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에서 ‘정복자’로… 오늘날 ‘슈퍼파워’에게 주는 제국의 교훈

▲ 런던의 명물 빅벤(Big Ben)을 배경으로 펄럭이는 유니언 잭(Union Jack).


[투데이코리아=오주한 기자] 영국과의 홍콩 반환 협상을 현장에서 이끌었던 전직 중국 외교관 커화(柯華)가 103세를 일기로 지난 1일 사망했다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 중화권 언론들이 최근 일제히 보도했다.


1997년 7월1일 단행된 중국으로의 홍콩 반환은 ‘대영제국(大英帝國. the British Empire)’의 종말을 고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영국은 1839~1842년 청(靑)나라와의 아편전쟁에서 승리해 난징(南京)조약을 맺고 중국시장 장악을 위해 홍콩을 할양받았다. 당시 시골어촌 수준이었던 홍콩은 영국 지배 하에 성장을 거듭하면서 다민족이 거주하는 아시아 금융중심지로 성장했다. 그러나 영국은 덩샤오핑(鄧小平)의 흑묘백묘(黑猫白猫. 중국식 개혁개방) 앞에 중국 경제가 무섭게 성장하자 조차기간 연장을 포기하고 반환에 전격합의했다.


155년만에 중국에 돌아온 홍콩을 두고 중국은 당초 일국양제(一國兩制. 한 국가 두 체제)를 통한 자치를 약속했다. 1984년 ‘영중(英中) 공동선언’을 통해 이는 명문화됐으나 중국은 근래 들어 홍콩 행정부, 입법부를 친중(親中)파로 채워넣으면서 ‘합병’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Great Britain no time to lose)”로 불리며 미국 이전에 글로벌 슈퍼파워를 과시했던 대영제국. 본 기획에서는 커화의 사망으로 재주목받고 있는 대영제국 일출(日出)·일몰(日沒) 사이의 400년 역사를 들여다보도록 한다.


▲ 다신교(多神敎)를 믿은 켈트(Celts)족이 세운 스톤헨지(Stonehenge).


‘변방 중의 변방’


섬나라인 영국은 본시 유럽에서도 ‘변두리 중의 변두리’ 지역이었다.


선사시대 크로마뇽(Cro-Magnon)인들이 살던 브리튼(Britain)섬에서는 빙하기 때 인적이 사라졌으나 기원전 1만1000년 무렵 빙하기가 끝나 기후가 따뜻해지자 대륙으로부터의 이주가 이뤄졌다. 기원전 6000~5000년경 해수면 상승으로 섬이 돼 고립되자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으며 기원전 2000년께 비커(Beaker)족이 도버해협을 건너 와 인도유럽어를 정착시켰다.


이후에는 켈트(Celts)족이 등장해 드루이드(Druid) 등 독특한 문명을 이룩했다. 켈트문화가 훗날 영국에 끼친 영향은 지대해 중세 서사시 ‘아서왕(King Arthur) 이야기’도 켈트전설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 작품에는 ‘모건 르 페이(Morgan le Fay)’ ‘멀린(Merlin)’ 등 켈트식 인명이 등장한다.


변방지역이었던 브리튼섬이 고도의 문명과 접촉한 건 기원전 58~51년 벌어진 ‘갈리아(Galia) 전쟁’이다.


고대 로마(Rome)의 명장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는 기원전 56년 2개 군단을 이끌고 섬에 상륙해 정주민 군대를 격파했다. 이들은 정복자에 대한 충성을 약속했으나 어기기 일쑤였고 결국 클라우디우스(Claudius) 황제가 친히 5만 병력을 이끌고 친정(親征)함에 따라 로마에 완전히 복속됐다. 약 300년 간의 식민지배 기간 이룩된 ‘로만-브리튼(Roman Britain) 문화’ 잔재는 오늘날 맨체스터, 윈체스터 등 지명에 아직 남아 있다.


