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가지 ‘차별’ ‘도시전설’ 대상이 된 도축업자… 실상은 없어선 안 될 ‘국민먹거리 책임자’

▲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육류는 우리에게 없어선 안 될 필수 식재료다.


[투데이코리아=오주한 기자] ‘고기’는 채식주의자 등 일부를 제외하고서는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식재료다. 단백질은 모든 동물의 신체를 구성하는 필수요소다. 단백질은 피부, 근육을 만들기도 하고 호르몬을 생성하기도 한다. 생명현상의 정수(精髓)로 불리는 센트럴도그마(Central dogma)도 실은 단백질 합성과정을 뜻한다.


단백질은 콩 등 일부 식물에도 존재하지만 가장 큰 공급원은 뭐니뭐니해도 고기다. 농경이 시작되기 이전에는 고기가 유일한 단백질 공급원이었기에 태고적 인류는 수렵, 방목을 중시했다.


농사가 이뤄지고 정착된 이후에도 고기의 중요성은 높아 지금도 이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


2014년 기준으로 한국에서 도축된 가축은 닭 8억8000만 마리, 오리 5000만 마리, 소 100만 마리, 돼지 1천500만 마리에 달한다. 현대 들어 고기를 인공적으로 생산하는 ‘배양육’ 기술이 개발되긴 했지만 육식(肉食)은 단백질 공급 목적을 넘어 ‘미각’ 그 자체가 된 지 오래다.


▲ 불과 수십년 전 까지만 해도 한(恨) 맺힌 삶을 살아야만 했던 도축업자들(사진=EBS 캡처).


부끄러운 역사 ‘백정각시 놀음’


‘도축업자’를 빼놓고는 ‘고기’를 말할 수 없다. 고기는 상당한 수고로움이 더해져야 비로소 맛볼 수 있는 귀한 식재료다.


도축은 가축을 잡는 것부터 시작해 가죽을 벗기고, 발골(拔骨)하며, 고기를 부위별로 분리하고, 사람이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내는 것까지 긴 과정을 필요로 한다. 오늘날에는 크게 볼 때 부위별 분리까지 책임지는 도축업자, 알맞은 크기로 썰어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정육업자로 담당업무가 세분화됐다.


이렇듯 고마운 도축업자들이지만 과거 동양에서 그들이 받는 대접은 썩 좋지 못했다. 좋지 못한 대접을 넘어 아예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다.


과거 도축업자들은 ‘백정(白丁)’이라는 멸칭으로 지칭됐다. 계급사회였던 조선시대에는 수군(水軍), 광대, 무당 등과 함께 칠반천인(七般賤人)으로 분류됐다. 백정은 귀화한 후 함경도 일대에 많이 거주했던 여진족(만주족) 출신이 주로 맡았다.


여진족은 청(靑)나라를 세우는 등 19세기 말까지 대륙을 지배하며 동아시아를 호령했으나 조선에 귀화한 여진족들은 어디까지나 ‘조선인’이었기에 본국으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다. 이렇듯 기나긴 세월 동안 시련을 겪은 도축업자가 ‘사회인’으로서 인정받은 건 기존 사회체계가 송두리째 무너진 6.25전쟁 이후다. 실상 직업에는 귀천(貴賤)이 없는 게 사실이기도 하다.


백정들이 얼마나 서러움을 겪었냐면 조선시대 때는 천민과 양반 사이의 계급인 양인(良人. 평민)들 사이에서 이들을 대상으로 ‘멍석말이’ ‘백정각시 놀음’ 등이 성행하기도 했다.


백정과 그 가족은 양반, 양인들이 사는 마을에 사사로운 접근이 금지됐으며 이를 어길 시 ‘멍석말이’ 등 가혹한 폭력이 가해졌다. 멍석으로 몸이 보호되기에 안전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때리는 사람 입장에서는 어디가 급소이고 어디가 급소가 아닌지 구별할 길이 없기에 머리, 척추, 국부 등을 맞아 ‘반병신’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여성들의 경우는 더해 양인남성들이 치마를 벗긴 뒤 몸 위에 올라타는 성폭력이 가해졌다. 바로 ‘백정각시 놀음’이다. 유교(儒敎)국가였던 조선에서 여성이 ‘정조(貞操)’를 지키지 못한다는 건 죽음보다 더한 치욕이었다. 양반, 양인집안 여성의 경우 자결하는 게 관례였다. 백정과 그 가족은 한마디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 것이다.


▲ 노나카 히로무 전 일본 자민당 간사장. 그는 “노나카 히로무 같은 부라쿠민을 일본 총리로 세울 수 없다”는 비난을 듣는 등 갖은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해외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이름 ‘백정’


이들은 각종 부역에서 ‘면제’되기도 했다. 근래까지 우리나라에서 군복무를 하지 않은 남성에게는 취업 등에서 보이지 않는 불이익이 가해졌던 것과 유사하게 조선시대 때 부역에서 열외된다는 건 곧 ‘사회적 사형선고’나 다름 없었다.


