민족들은 아즈텍에게 있어서 그저 하루하루 쫓기는 ‘사냥감’일 뿐이었다. 아즈텍은 수시로 군사를 동원해 ‘인간사냥’에 나섰다. 이같은 행위의 주된 목적은 ‘인신공양’ ‘포식’이었다.


아즈텍의 전쟁방식은 독특하다. 이른바 ‘꽃 전쟁(La guerra de Las flores)’으로 이들의 전투에서는 날카롭게 벼린 창칼이 사용되지 않았다. 대신 ‘죽지 않을 정도로만’ 치명상을 입히는 흑요석이 박힌 목제둔기가 사용된다.


아즈텍에 납치된 포로들은 신(神)에게 제물을 바치는 제단이나 ‘도축장’으로 끌려갔다. 제단에 바쳐진 포로는 아즈텍 사제의 흑요석 칼에 의해 ‘산 채로’ 가슴이 도려내져 심장이 꺼내진다. 사제는 심장을 불에 태운 다음 시체를 불에 ‘구웠다’. 여성포로의 경우 제단에 눕힌 뒤 목을 쳤으며 이 외 화살로 벌집 만들기, 산채로 불에 굽기, 맨몸에 칼 한자루만 주고 전사와 겨루게 하기 등 다양한 ‘방식’이 존재했다.


‘식용’으로 쓰일 포로는 더러는 노예로 쓰이는 경우도 있었다. 실컷 부려먹다가 일을 태만히 하면 곧장 ‘시장’에 내다팔았다. 이들의 이후 운명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아즈텍의 카니발리즘이 ‘허기’를 달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는 게 중론이다. 당시 아즈텍에서는 농사가 이뤄지고 있었으며 칠면조, 토끼 등 가축도 사육됐다. 이로 인해 아즈텍은 인구 500만명의 대제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굳이 ‘식인’에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원시적인 외교수단인 ‘공포’를 이웃부족들에게 조장하기 위함이 가장 컸을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 목제둔기로 무장한 채 ‘사냥감’을 뒤쫓는 아즈텍 전사들(사진=영화 ‘아포칼립토’ 中).


소수민족의 ‘분노’


그렇게 아즈텍인들의 ‘식탁’에 올려지는 삶을 살아야 했던 중미 소수민족들에게 ‘기회’가 찾아온 건 16세기 ‘콩키스타도르’의 출현이다.


흔히 스페인을 ‘가해자’로, 아즈텍을 ‘피해자’로 규정하는 이분법적 시각이 우리나라에 지배적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상술했듯 아즈텍은 주변민족을 학살하는 ‘가해자’였다. 스페인은 기나긴 세월 동안 이슬람세력의 지배를 받은 ‘피해자’였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건 인류역사상 흔했다. 지금의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을(乙)의 갑질’은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스페인은 이슬람의 지배영향으로 유럽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까만 머리’에 ‘까만 눈’인 사람들이 많다. 지금도 전국 도처에는 이슬람 건축물이 남아 있다. 이들은 피비린내 나는 독립전쟁인 ‘레콩키스타(Reconquista)’를 통해 자립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 얻은 무기제조술 등을 바탕으로 팽창에 나선다.


아즈텍을 방문한 콩키스타도르의 지도자는 에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es)다. 1485년 몰락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산토도밍고, 쿠바 등 식민지에서 부를 쌓아올렸다. 그러나 그에게는 더 큰 열망이 있었으니 ‘황금의 땅’ 엘도라도(El Dorado)를 찾는 것이었다. 코르테스는 쿠바 총독의 지원 하에 1519년 병력 600명, 인디오 300명, 말 10여필, 대포 10문 등이 실린 10척의 배를 인솔해 출항한 뒤 중미 동부해안에 상륙했다.


기껏해야 작은 통나무배만 만들 기술이 있었던 중미인들에게 거대한 범선의 출현은 ‘문화쇼크’였다. 그들의 묘사에 따르면 “바다에 갑자기 ‘산’이 떠 다닌다”였다. 당시의 광경은 멜 깁슨 감독의 2006년작 영화 ‘아포칼립토’ 말미에서 상세히 그려지고 있다.