오늘날 영국의 주류민족인 앵글로색슨(Anglo-Saxon)족이 섬에 들어온 건 서기 5세기다. 이들은 켈트족, 픽트(Picts)족, 스코트(Scot)족 등 여러 민족과 영토전쟁을 벌였으며 7세기 경 승리함에 따라 지배층으로 자리매김한다. 다만 다수 부족들이 통일적으로 침공한 건 아니라서 각지에 각자의 국가를 세움에 따라 영국판 전국시대(戰國時代)인 ‘7왕국 시대’가 열린다. 아서왕도 앵글로색슨과의 전쟁에 나선 켈트족 영웅이 모티브인 것으로 알려진다.


8~9세기 바이킹(Viking)족 침략, 10세기 ‘통일 잉글랜드’ 수립, 11세기 북방 데인(Danes)족과 노르만(Norman)족 지배 등 파란만장한 역사를 겪은 영국은 17세기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을 통해 민주주의의 단초를 마련한다. 명예혁명은 의회가 왕을 몰아내고 그의 딸을 새 군주로 옹립한 사건이다.


18세기 초에는 스코틀랜드 왕국과 연합왕국을 이뤄 ‘그레이트 브리튼(Great Britain)’을, 19세기 초에는 아일랜드를 합병해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Great Britain Ireland)’를 건설했다. ‘대영제국’이 형성된 것은 바로 이 무렵이다.


▲ 박해를 피해 신대륙에 정착한 청교도를 그린 삽화.


식민지에서 ‘정복자’로


대영제국은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Ⅰ) 치세인 1584년 영국 함대가 지금의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州)에 로어노크(Roanoke)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첫 발을 내딛었다.


이곳에 정착한 개척자들은 모두 실종돼(현지 인디언 부족에 흡수됐다는 가설이 있다) 첫 식민지는 실패로 끝났지만 17세기 초부터 북미, 카리브해 도서지역에 식민지를 동시다발적으로 세우고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를 설립하면서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영국의 북미 지배는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잇따라 승리하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1620년에는 미국 역사의 시발점(始發點)이라 할 수 있는 플리머스(Plymoyth) 식민지가 설치됐다.


영국이 북미에만 눈독을 들인 건 아니었다. 16세기 말에는 대항해시대 선두주자로서 아시아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네덜란드에 본격적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중국풍 예술인 ‘시누아즈리(Chinoiserie)’와 후추 등 향신료가 선풍적 인기를 끌던 유럽의 제1무역시장은 단연 명(明)나라, 청(靑)나라, 인도가 있는 아시아였다. 영국은 17~18세기에 걸쳐 4차례 벌어진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대중(對中) 수출입 시장을 독점하려 했다. 18세기 중반에는 프랑스 동인도회사와 싸워 인도를 지배하려 했다.


프랑스와의 교전은 대승으로 끝나 영국 동인도회사는 1857년까지 인도를 다스리게 된다. 인도는 동인도회사 지배기 이후에도 1947년까지 영국 식민지가 됐으며 빅토리아(Victoria) 여왕은 1876년 무굴(Mugul) 황제가 퇴위하자 스스로 인도 황위에 올라 ‘인도의 여제(Empress of India)’를 자칭했다.


유럽에서는 제 아무리 강대국이라 해도 로마제국으로부터의 정통성을 인정받아야 황권(皇權)을 주장할 수 있으며 교황승인도 받아야 한다. 영국은 신(新)교도 국가였기에 인도 황위를 영국 여왕이 물려받는 편법을 쓴 것이다.


대영제국이 항상 승승장구했던 건 아니다. 1783년 미국이 독립해버린 것이다. 본국(本國)과 북미 13개 식민지 간 갈등은 18세기 중후반에 이미 표면화되고 있었다. 영국은 식민지인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으며 급기야 1773년 일부 식민지인들이 본국으로부터의 차(茶) 수입을 막기 위한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을 일으켰다.


선박에 실린 차 상자들을 무단으로 바다에 내다버린 이 사건은 왕권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영국은 식민지인들의 “대표 없이는 과세도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ve)” 요구를 완전히 묵살해버렸다. 결국 1775년 미국독립전쟁이 벌어졌지만 오합지졸 민병대를 상대로 당초 승기를 잡았던 레드코트(Red coat. 영국 정규군)는 프랑스 개입 등 영향으로 패해 1783년 미국을 포기하게 된다.


