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공명’ 군사원정 때 ‘정치적 목적’으로 개발됐다는 ‘만두’

▲ 뜨끈한 육즙과 풍부한 건더기를 머금은 만두.


[투데이코리아=오주한 기자] 어느덧 12월도 중순을 넘겼다. 지난달 24일 수도권에 첫눈이 내리고 기온이 급격히 내려간 가운데 시내 곳곳에서는 하얀 입김을 불어가면서 ‘겨울철 길거리음식’을 즐기는 시민들 모습을 어렵지않게 볼 수 있다.


만두도 순대, 떡볶이, 어묵(오뎅) 등과 함께 따뜻한 귀가길을 책임지는 길거리음식 중 하나다. 고기와 야채에 더해 기호에 따라서는 잘게 다진 김치도 듬뿍 머금은 하얀 만두피를 한입 깨물면 구수한 육즙이 혀를 만족시킨다. 건더기도 풍부해 씹는 맛도 유별나다.


연령이나 성별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 순대 등 다른 음식들과 달리 만두는 채식주의자 등 일부를 제외하고서는 누구나 대중적으로 즐길 수 있다는 점도 만두의 특징이다.


그런데 이 만두가 실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 행해진 ‘정치행위’의 산물이라는 설(說)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알고 보면 ‘슬픈 역사’를 지닌 만두, 알고 먹으면 맛이 ‘배’가 되는 만두의 ‘유래’를 알아보자.


▲ 한승상(漢丞相) 무향후(武饗候) 영익주목(領益州牧) 지내외사(知內外事) 평북대장군(平北大將軍) 제갈량(諸葛亮).


사방이 ‘적군’


만두의 역사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이 등장한다. 바로 ‘천재’의 대명사격인 ‘제갈공명(諸葛孔明. 181~234년)’이다.


서천(西川)에 웅거한 채 위(魏), 오(吳)와 함께 솥발처럼 삼국형세를 이룬 촉한(蜀漢)의 승상(丞相. 오늘날의 국무총리 격)을 지낸 제갈량은 흔히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통해 유비(劉備)에게 초빙된 것으로 알려진다. 이는 14세기 소설가 나관중(羅貫中)이 지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와 3세기 역사학자 진수(陳壽)가 지은 정사삼국지(正史三國志)의 내용이 일치하는 몇 안 되는 삼국지연의의 ‘팩트’다.


관우(關羽), 장비(張飛) 등 무관 인재풀은 풍부하면서도 정작 전략을 짜고 이들을 지휘할 ‘두뇌’는 부족했던 유비는 제갈량과의 관계를 ‘수어지교(水魚之交. 물고기와 물의 관계)’로까지 규정하면서 그를 극진히 우대한다.


순식간에 유비세력의 2인자로 올라선 제갈량은 당시 식자(識者)들 사이에서 향후 천하가 나아가야 할 길로 제기되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유비에게 제안한다.


이 계책은 유비가 형주(荊州), 서천을 장악한 뒤 장강(長江. 양쯔강)의 험란함에 기대 요즘말로 ‘우주방어’를 펼치고 있던 강동의 손권(孫權)과 연합해 인구, 자원이 풍부한 중원을 장악한 강력한 조조(曹操)에 맞서야 한다는 내용이다. 일단 방어에 치중하다가 조조 혹은 그 후손이 폭정을 벌일 때 서천, 형주에서 동시에 북진해 중원을 도모한 뒤 손권과 최후의 일전을 벌여 한(漢)나라를 재건한다는 게 이 계책의 전략이다.


천하삼분지계를 받아들인 유비는 제갈량, 관우, 장비에게 근거지인 형주를 맡긴 채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서천으로 진군해 이곳을 장악한다. 그 과정에서 형주를 책임질 후임으로 관우를 발탁한 채 서천에 소환된 제갈량은 유비와 함께 서천의 대위(對魏) 최전선인 한중(漢中)에 ‘우주방어’를 구축한다.


서천은 본시 사방이 산맥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와 같은 지역이다. 당(唐)나라의 시인 이태백(李太白)이 “촉(蜀)으로 가는 건 하늘을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까지 읊은 서천지역은 현대적 의미의 도로가 닦이기 이전까지인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오로지 잔도(棧道. 절벽에 나무로 만든 길)를 통해서만 중원과 연결됐다.


따라서 방어가 대단히 용이하기에 한나라를 세운 고조 유방(劉邦)도 이곳을 근거지로 항우(項羽)와 싸워 천하를 얻은 바 있다. 반면 공격은 매우 어려워 훗날 촉한을 무너뜨린 등애(鄧艾)는 촉군이 잔도를 불태우자 군사를 이끌고 첩첩산중을 넘은 끝에 겨우 촉한의 수도 성도(成都. 청두)를 함락한다.


