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역덕’ 상상력 자극한 ‘장궁 vs 궁기(弓騎)’ 대결… 2차 대전 땐 ‘미친 잭’ 주력병기로도

▲ 국궁(國弓)을 체험 중인 외국인 학생과 시민들.


[투데이코리아=오주한 기자] 맹추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전통무예로 심신(心身)을 단련하기 위한 이색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서울 종로구 종로문화재단이 이달 19일과 26일 황학정 내 국궁(國弓)전시관에서 개최하는 어린이 겨울방학 전통무예체험프로그램 ‘활, 활개치다’가 그것이다.


행사는 △국궁 교육 △각궁(角弓) 얹기 및 죽시(竹矢) 굽기 시연 △활 만들기 △활쏘기 등으로 진행된다. 세계 각 국의 활과 우리 전통 활의 차이점을 짚어보고 지역에 따라 변화한 활 문화를 알아보는 시간도 마련된다.


알려지다시피 우리 한민족은 ‘활의 민족’이다. 부여계 북방국가인 부여, 고구려 등은 기마궁사를 대량운용했다. 중국 고대기록에도 동북방 민족은 활을 매우 잘 쏜다는 내용이 있다. 궁술은 ‘궁신(弓神)’ 이성계가 세운 조선시대 들어서는 ‘국민 스포츠’로 발돋움해 국가차원에서 백성들에게 활쏘기를 장려했다. 구한말 사진들 속에서는 여성이 활을 당기는 모습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동아시아 궁술은 대체로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서양의 그것은 아직 베일에 싸인 점이 많다. 본 기획에서는 종로문화재단 행사에 앞서 서양의 활, 그 중에서도 영국 ‘장궁(長弓. Longbow)’의 역사에 대해 알아본다.


▲ ‘상남자’의 포스 풀풀 풍기며 장궁을 당기고 있는 러셀 크로우(사진=영화 ‘로빈후드’ 中).


말 그대로 ‘등골’이 휘어진다


영국 장궁(이하 장궁)은 말 그대로 ‘길다란 활’이다. ‘잉글리시 롱보우(English Longbow)’로도 일컬어진다. 중세 유럽에서는 본시 궁수(弓手)를 천시하는 분위기가 만연했으나 유독 영국만은 활잡이들을 군사력의 중핵으로 육성했다. 때문에 ‘로빈후드(Robin Hood)’ 등 활을 잘 쏘는 영웅을 다룬 전설도 있을 정도다.


장궁은 웨일즈(Wales)에서 유래됐다. 13세기 영국왕이었던 에드워드 1세(Edward Ⅰ)는 웨일즈 정벌 과정에서 장궁에서 발사된 화살이 철갑옷을 그대로 꿰뚫는 장면을 목격하고 장궁을 자국 주력무기로 채택했다.


1545년 침몰해 1982년 인양된 군함 메리로즈(Mary Rose)호에서는 다량의 장궁 유물이 출토됐는데 가장 긴 것의 경우 길이가 2m를 넘어섰다. 대체로 주목(朱木)나무로 제작됐으며 화살 길이는 80cm 안팎에 달했다.


가장 충격적인 건 중세 장궁 그대로 재현해 사람이 직접 당겨본 결과 평균 장력(張力)이 약 ‘68kg’인 것으로 드러난 점이다. 쉽게 말해 평균체중(72.7kg)의 한국 성인남성 한 명을 가뿐히 들 수 있는 힘을 가져야만 장궁을 당길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건 ‘전쟁용 무기’다. 적을 죽이기 위해 화살을 비오듯 퍼붓기 위해서는 성인남성을 ‘쉴 새 없이’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근력이 있어야 한다는 걸 뜻한다.


미디어에서는 흔히 활이 ‘여성적인’ 무기로 그려지기 일쑤다. 각종 영화, 온라인 PC게임에서 남성 캐릭터는 대체로 검, 창, 도끼 등 근접무기를 사용하고 여성 캐릭터는 화살을 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활은 실상 상당한 힘을 필요로 하는 무기다.


중세 장궁병 유골을 살펴본 결과 상체골격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변형된 점이 확인된 바 있다. 동양에서도 삼국지(三國志) 등 역사기록물에서는 명궁(名弓)을 두고 ‘원숭이 같은 팔’로 표현하고 있다. 대표적 인물이 후한(後漢) 말 손책(孫策) 휘하 장수였던 태사자(太史慈)와 전한(前漢)의 ‘비장군(飛將軍)’ 이광(李廣)이다.


‘원숭이 팔’을 두고 과거에는 그저 신체적으로 뛰어난 사람을 일컫는 수식어 쯤으로 여겨졌으나 현대 들어서는 신체가 ‘왜곡될’ 정도로 ‘강한 활’을 무수히 당겼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비슷한 사례가 오늘날 프로야구 투수로써 이들은 쉴 새 없이 공을 던진 탓에 한쪽 팔이 길어지는 신체변형이 종종 발생한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이 활을 전혀 다룰 수 없다는 건 아니다. 상술한대로 구한말에는 다수 여성들이 활쏘기를 즐겼다. 고대 그리스 전설에는 활로 무장한 여성무사 집단인 아마조네스(Amazones. 단수형은 아마존)가 등장한다. 그녀들은 신분이 높을 경우 활을 쏘기 위해 오른쪽 가슴을 잘라내고 낮을 경우 방패를 들기 위해 왼쪽 가슴을 잘라냈다고 한다.