콩키스타도르의 무장은 총, 톨레도(Toledo)검, 모리용(Morion)철모, 말(馬)로 상징된다. 총은 아즈텍인들에게 말 그대로 ‘마술’이었다. 우뢰와 같은 폭음이 일 때마다 사람이 하나씩 쓰러지는 건 호기심을 넘어 공포였다. 로마시대부터 철 생산지로 이름높았던 톨레도지방에서 만든 검은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원주민의 사지를 ‘손쉽게’ 잘라낼 정도로 날카로웠다.


또 강철 철모·갑옷은 아즈텍의 나무몽둥이로는 꿰뚫기 힘들어 콩키스타도르를 ‘불사(不死)’의 존재로 만들었다. 난생 처음 보는 동물인 말은 콩키스타도르를 인간이 아닌 ‘켄타우로스(Kentauros)’와 같은 괴수로 보이게끔 했다. 어마어마한 충격력으로 돌격하는 말 등에서 톨레도검을 휘두르는 콩키스타도르는 아즈텍인들에게 말 그대로 ‘재앙’이었다.


그러나 코르테스에게도 치명적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머릿수’였다. 상술했듯 아즈텍은 인구가 수백만명에 달했으며 강력한 중앙집권제 덕에 황제가 명령하면 순식간에 대군(大軍)이 소집됐다. 반면 코르테스 휘하 병력은 ‘600명’에 불과했다. 먼 거리 탓에 쿠바식민지나 본국으로부터의 지원도 바랄 수 없어서 아즈텍이 인해전술(人海戰術)로 나오면 몰살은 시간문제였다. 소수병력이 원시적 무장의 대군을 ‘학살’하는 광경은 19세기 기관총이 등장하고 난 뒤에야 가능해진다.


여기에서 코르테스와 중미 소수부족들의 ‘이해관계’는 맞아 떨어지게 된다. 아즈텍을 증오하고 두려워하던 소수민족들에게 스페인군은 그야말로 ‘구원자’였다. 병력이 열세였던 코르테스에게 소수민족은 ‘든든한 동맹’이었다.


실제로 소수민족들은 콩키스타도르에게 ‘생명의 은인’ 역할을 했다. 병력, 식량지원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화약재료인 ‘초석’ 등의 매장지를 찾는데 큰 도움을 줬다. 번쩍이는 쇠붙이(톨레도검)을 휘두르면서 아즈텍군의 사지를 잘라내고 인신공양, 카니발리즘 희생자가 될 뻔한 원주민들을 수만명씩 구해낸 콩키스타도르도 소수민족들에게 있어서 ‘메시아’였다.


이들은 콩키스타도르를 그들의 신인 케찰코아틀(Quatzalcohuatl)과 동일시하면서 숭배하는 지경까지 갔다. 스페인 최초의 멕시코식민지인 베라크루즈(Veracruz)도 원주민들의 작품이다.


중미 원주민과 스페인군 간 만남에서 한가지 재밌는 에피소드도 있다. 앞서 언급했듯 코르테스와 그 부하들의 중미방문 목적은 오로지 ‘금’이었다. 그런데 중미에서 흔하디 흔하던 금은 원주민들에게 ‘그저 좀 예쁜 금속’ 수준에 불과했다. 스페인인들이 식사도 거르고 ‘걸신 들린 듯’ 금을 캐는 모습을 본 한 원주민이 참다참다 건넨 질문은 “니네들 이거 먹냐”였다.


▲ 콩키스타도르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아즈텍에 맞서는 소수민족 전사들.


아즈텍,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운명 맞다


그렇게 금을 쓸어담던 콩키스타도르와 아즈텍이 처음부터 전면전을 벌인 건 아니었다. 몇 번의 소규모 교전 끝에 콩키스타도르의 위력을 알아차린 아즈텍 황제 몬테수마(Montezuma)는 코르테스에게 사절을 보내 화친을 요구한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던 콩키스타도르는 이에 응하지만 문제는 이들이 좋게 말하면 병력열세 앞에 예민해진 상태고 나쁘게 말하면 ‘겁’을 집어먹은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황제의 요청을 받아들여 아즈텍의 대도시로 향하는 과정에서 아직 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몇몇 소수민족들에게 습격당한 콩키스타도르는 급기야 이것이 ‘황제의 소행’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돼 “이렇게 된 바에야 너 죽고 나 죽자”는 심정으로 눈이 뒤집히게 된다. 황제의 명령이었냐 여부를 두고서는 현재 학계에서 ‘맞다’ ‘아니다’는 의견이 팽팽하다.