보급이라고는 바랄 수 없기에 등애와 군사들은 쫄쫄 굶는 것도 모자라 온몸을 모포로 감싼 채 천길낭떠러지를 ‘굴러서’ 이동하는 등 죽을 고생을 하다가 촉군을 만나 한때 ‘삶’을 포기하는 지경까지 갔다. 그러나 촉한에 망조가 들린 탓인지 촉군장수가 ‘무조건 항복’을 하는 바람에 ‘기적적으로’ 식량, 무기를 보충하고 기력을 회복해 촉한을 멸망시킨다.


이렇듯 서천의 험란한 지세에 기대 때로는 위나라를 치고 때로는 물러서 방어했던 제갈량이지만 ‘적’은 위나라만 있는 게 아니었다.


소설 삼국지연의, 일본 PC게임 ‘삼국지시리즈’의 영향으로 흔히 무시되지만 당시 대륙의 이해관계에는 한(漢)족뿐만 아니라 동북부의 오환(烏桓)족, 북방의 흉노(匈奴)족, 서쪽의 강(羌)족, 남동부의 산월(山越)족, 남서부의 만(蠻)족에 더해 멀게는 한반도의 고구려, 일본의 야마타이(邪馬台)국 등 많은 주변민족들도 개입하고 있었다.


이들은 한족 군벌들과 야합하거나 대립하면서 중원정세에 관여했다. 오환족은 원소(袁紹)와 연합해 수시로 조조에 대항했다. 실크로드(Silk Road. 비단길)를 장악하고 있던 군벌 마초(馬超)는 아예 몸에 강족의 피가 흘렀다. 산월족은 중원을 노리는 손권의 ‘뒷통수’를 치면서 틈틈이 발목을 잡았다. 고구려는 관구검(毌丘儉)과 싸운 바 있으며 야마타이국의 히미코(卑弥呼)여왕은 위나라에 조공하면서 이익을 챙겼다.


▲ 오늘날의 중국 윈난성(雲南省).


‘만두’로 평정된 남만(南蠻)


제갈량을 불안하게 한 건 오늘날의 윈난성(雲南省) 지역에 할거하고 있던 만족이었다. 실제로 이들은 제갈량의 연이은 북벌에 ‘배가 아팠던’ 손권과의 밀약으로 반란을 일으키게 되며 서기 225년 제갈량은 천자(天子)의 명을 받들어 친히 대군을 이끌고 이곳으로 향한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묘사된 맹획(孟獲), 축융(祝融)부인, 올돌골(兀突骨) 등 만족 장수들과 칠종칠금(七縱七擒. 제갈량이 맹획을 일곱 번 사로잡아 일곱 번 풀어주다) 등 고사는 ‘허구’라는 게 중론이다. 그러나 정사삼국지에 ‘제갈량이 군사를 이끌고 남만(南蠻)을 평정했다’는 내용이 짤막하게 서술돼 있어 남벌(南伐) 자체는 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바로 이 과정에서 ‘우리의 겨울 친구’ 만두가 언급된다. 전해 내려오는 얘기에 따르면 남만을 평정한 제갈량은 귀국길에 여수(濾水)라는 강을 만나게 된다. 풍랑이 심하게 일어 도저히 건널 수가 없자 현지인들은 “49명의 머리를 바쳐서 남만정벌에서 죽은 귀신들을 달래야 한다”고 권한다.


그러나 전쟁과정에서 무수한 인명을 살상해 이미 적잖은 만인(蠻人)들의 원한을 산 제갈량으로서는 또 사람을 해칠 수는 없었다. 제갈량의 남벌 최종목적은 어디까지나 ‘인종청소’가 아니라 만인들을 ‘마음으로 복속시켜’ 북벌의 배후를 편안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겨우 남만을 정복한 와중에 죄 없는 수십명을 처형할 경우 군사를 본국으로 물리자마자 변란이 발생할 건 당연했다.


그렇다고 해서 또 만인들의 권유를 노골적으로 물리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들의 제안을 거부할 경우 ‘고고한 척 하는 중원인이 우리 만인들을 무시한다’ ‘우리의 풍습을 야만스럽게 본다’ 등 불만이 발생할 건 불을 보듯 뻔했다.


여기에서 제갈량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다. 만인들의 ‘인신공양’ 풍습을 존중하면서도 무고한 생명을 해치지 않기 위해 그는 밀가루반죽 속에 다진 양고기, 쇠고기 등을 채워넣은 뒤 인두(人頭) 모양으로 빚어 강물에 던져넣도록 한다. 바로 ‘만두’다. 그러자 강물은 잔잔해지고 제갈량과 그의 군대는 만인들의 환송을 받으며 무사귀환했다는 게 전설의 주된 내용이다.


물론 이 이야기가 정사에 기록된 건 아니다. 그냥 전해내려오는 민담일 뿐이다. 실제로 제갈량의 남만정벌 이전에도 만두와 유사한 음식이 대륙에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따라서 그저 ‘재미’로만 알고 있을 뿐 정색을 하고 학술토론회에서 이 고사를 끄집어내어 얼굴 붉히며 격론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실수는 하지 않도록 하자. 제갈량은 그저 제갈량일 뿐이고 만두는 그저 만두일 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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