▲ 오늘날에도 현존하는 레드코트(Red coat). 고전적 복장을 하고 불펍(Bullpup) 방식 자동소총을 들고 있는 게 이색적이다.


제국확장의 선봉, 레드코트


레드코트는 군(軍) 현대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군대다. 빨간색 군복을 입었다고 해서 레드코트라는 별칭이 붙여진 영국군의 정식명칭은 ‘여왕 폐하의 군대(Her Majesty's Armed Forces)’다. 최고지휘관은 오늘날까지도 왕이다. 다만 명예혁명으로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Kings reign but do not govern)”는 입헌군주제 개념을 처음 정립한 특성상 영국왕에게 실권은 없다.


레드코트는 본국의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훈련’에만 몰두한 첫 근대적 군대다. 동시대까지만 해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평시에 농민이었던 백성을 전시(戰時)에 징집해 군대를 급조하는 행태가 극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이었다. 자연히 제대로 된 훈련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상비군 제도를 도입함은 물론 ‘실탄 사격훈련’ 등을 집중실시했다. 당시 화약, 부싯돌은 고가의 재료였으며 이같은 실탄훈련은 ‘쇼 미 더 머니’ 원조인 대영제국이었기에 가능했다.


훈련의 효과는 확실해서 당시 소화기(小火器)의 극악한 명중률, 조작성에도 불구하고 레드코트는 타국 군대가 1발 발사할 때 2~3발을 퍼부어 상당수 맞힐 수 있었다. 빈약한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 유럽 각 군이 짰던 전열보병(戰列步兵. 촘촘히 밀집한 보병) 진형에서 이는 치명적이었다. 더구나 통상 3열 횡대였던 타국 군대와 달리 레드코트는 ‘씬 레드 라인(Thin red line)’이라 불리는 2열 진형을 갖추고 때로는 두 개 열이 동시사격하기도 했다.


뿐만아니라 영국군은 오늘날 해병대의 원조가 되는 해군육전대(Marine corps)를 사실상 처음으로 정식운용했다. 많은 나라는 교전 발생 시 돛대, 갑판 등을 담당하던 수병(水兵)들에게 무기를 쥐어주고 백병전으로 몰아넣기 일쑤였다. 반면 대영제국은 함상백병전, 상륙전 등에 특화된 해군육전대를 따로 편성했다.


사실 대영제국 건설의 일등주역은 바로 이들이었다. 해군육전대는 자국 해군의 제해권(制海權)을 바탕으로 적진에 진입해 수도에 유니언잭(Union Jack. 영국 국기)을 꽂았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도 실은 이들의 “한 번 뱃놈은 영원한 뱃놈(Once a Marine, Always a Marine)”에서 나온 것이다.


▲ 대영제국 최대 판도(분홍색 지역).


제국의 황혼(黃昏)


대영제국 전성기는 산업혁명 시기와 맞물리는 19세기 초~20세기 초다. “내 사전에 실패는 없다”고 호언하던 ‘숙적’ 나폴레옹 1세(Napoleon I)마저 워털루(Waterloo) 전투, 트라팔가르(Trafalgar) 해전 등에서 격파한 대영제국은 레드코트를 앞세워 ‘오대양 육대주’로 뻗어나갔다. 이른바 ‘팍스 브리태니카(Pax Britanica)’ 시대다.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한 1901년 무렵 대영제국 영토는 전체 지표면적의 20%에 달하는 3천550만㎢, 인구는 전세계 4분의 1에 해당하는 4억2000만명에 이르렀다. 영국 식민지 어디에서나 태양을 볼 수 있다는 의미의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수식어도 이같은 엄청난 스케일에서 비롯됐다.


