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경전’ 손자병법(孫子兵法)으로 본 舊 일본군과 자위대



[투데이코리아=오주한 기자] 근래 한국 구축함이 자국 초계기에 사격통제레이더를 조사(照射)했다는 일본 측 주장이 제기돼 일촉즉발 분위기가 형성되는 가운데 일본 군사전력에 많은 국민 눈길이 쏠리고 있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은 우리에게 ‘일왕(日王. 천황)’ ‘경제대국’ ‘독도 야욕’ 등으로 흔히 인식되지만 정작 역사를 깊이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손자병법(孫子兵法)이 이르기를 “지피지기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라 이는 우리에게 약점을 작용할 수밖에 없다.


메이지(明治)유신 후 서양열강에 뒤쳐지지 않는 군사조직으로 성장했으나 전형적인 ‘당나라군대’ 전철을 밟다 패배해 해체되고 오늘날 자위대(自衛隊)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또 한 번 ‘태양’을 넘보는 일본 근대 군사조직의 역사를 알아보고 옛 고서(古書)에 근거해 허실을 짚어본다.


▲ ‘일본 근대의 아버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아시아를 벗어나 구라파(歐羅巴)에 든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의 ‘탈아입구(脫亞入毆.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열강 반열에 든다)’ 사상을 기치로 1868년 메이지유신을 단행하고 사회개혁에 나선 일본은 군대도 현대식으로 개조하기 시작한다. 유럽식 군복이 도입됐으며, 기관총이 배치됐고, 도검(刀劍)은 무장에서 후순위로 밀려났다.


12~19세기 동안 일왕을 ‘바지사장’으로 앉히고 실질적으로 일본을 통치한 막부(幕府)는 개혁세력에 의해 철퇴를 맞는다. 1868년 1~6월 발발한 보신(戊辰)전쟁에서 일본도, 조총, 갑옷 등으로 무장한 도쿠가와(德川) 막부군은 소총, 기관총을 앞세운 신식군대에 의해 말 그대로 ‘학살’당한다.


마지막 ‘구시대 잔재’를 제거한 일본군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주도 하에 급속도로 서구화되기 시작한다. 1872년 평민들을 징병하기 시작했으며 서구의 전례에 따라 일왕을 육해군 대원수로 추대한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한론(征韓論) 즉 ‘조선합병’을 주장한 인물이라 우리에게는 부정적인 인물이다.


당시 도입된 육군강국 프랑스의 군사교리 ‘엘랑비탈(élan vital)’은 훗날 중일(中日)전쟁, 태평양전쟁에서 중국군, 미군들에게 악명을 떨친 반자이(萬歲. 만세)돌격의 모태가 된다.


속된 말로 ‘닥치고 돌격’의 원조는 사실 유럽이다.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지옥 같은 참호전으로 인해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적 기관총 앞으로 병사들을 돌격시키는 전술을 택한다. 솜므(Somme)전투에서는 첫 하루만에 영국군 13만명 중 5만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유럽은 ‘탱크(전차)’의 등장으로 비로소 교착상태가 타개되자 ‘닥돌’을 금지한다. 반면 일본군은 ‘프로이센(독일)·프랑스 전쟁’에서의 프랑스 패배를 목격하고 독일식 체제를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사무라이(侍) 정신’과 부합한다는 이유로 수십년 전 전술을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그대로 써 먹는다. 그리고 이는 일본 패전의 결정적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일본군은 개혁 과정에서 1877년 세이난(西南)전쟁이라는 또 한 번의 진통을 겪는다.


조선정벌이 이와쿠리 도모미(岩倉具視)의 반대로 무산되자 사이고 다카모리는 1만3000명의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키고 발도(拔刀)돌격으로 한 때 정부군을 궁지로 몰아넣지만 화력의 열세로 결국 패해 자결하고 만다. 2003년 개봉한 톰 크루즈 주연의 헐리웃영화 ‘라스트 사무라이’는 군사자문으로 이 전쟁에 참전한 미국 퇴역군인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일본군 개혁의 성공 신호탄은 조선 지배권을 두고 청나라와 일본이 다툰 1894~1895년 청일(靑日)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시대에 뒤쳐진 한계를 드러난 청군은 일본군에 의해 처참히 박살나고 만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못 다 이룬 ‘대륙정벌’을 꿈꾸게 되며 훗날 중일전쟁으로 현실화된다.