평균적 근력에서 여성, 남성 간 차이가 있다는 것이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는 옳지 않다. 한국의 자랑인 장미란 선수 등 웬만한 남성의 힘을 상회하는 여성도 얼마든지 있다.


▲ 고전적인 복장을 한 채 장궁을 당기고 있는 여성.


누가 그들을 비겁하다 했나


영국의 분위기도 조선과 비슷해 젠트리(Gentry. 향신), 요먼(Yeoman. 중산층 농민) 등 각계각층에게 활쏘기를 장려했다. 다만 조선과 다른 점이 있다면 다른 오락거리를 ‘말살’하면서까지 궁술 익히기를 강요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장궁병이 두각을 드러낸 전쟁은 14~15세기 영국과 프랑스가 맞붙은 ‘백년전쟁(Hundred Years' War)’이다.


1346년 영국군이 노르망디(Normandie)에 상륙함에 따라 벌어진 ‘크레시(Crecy) 전투’에서 장궁병은 프랑스 중갑기사단을 말 그대로 ‘도륙’했다. 프랑스군은 ‘비겁한 무기’인 활을 잡는 대신 ‘야만인’ 제노바 쇠뇌병(Genoese Crossbowman)을 용병으로 고용해 지원사격을 하도록 했지만 사거리, 파괴력에서 장궁병에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기에 이들은 가볍게 박살나고 만다.


‘진노한’ 프랑스 기사단은 그대로 장궁병을 향해 돌격했지만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화살을 피해 병력이 중앙으로 몰린데다 설상가상 비까지 내려 땅이 온통 진흙탕이 된 와중에 기사단은 몇발짝 내딛지도 못하고 혼란에 빠졌으며 장궁병은 이들을 상대로 ‘사냥’에 나섰다. 어렵사리 적진까지 접근한 기사들도 장애물에 진로가 막힌 채 화살세례를 받았다. 이 전투에서 무려 프랑스 왕이 중상을 입었으며 왕의 동생은 아예 전사해버렸다.


크레시 전투에서 뼈저린 교훈을 얻었을법도 하건만 프랑스군은 수십년 뒤인 1415년 벌어진 ‘아쟁쿠르(Agincourt) 전투’에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물론 프랑스 기사단이 속된 말로 ‘닥치고 돌격’만 고집한 건 아니라서 갑옷 강화, 하마(下馬) 후 진격 등 나름의 대책을 세우긴 세웠다. 말에서 내려 전진할 경우 신나게 달리다가 화살에 고슴도치가 된 말 등에서 떨어져 허우적거리는 꼴 사나운 상황은 적어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영국군도 바보는 아니었으며 프랑스 특유의 기사도(Chivalry)가 또 한 번 발목을 잡았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기사단은 화살비 앞에 진형이 흐트러졌으며 분노를 참지 못하고 항명하면서까지 ‘닥돌’에 나선 결과 지형지물에 걸려 버둥거리다 학살당하는 운명을 맞았다. 한 술 더 떠서 장궁병들은 두꺼운 갑옷 탓에 가까스로 치명상은 피한 기사들을 확실히 처치하기 위해 ‘도끼’ ‘망치’를 들고서 ‘백병전’에 나섰으며 이마저도 승리의 여신은 영국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아쟁쿠르 전투는 장궁병들이 단순히 활만 잘 쏘는 게 아니라 강한 활을 수시로 당기는 과정에서 남다른 ‘힘’도 얻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썩어도 준치’라고 아무리 혼란에 빠진 프랑스 기사단이라 해도 백병전, 각개전투에서만큼은 도가 튼 ‘선수’들이었다. 그런 기사단을 장궁병들은 유럽 기준에서 ‘정정당당히’ 압도해버린 셈이다.


이같은 ‘전투력’의 장궁병이었기에 백년전쟁에 앞서 벌어진 몽골제국과 유럽연합군 간의 ‘레그니차(Legnica) 전투’에 만약 장궁병이 투입됐다면 결과가 어떠했을까 하는 ‘if’가 적잖은 역사학자, ‘덕후(매니아를 일컫는 신조어)’ 사이에서 끊임없이 궁금증을 일으켜왔다.


알려지다시피 유럽연합군의 패배는 근거리무기와 원거리무기 간의 압도적인 사거리 차이에서 기인했다. 유럽 기사단은 달아나는 몽골 궁기병을 잡기 위해 쫓아가다가 말 등에서 몸을 돌려 화살을 난사하는 ‘파르티안 샷(Parthian Shot)’에 전멸당했다. 그러나 장궁병은 진지를 구축한 채 굳건히 지키면서 달아나는 궁기병 등에 화살을 꽂아넣을 수 있다. 승패를 가리지 못해 안달이 나 진지에 접근하다가 고슴도치가 되는 건 도리어 몽골군이 될 수 있었다.