대영제국의 역대 주요 식민지 리스트 길이는 어마어마하다. △동아시아 홍콩, 중국 남부 △동남아시아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남아시아 인도, 스리랑카, 네팔, 몰디브, 부탄 △중동 팔레스타인, 요르단, 이라크, 오만, 카타르, 키프로스, 예멘,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오세아니아 호주, 뉴질랜드, 파푸아뉴기니, 피지, 솔로몬제도, 키리바시, 투발루, 바누아투 △북미 미국, 캐나다 △중미 벨리즈, 자메이카, 도미니카연방, 바베이도스, 바하마, 트리니다드 토바고, 세인트 빈센트 그레나딘, 세인트 루시아 △남미 가이아나 △아프리카 이집트, 나이지리아, 남아공, 짐바브웨(舊 로디지아), 수단, 케냐, 우간다, 가나, 감비아, 시에라리온, 보츠와나, 레소토, 스와질란드, 잠비아, 말라위, 모리셔스, 세이셸 △유럽 아일랜드, 몰타, 지브롤터, 그리스 일부 등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주요 동서(東西) 무역로로 기능하는 수에즈(Suez)운하도 1882년 영국이 장악했다. 운하를 장악한다는 건 지금도 ‘패권’의 상징이 된다. 대영제국의 바통을 이어받은 ‘제2의 슈퍼파워’ 미국이 파나마(Panama)운하 영향력을 포기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원히 지구촌의 패자(覇者)로 군림할 것 같았던 대영제국도 그러나 ‘해질 날’을 맞고 만다.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 때에도 영국은 독일제국 식민지였던 요르단, 잔지바르 및 오스만제국(Osman Empire) 지배 하의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흡수하며 덩치를 불려나갔다. 하지만 속된 말로 ‘통수’가 발목을 잡았다. 영국은 당초 독립을 조건으로 인도를 전쟁에 끌어들였지만 종전 후에는 ‘입 닦고’ 없었던 일로 한다. 인도 전역에서는 거센 독립운동이 벌어졌으며 진압과정에서 대영제국은 국력을 크게 소진한다.


설상가상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왕국’ 일원이었던 아일랜드마저 치열한 투쟁을 거쳐 1921년 켈트족의 나라를 세우고 독립(북아일랜드 제외)하고 만다.


연합왕국 구성 후 영국은 아일랜드에서 생산된 곡물을 모조리 수탈하고 대신 ‘돼지사료’ 쯤으로 인식되던 감자 섭취를 아일랜드인들에게 강요했다. 게다가 역병이 돌아 감자가 모두 말라죽자 그나마도 먹을 게 없어 결국 1845~1852년 ‘아일랜드 대기근(Great Famine)’이 발생해 ‘100만명’이 ‘굶어죽는’ 참극이 벌어졌다. 아사(餓死), 이민 등으로 이 때 감소한 아일랜드 인구는 전체의 20~25%에 달한다. 때문에 지금도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인이라면 ‘이’를 갈고 있다.


대영제국 해체가 본격화된 건 제2차 세계대전 때이다. 유럽 각 국이 나치독일에 점령된 상태에서 영국도 맹렬한 공습에 노출된다. 당초 식민지들과 본국 간 관계는 크게 나쁘지 않았다. 애증(愛憎)관계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때문에 인도, 아일랜드 등 소수를 제외한 모든 식민지가 영국을 도와 전쟁에 참전했다.


호주도 마찬가지였지만 과거 영국이 호주인들을 중동에서 혹사시킨 점이 여론 반대를 불러왔다. 급기야 로버트 멘지스(Robert Menzies) 총리 후임은 유럽전선으로 향하는 대신 일본에 대한 독자 선전포고를 내놨으며 영국, 호주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됐다. 1941년 존 커틴(John Curtin) 총리는 미국 정상과의 전화회담에서 “우리는 더 이상 영국 이익을 우리 이익보다 우선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인도, 아일랜드, 호주의 유럽전선 불참은 대영제국 위상이 더 이상 과거와 같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나치독일과의 전쟁에서 식민지들에 대한 영국 통치력은 급속도로 약화됐다. 1941년 일본과 싸운 말레이해전에서의 동양함대(East Asia Squadron) 궤멸은 제국군의 몰락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급기야 전쟁이 끝나자마자 식민지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잇따라 독립에 나섰다.