일본군의 최전성기는 만주, 한반도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 일본이 격돌한 1904~1905년 ‘러일(露日)전쟁’이다.


1904년 2월 제물포·여순항공격과 5월 압록강전투을 치른 일본군은 1905년 3월 봉천전투에서 러시아군에 승리를 거두고 결정적으로 동년 5월 지금의 대한해협에서 벌어진 ‘쓰시마(對馬) 해전’에서 발틱(Baltic)함대를 격파한다.


당시 유럽에서 흑해함대, 동양함대와 함께 3대 함대로 꼽히던 발틱함대의 패배는 서구 각 국이 일본을 ‘열강’으로 인정하는 계기가 된다. 이 때 시작된 러일갈등은 오늘날에도 북방영토(쿠릴열도) 영유권을 두고 지속되고 있다.


▲ 통제파(統制派) 수장으로서 루거우차오(蘆溝橋) 사건 당시 2개 여단을 파병해 확전에 기여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통제불가의 군대


외견상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은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대립을 겪고 있었다. 일본군 파벌은 크게는 ‘정신력’을 중시한 황도파(皇道派)와 ‘힘’을 강조한 통제파(統制派), 육군파와 해군파로 나뉘어 있었다. 세부적으로는 봉건시대 잔재인 각 번국(藩國) 출신 간 신경전이 벌어졌다. 이같은 계파싸움은 일본군이 ‘당나라군대’로 전락하는 계기가 된다.


통제파를 중심으로 한 대미(對美) 강경파는 미국과의 전쟁을 결사반대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진주만기습 주역이 된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제독을 수시로 암살하려 했다. 1936년 2월에는 일왕을 추종하는 황도파 청년장교들이 통제파에 대항해 쿠데타(2.26사건)를 벌이기도 했다.


실패로 끝난 이 쿠데타로 황도파는 궁지에 몰리게 되고 기선을 잡은 통제파는 미국의 대일(對日) 석유 금수조치를 빌미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주도 하에 후일 태평양전쟁을 일으킨다.


태평양전쟁은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가 뭉쳐서 서양열강 식민지배에서 벗어나자”는 내용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으로 포장됐지만 실상은 ‘식민지 늘리기’가 진짜 목표였다. 쇼와(昭和) 18년인 1943년 5월31일 어전(御前)회의에서 채택된 ‘대동아정략지도대강(大東亜政略指導大綱)’은 말레이시아, 수마트라, 자바섬, 셀레베스 등을 ‘대일본제국 영토’로 만든다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일본군의 폭주는 이뿐만이 아니다. 1937~1945년 전개된 중일전쟁 발단은 ‘화장실’이다.


중국 베이핑(北平)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병사 하나가 밤새 홀연 사라지자 “중국인들이 죽였다”고 섣불리 단정지으면서 중국군을 공격했다. 무려 대본영(大本營. 일왕 직속 최고 군 통수부) 허가도 받지 않은 사실상의 ‘항명’이었다. 문제의 병사는 ‘볼일’을 보다 온 것으로 판명됐지만 ‘껀수’를 잡은 일본군은 공세를 멈추지 않았으며 심지어 대본영도 ‘모른 척’ 했다. 정상적인 군대라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 일본군에서 벌어진 것이다.


이 ‘루거우차오(蘆溝橋) 사건’으로 인해 벌어진 국지전은 전면전으로 확대됐으며 일본군은 약 8년간의 전쟁 동안 국민당, 공산당, 군벌 가릴 것 없이 중국군을 격파하면서 대륙을 장악해나갔다. 개전 첫 해인 1937년에는 중화민국 수도 난징(南京)에 입성해 대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다.


‘대륙정복’의 오랜 꿈을 실현시킨 이 중일전쟁은 아이러니하게 일본의 목숨을 야금야금 갉아먹어 나간다.