더욱 ‘안습’인 건 ‘백정’이라는 단어는 아예 ‘욕’으로 통하기도 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홈페이지에 공개 중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조정대신들이 임금 앞에서 격론을 펼치면서 “너는 백정의 손자다” “내가 백정의 손자라고 한다면 너는 곧 내 아들이다” 등 서로를 비방하는 내용이 나온다. 저잣거리를 멀리 한 조정대신들까지 언급할 정도로 ‘백정’은 ‘전국구 욕설’로 쓰인 것이다.


물론 조정에서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눈 뜨고 방관하기만 한 건 아니다.


흔이 조선을 두고 ‘부패한 나라’ 등 부정적 인식이 강하지만 조선은 당시 시대상에서는 보기 드물게 ‘평등’을 실현하려 ‘노력’한 나라다. 백정만 해도 세종(世宗. 1397~1450)은 ‘백정의 양민화(化)’를 꾀했다. 세종의 둘째아들인 세조(世祖. 1417~1468) 때는 백정을 양민에 편입시키는 방안이 과거시험 문제로 출제되기도 했다.


동시대 해외의 백정에 대한 인식이 어떠하냐면 일본에서는 주로 도축업에 종사한 천민계급 부라쿠민(部落民)에 대한 차별이 오늘날까지도 공공연히 존재할 정도다.


일본은 미 군정(GHQ) 시기를 겪으면서 계급차별이 공식적으로는 사라졌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아직 부라쿠민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만연해 1975년에는 부라쿠민 채용금지 목적의 인명 블랙리스트가 주요 기업들에 유포된 사실이 언론에 의해 폭로된 ‘부락지명총람(部落地名総鑑)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때문에 노나카 히로무(野中広務) 전 자민당 간사장 등 극소수를 제외하고 많은 부라쿠민은 도축업자, 야쿠자(やくざ )의 삶을 살고 있다.


▲ 근래 등장한 ‘고기 자판기’. 육류 수요는 대체로 늘었으면 늘었지 줄어들진 않는다.


이들이 없으면 ‘고기’도 없다


조선왕조의 노력이 무색하게 한반도에서도 백정에 대한 민간의 차별은 이어졌다. 조정으로서도 풍속(風俗)을 해쳐가면서까지 백정을 포용할 수는 없었기에 사실상 손을 놓게 된다.


이렇듯 ‘개돼지’ 취급을 받은 동아시아 백정들 중 일부는 급기야 가축 대신 ‘사람’을 잡기 위해 칼을 든다. 일본에서는 야쿠자가 대표적이며 중국에는 한(漢)나라 건국공신인 번쾌(樊噲)가, 우리나라에는 ‘마장동 축산시장’ 업자들이 있다.


도축업자는 고기를 뼈 채로 박살내는 무거운 ‘발골용 칼’을 끼고 살면서 ‘가축’을 잡고 ‘고기’를 써는 게 일상이기에 ‘칼질’에 매우 능숙하다. 육중한 체격의 가축을 매일같이 다루기에 ‘힘’도 남다르다. 때문에 일단 칼질의 대상을 육류에서 ‘사람’으로 바꾸면 놀라운 전투력을 발휘했다.


‘개백정’이었던 번쾌는 대륙 곳곳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나고 첫 통일왕조인 진(秦)나라에 대항하는 군벌들이 봉기하자 같은 동네 ‘반달(반은 민간인, 반은 건달)’이었던 유방(劉邦)을 따라 종군하게 된다. 전쟁터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한 그는 한나라 건국 후 상국(相國. 재상)의 벼슬에 오르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역사상 기록된 도축업자 중 몇 안 되는 출세한 인물이다.


서울 성동구 마장동에 있는 ‘마장동 축산물시장’은 과거 몇몇 업자들이 ‘칼잡이’로 명성을 날린 것으로 알려진다. 물론 선량한 시민을 해친 건 아니고 자위(自衛) 차원에서다.


풍문에 의하면 1982년에는 분위기 파악 못한 조폭들이 ‘보호비’ 갈취를 위해 흉기를 들고 이곳에 들렀다가 ‘변’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당시 업자가 조폭을 ‘담그면서’ 한 말은 “자네, 돼지 멱 따는 소리 들어봤나”였다고 한다. 다만 어디까지나 물증은 없는 ‘도시전설’이기에 섣불리 진위여부를 단정할 순 없다.


많은 도축업자들이 오로지 ‘국민 먹거리’를 책임진다는 의무감으로 오늘도 건강한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하고 있기에 마장동시장에서 ‘조폭’을 언급하는 건 큰 실례가 된다. 반드시 삼가도록 하자.


오늘날 도축업자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고소득 직종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적잖은 업자들이 불이익을 우려해 얼굴이 공개되는 걸 꺼리기에 시장에서의 사진촬영도 반드시 사전허가를 받도록 하자. 그것이 사회를 위해 묵묵히 헌신하는 도축업자들에 대한 도리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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