1947년 8월 인도 독립을 시작으로 이듬해 팔레스타인이 식민지배 청산에 나섰다. 1952년에는 수에즈운하 소재지인 이집트를 비롯한 중동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했다. 이같은 ‘독립 릴레이’에 동참한 나라는 50여개국이다. 영국은 1997년 홍콩 반환으로 마지막 식민지를 잃고 대영제국 시대에 쓸쓸이 이별을 고한다.


▲ 지난 2013년 런던에서 영연방(Commonwealth of Nations) 헌장에 서명하는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


대영제국과 글로벌사회의 인과(因果)관계


과거의 찬란했던 영광을 상실한 영국이지만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고 여전히 전세계에 끼치는 영향력은 적지 않다.


경제대국 선두자리는 ‘식민지’ 미국에게 내주고 중국, 일본, 독일에게까지 밀려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 자료 기준으로 작년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5위(2조6200억 달러)에 불과하다. 게다가 ‘식민지’ 인도에게마저 바짝 추격당하는 신세이지만 대영제국은 ‘영(英)연방’이라는 이름으로 존속하고 있다.


작년 기준으로 영연방 회원국은 52개국에 달한다. 대부분이 대영제국 식민지 출신 국가들로써 무섭게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는 인도,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도 여기에 포함된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는 지금도 영국 여왕을 ‘국가원수’로 떠받들면서 총독 부임을 형식적이지만 허용하고 있다. 영국 식민지배를 받은 적 없는 소말릴란드 등 국가들도 ‘자발적으로’ 영연방 가입을 시도하고 있다.


이같은 네트워크 형성 배경에는 무시할 수 없는 영국의 군사·외교적 파워가 있다. 영국은 미국, 중국, 프랑스, 러시아와 함께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을 구성하고 있다.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유엔안보리는 실질적으로 국제사회를 좌지우지하는 초월적 기구다. 이들 5개국은 모두 갯수 면에서 세계 1~5위 수준의 ‘핵탄두 보유국’이기도 하다. 회원국들은 또 ‘대영제국 출신’이라는 ‘동질감’을 매개체로 서로 협력하고 있다.


여러 식민지들에서 드러난 각종 폐해에서 보듯 대영제국이 항상 ‘정의’였던 건 아니다. 초창기 주요산업은 ‘노예무역’이었다. 물론 노예를 공급하는 ‘도매상’은 아프리카 각 왕국 귀족, 중동상인들이었지만 이를 ‘세계적 산업’으로 키운 건 영국이라는 점에서 비난의 화살이 몰리고 있다. 노예산업 외에도 다른 식민지들에서는 인도 세포이(Sepoy) 항쟁 등으로 이어진 대규모 착취가 이뤄졌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의 희생은 어마어마했으며 이는 대영제국 몰락으로 직결됐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대영제국 형성이 20세기 글로벌사회 토대가 됐다는 점은 많은 학자들이 부인하지 않는다.


‘식민지 건설→식민지 간 네트워크 형성→식민지 독립→식민지로의 선진기술 이전→식민지 간 교역→각 국 상호의존 심화’라는 과정이 없었다면 오늘날 지구촌은 국가 단위의 빈익빈부익부(貧益貧富益富) 현상이 두드러져 극소수 슈퍼파워들의 ‘독점’이 재앙을 낳았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단적인 사례가 인도 등 비동맹(Nonaligned) 국가들의 단교 경고로 무산된 소련의 대미(對美) 핵공격 시도(쿠바 미사일 사태)다. 만약 인도가 소련에 제동을 걸 만큼 국력이 있지 않았다면 전세계는 1960년대에 이미 소련의 아집으로 인해 핵전쟁으로 멸망했을 것이라는 게 공통된 시각이다.


혹자에게는 추억으로, 혹자에게는 악몽으로 남은 두 얼굴의 대영제국. 400년 간 인류에게 ‘애증’의 존재가 된 대영제국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지 오늘날의 ‘슈퍼파워’들은 곰곰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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