일본군은 드넓은 대륙에서의 전투에서 승리할수록 비례해서 넓어지는 전선(戰線)을 감당해야 했으며 그럴수록 더 많은 인적·물적 자원이 소모됐다. 게다가 인해전술(人海戰術), 게릴라전으로 나온 중국인들은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었기에 일본군에서도 막대한 희생이 발생했다.


일본은 자원확보를 위해 동남아로까지 전선을 확대해 유럽의 아시아 파병을 스스로 야기하며 급기야 석유 금수조치에 나선 미국을 상대로도 전쟁을 벌여 ‘제 무덤’을 파게 된다. 통제가 되지 않는 ‘당나라군대’의 말로가 어떠한지 알 수 있다.


▲ ‘지대한 삽질’ 끝에 일본군 전멸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우스갯소리로 ‘대한민국 독립투사’라 불리는 무다구치 렌야(牟田口廉也). 일본에서도 삼간사우(三奸四愚) 등으로 불리며 언급이 기피되고 있다.


총체적 난국


중국, 동남아, 태평양에서 동시에 ‘3개 전쟁’을 치른다는 건 당시 일본 국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나 정권을 장악한 통제파 중심의 군부(軍部)는 외무성, 황도파 등의 경고를 깡그리 무시했다. ‘오기’는 지휘부, 야전을 가리지 않아 상술한 루거우차오 사건처럼 ‘항명’이 ‘남자다움’으로 받아들여졌다. 통제파는 황도파, 해군 비난을 의식해 이같은 항명을 ‘묵인’하고 때로는 ‘독려’하기까지 했다.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한 것도 아니라서 진주만기습에서는 정작 미국 항공모함 전단, 유류시설에 전혀 피해를 주지 못했다. 이 항모전단은 얼마 뒤 미드웨이해전에서 격전 끝에 일본 항모 4척을 한꺼번에 격침시키게 된다.


육군에서는 여전히 ‘알아서 죽으러 나가는’ 반자이공격이 성행했으며 심지어 ‘대전차총검술’이라는 납득할 수 없는 전술까지 탄생한다. 동남아 방면 야전군 사령관이었던 무다구치 렌야(牟田口廉也)는 “일본인은 초식(草食)민족이다. 보급은 필요 없다. 길 가의 풀 뜯어 먹으면서 진군하라”는 희대의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러한 일본군의 ‘보급경시’는 훗날인 1969년 오쿠자키 겐조(尾久崎健三)가 일왕에게 새총으로 철탄을 날리는 희대의 테러를 벌이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오쿠자키 겐조는 태평양전쟁 당시 주둔한 뉴기니섬에서 동료들이 줄줄이 ‘굶어죽는’ 참상을 목격하고 정신적고통을 견디다 못해 테러에 나섰다. 일본군은 패잔병들에게도 가혹해 복귀 후 재정비가 아닌 ‘폭탄자살’이 강요됨에 따라 쓸데없는 병력소모도 극심했다.


전략뿐만 아니라 병기의 사정도 마찬가지라 ‘0식 함상전투기(제로센)’는 초창기에는 극한의 기동력으로 미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됐으나 점차 약점을 드러내 ‘사냥감’ 신세가 된다. 미국은 자국 전투기를 지속보완했으나 그 동안 일본군은 손을 놓고 있었다.


이같은 ‘장대한 삽질’ 끝에 일본은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해 ‘가미카제(神風) 전술’ 등으로 버티다 두 발의 원자폭탄 앞에 항복하고 미 군정(GHQ) 시대를 맞아 그 자신들이 ‘식민지’가 되는 신세에 처한다.


반면 유럽, 아시아, 태평양에서 치른 ‘3개의 전쟁’의 승리, 종전(終戰) 후 유럽 각 국을 미국 혼자 재건하는 ‘마셜플랜(Marchall Plan)’ 등 ‘쇼 미 더 머니’의 미국은 진주만기습에서 잃은 해군력을 급속도로 복구해 반격에 나선다. 무모한 돌격은 엄금됐으며 보급은 무엇보다 우선시됐다. 공방(攻防)의 밸런스도 중시해 피격 시 일본군처럼 ‘자살공격’이 아닌 숙련된 공병·의무병들을 동원해 ‘침착한 복구·치료’에 나섰다.


▲ 항진하는 해상자위대 함대.