다만 서방원정 당시의 몽골군은 더 이상 북방초원에서 늑대나 때려잡던 ‘야만인’이 아닌 송(宋)나라, 중동 각 국의 선진 공성(攻城)기술을 익힌 ‘정예부대’였기에 결과를 섣불리 예단할 수는 없다. 상상은 그저 상상일 뿐.


▲ ‘마지막 스코틀랜드 전사’ 잭 처칠(Jack Churchill). 왼쪽부터 평상시 모습, 장궁을 당기는 모습, ‘검’을 들고 상륙하는 모습.


장궁, 20세기 나치독일 졸병을 쓰러뜨리다


여느 나라의 활이 그렇듯 장궁도 ‘화기(火器)’가 등장하면서 사장되기 시작했다.


현란한 병법(兵法)이고 뭐고 어떤 진형이든 ‘박살’낼 수 있었던 총과 대포의 등장은 그 이전까지 동서양에 존재했던 모든 전술들을 일거에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인류는 소총병과 장창병이 공방(攻防)을 분담하는 테르시오(Tercio) 방진, 전열보병, 참호전 등 수백년에 걸쳐 피로 얻어낸 교훈 끝에 현대적 군사교리를 새롭게 완성했다.


그런데 기관총과 전투기, 항공모함이 난무하다가 급기야 핵무기까지 등장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장궁’으로 무장한 채 나치독일 국방군에 돌격한 ‘용자’가 있다. 영국 육군 코만도(Commando) 여단 소속으로 복무하다 중령으로 예편한 잭 처칠(Jack Churchill)이라는 인물이 주인공이다.


그는 동료들이 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전투를 치를 때 홀로 ‘웨일즈 활’과 ‘스코틀랜드 클레이모어(Claymore. 장검)’를 들고 싸웠다. ‘싸움꾼 잭’ ‘미치광이 잭’ ‘마지막 하이랜더(Highlander. 15~18세기 스코틀랜드 전사)’ 등 별칭이 붙은 처칠은 “칼이 없는 장교는 모두 복장불량”이라 주장하며 심지어 ‘지상최대의 작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도 칼과 활을 꼬나들고 용맹히 돌격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의 여러 기행은 유명하다. 1939년 프랑스에서 독일 정찰대를 기습할 때는 적군 하나를 활로 쏘아맞히는 것으로 ‘공격신호’를 알렸다. 이로 인해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유일하게 ‘활’로 적군을 ‘무찌른’ 전무후무한 기록을 갖고 있다. 1941년 노르웨이에서는 독일군을 공격하기 전에 백파이프를 열심히 연주했으며 작전 성공의 공로로 무공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근성’도 대단해서 1944년 유고슬라비아에서 백파이프를 신나게 불면서 진격하다가 수류탄에 맞아 기절한 뒤 독일군 포로가 됐으나 ‘제국의 심장부’ 베를린에서 두 차례의 시도 끝에 탈출에 성공해 기어이 자대에 복귀했다.


그런 처칠에게 ‘일생의 꿈’이 있었으니 바로 아시아·태평양 전선에 배치돼 구(舊) 일본군과 ‘검’ ‘활’로 맞붙는 것이었다. 알려지다시피 구 일본군도 발도(拔刀)돌격 등 구식공격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을 근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희망은 일본이 두 번의 원자폭탄 공습 앞에 무조건 항복하면서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처칠은 꿈을 앗아간 ‘양키들’을 두고두고 원망하면서 여생을 보내다 1996년 고향에서 편안히 눈을 감았다.


사족이지만 장궁이 비단 영국에만 있었던 건 아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세 일본 사무라이(侍)들은 일본도(日本刀) 등 근접무기뿐만 아니라 길이 2m 이상의 장궁인 히고유미(弓胎弓) 등 원거리무기도 사용했다. 특유의 길이 때문에 일본 궁술은 활을 위로 높이 들었다가 아래로 내리면서 시위를 당기는 독특한 형태를 보인다. 단궁(短弓)과의 차별화된 사격자세는 영국 장궁에서도 드러난다. 장궁은 조선에서도 비록 의장용이지만 길이 180cm의 예궁(禮弓)으로 존재했다.


한국은 명실상부한 세계 원톱의 양궁(洋弓) 강국이다. ‘2020 도쿄(東京) 올림픽’이 약 1년 앞으로 성큼 다가온 가운데 국제사회의 시선이 다시금 아시아로 쏠리고 있다. 올림픽이라는 세계인의 축제를 맞아 우리 양궁전사들의 활솜씨를 또 한 번 감상하고 세계 각 국의 실력과 비교하는 것도 분명 국민 모두에게 쏠쏠한 재미가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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