일단 당초 목적지였던 대도시에서의 교전에서 승리한 그들은 아즈텍 수도 테노치티틀란(TenoChititlan)으로 진격해 몬테수마를 인질로 억류한 뒤 몰려드는 아즈텍 대군을 상대로 ‘무쌍’을 찍었다. 당시 전투를 몬테수마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은 “양측이 맞붙더니 갑자기 저 멀리에서 뭔가가 휙휙 날아다니는데 알고보니 아즈텍군 팔다리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때 콩키스타도르 전사자는 놀랍게도 ‘0명’이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밀리는 가운데 식량이 다 떨어지고 화약이 바닥나며 창칼이 무뎌지는 건 어쩔 수 없어 코르테스는 후퇴를 결정하게 되고 그 결과 콩키스타도르가 학살당하는 ‘슬픔의 밤(Noche Triste)’ 사건이 벌어진다. 이들이 베라크루즈까지 철수하는 과정은 처절함 그 자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 와중에 쿠바식민지에서는 코르테스를 체포하려는 ‘진압군’이 파견된다. 총독의 명분은 왕명을 거역한 반역자 토벌이었지만 실상은 다 차린 밥상의 숟가락(금)을 아예 빼앗기 위함이었다. 지쳐 쓰러지기 일보직전에 벌어진 ‘스페인 정규군’과의 싸움이었지만 놀랍게도 코르테스는 이들을 격파하는 ‘기적’을 일으킨다. 잘 훈련되고 무장한 정규군 패잔병들을 휘하병력에 보충한 건 덤이었다.


식민지 간의 싸움에 분노한 스페인 왕이었지만 코르테스가 바칠 막대한 영토와 ‘금’에 흔들린 그는 내분을 ‘없었던 일’로 넘기고 나아가 지원군까지 파병한다.


이 결정은 이미 사방이 적군에 고립돼 패색이 짙은 아즈텍 멸망에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 스페인군, 소수민족들은 사방이 호수에 둘러싸인 테노치티틀란을 포위한 채 최후의 맹공을 퍼부었다. 아즈텍은 수도를 포기하고 내륙으로 후퇴하지만 기울어진 대세는 바로잡을 수 없었고 그렇게 스페인과 소수민족 연합군에 의해 중미 최후의 ‘카니발리즘 제국’ 아즈텍은 서기 1521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 폐허로 남은 아즈텍 유적.


“폭력은 저항을 부른다”


카니발리즘이 인류사(史)에서 모습을 감춘 건 종교의 도덕적 가르침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온몸으로 체감한 ‘피비린내 나는 교훈’이다.


‘폭력’은 복종과 순종을 불러오기는 커녕 오로지 분노와 저항만을 낳는다. 본 기획에서 다룬 콩키스타도르라는 ‘대척점의 세력’에 대한 중미 소수민족들의 ‘협력’이 대표적 사례다. 때문에 문명사회는 덕치(德治)를 무엇보다 중시했다.


2018년 한해 대한민국은 일명 ‘적폐청산’이라는 ‘죽음의 소용돌이’를 겪었다. 전 정부와 전전(前前) 정부의 내부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벌써 3명이 입증된 혐의 없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여론은 적폐청산에 대한 찬성보다는 ‘정치보복’ ‘독재구축’ 의혹으로 기울고 있다. 전임정부를 ‘제물’로 바쳐 여론을 호도한 뒤 ‘장기집권’ 체제를 구축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장기집권’은 이미 현 여당대표가 직접 언급한 바 있다.


잘못된 것은 바로세우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그것이 독재수단이 되거나 비법(非法)적 ‘희생’으로 실현돼서는 안 된다.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이라고 했다. 세상 사람 중 바보는 없다. 여론이 기울다보면 언젠가는 아즈텍처럼 ‘역풍’을 맞게 된다.


국민의 지지 앞에 ‘범진보’로 분류되던 야당(소수민족)들이 ‘우파정당(대척점)’과 합심하는 현상은 이미 현살화됐다. 정부·여당은 이것을 무조건 정략적 야합이라고 몰아붙이면서 ‘정신승리’를 해서는 안 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행위는 민심의 뒷받침 없이는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죽음의 소용돌이’는 2019년 새해에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여당의 ‘적폐청산’ 방침에는 흔들림이 없는 듯하다. 내년에는 또 얼마나 많은 목숨이 사라지게 될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른다. 뒤늦게 후회의 피눈물을 흘렸던 아즈텍인들의 통곡이 들리는 듯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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