필패(必敗)의 조건


오늘날 자위대는 사실상 구(舊) 일본군의 명맥을 잇고 있다. 육상자위대(약칭 육자대)의 경우 GHQ 시절 미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그나마 ‘통제’가 가능한 편이다.


한 때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거론됐던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가 1970년 11월 육자대 동부방면 총감부를 장악하고 총감을 감금한 채 ‘황군(黃軍) 총궐기’를 촉구하자 이를 거부할 정도로 구 일본군과 거리를 두고 있다.


이는 과거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일본 육군의 정신교육이 얼마나 ‘지독’했냐면 태평양전쟁 때 정보장교였던 오노다 히로(小野田寬郞)는 종전 후에도 근 30년간 밀림에서 필리핀 루방섬에서 미군, 경찰 등을 상대로 홀로 게릴라전을 펼쳤을 정도다. 그가 종전 사실을 알면서도 귀국하지 않은 이유는 “상부의 복귀명령이 없었기 때문”이다.


육자대와 달리 해상자위대(해자대)는 구 일본군의 ‘정신’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욱일기(旭日旗) 사용은 예사이며 주일(駐日)미군 장병들에게 수시로 A급 전범 합사지인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를 유도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 일부 시민단체, 정당의 ‘욱일기 과민반응’은 찬반논란을 일으키고 있지만 해자대가 ‘과거의 영광’을 노린다는 건 사실이라는 게 중론이다.


내각도 해자대 눈치를 크게 보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일부의 인식과는 달리 ‘제국주의’와는 일정 거리를 두고 있다. 자민당 지지층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근혜정부 때 위안부합의에 나서고 배상금을 추가지급하기로 한 게 대표적 사례다.


아베 총리를 정확히 정의하자면 ‘제국주의’의 표를 먹고 사는 ‘정치인’에 불과하지만 여론 지지를 얻는 해자대를 무시할 수 없어 야스쿠니신사 공물 납부 등에 나서고 있다. 근래에는 오랜 검토 끝에 해자대 헬기모함, 강습상륙함에 실릴 F-35B 스텔스전투기 도입을 결정하기도 했다. 헬기모함 등에 수직이착륙이 가능한 F-35B가 실릴 경우 곧바로 ‘항공모함’ 전환이 가능하다. ‘보통국가’ ‘정규군’이라는 해자대의 꿈이 실현되는 셈이다.


그러나 구 일본군의 사례에서 보듯 정치·외교감각이 결여된 군사조직의 폭주는 국가에 큰 위기를 불러온다. 실제로 일본 정치권에서도 문민(文民)통제에 적신호가 켜진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올해 4월9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는 “자위대에 대한 문민통제가 되지 않는 것 아니냐”는 질책이 나왔다. 아베 총리는 “깊이 사죄한다. 신뢰회복을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고 사실상 ‘시인’했다.


자위대의 ‘정치인 무시’ 사례도 있다. 예산위 소집으로부터 불과 며칠 뒤인 4월16일에는 30대 자위관이 고니시 히로유키(小西博之) 의원에게 “바보냐” 등 폭언을 퍼붓는 희대의 사건이 벌어졌다. 앞서 이라크에 평화유지군(PKO)으로 파병된 부대가 일일활동보고서를 정부에 보고하지 않는 ‘항명’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해자대 전력이 우리 해군의 그것을 웃도는 것은 많은 군사전문가들이 인정하는 진실이다. 일본은 심지어 ‘잠재적 핵 보유국’이기도 하다. 그러나 손자병법은 시계(始計)편에서 전쟁 승리의 필수조건으로 ‘지도자의 능력(一曰道)’ ‘국가 법령과 조직체계(法令孰行)’ 등을 꼽고 있다. 이를 어길 시 나타나는 부작용은 앞서 언급한 구 일본군이 잘 보여주고 있다.


손자병법이 ‘아트 오브 워(Art of war)’라는 이름으로 미국 장성들에게까지 필독서로 읽혀지는 ‘전쟁의 경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자위대는 오늘날에도 ‘당나라군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손자병법의 가르침은 비단 일본뿐만 아니라 ‘주적(主敵)’ 북한과 관련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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