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대륙’ 남극서 ‘산 넘고 물 건너’ 써내려간 28人의 전설

▲ 한파에 중무장한 시민들.


[투데이코리아=오주한 기자] 경기 북부, 강원 영서, 경북 북부 내륙 등 일부지역에 한파특보가 발효됐다. 잠시 누그러진듯 했던 추위가 다시 몰려올 것이라는 소식에 많은 시민들이 방한(防寒)을 서두르고 있다.


2010년대 들어 ‘소(小)빙하기’를 연상케하는 기온이 매년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12년 12월11일 중부지역 기온은 영하 22도를 기록했다. 작년 1월에도 철원에는 영하 22도의 한파가 몰아닥쳤다. 16~17일 남극 예상기온이 영하 21~25도인 점을 감안하면 한반도가 온대기후 지역인지 한대기후 지역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다.


시민들이 저마다 두꺼운 옷깃으로 몸을 꽁꽁 싸매고 “이불 밖은 위험해”를 외치는 가운데 약 100년 전 남극에서 ‘조각배’를 타고 거친 바다에 몸을 던지는 것도 모자라 첩첩산중을 넘어가면서까지 끝끝내 동료들을 구조했던 ‘용자’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비록 이 사나이의 여정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는 2002년 BBC방송이 선정한 ‘위대한 영국인’에서 쟁쟁한 인물들을 제치고 11위를 기록할 정도로 오늘날에도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1위는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25위는 세기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이들 틈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그 사람, ‘어니스트 섀클턴(Ernest Henry Shackleton. 1874~1922)’. 본 기획에서는 ‘위대한 실패자’라는 수식어와 함께 “죽은 사자보다는 산 당나귀가 낫다(Better a live donkey than a dead lion)”는 명언을 남긴 섀클턴의 일대기를 살펴보도록 한다.


▲ 세종과학기지를 덮친 블리자드(Blizzard).


제 발로 ‘지옥’에 간 ‘용자’들


남극(南極. Antarctica). 남위 66도 33분 이남에 위치한 면적 1천400만㎢(한반도의 약 60배)의 대륙이다. 지표면에서 남극대륙이 차지하는 비율은 9.3%에 달한다. 블리자드(Blizzard. 눈보라)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혹독한 기후의 땅으로 현행법상 한국인의 남극 출입은 금지되고 있다. 예외라면 세종과학기지 등 남극기지 근무자들 정도.


남극의 기온은 ‘지옥’ 그 자체다. 2005년 남극 일본기지 인근 기온은 무려 ‘영하 93.2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같은 악조건 때문에 남극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는 황제펭귄 등 극소수다. 온몸을 ‘지방’으로 무장해 푹신푹신한 외모의 펭귄들마저 한파가 찾아오면 밀집대형을 이루고 서로의 체온으로 겨우 버틴다.


남극대륙이 처음 인간에게 발견된 건 19세기 초다. 1819년 영국은 선박 한 척을 남쪽으로 보내 새로운 모피용 바다표범 생산지를 찾도록 한다. 이듬해 러시아도 두 척의 배를 남하시켰으며 영국, 러시아는 서로 남극대륙을 먼저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신비에 싸인 이 설국(雪國)의 소문은 많은 탐험가들을 호기심으로 이끌었다. 첫 발견으로부터 약 100년이 지난 1911년 12월14일 노르웨이 탐험가 로알 아문센(Roald Amundsen. 1872~1928)이 드디어 최초로 남극점을 정복했으며 그는 ‘전설’로 남았다. 이듬해 1월18일에는 영국의 로버트 스콧(Robert Scott)이 두 번째로 남극점에 도달했다.


남극점은 인류에게 정복됐지만 오늘날의 러시아와 견줄만한 크기의 대륙 곳곳에 뭐가 있는지 몇 번의 왕복만으로 모두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후에도 탐험가들의 남극 방문은 지속적으로 이어졌으며 섀클턴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섀클턴은 1901년 로버트 스콧을 따라 남극으로 향했다. 실패로 끝난 이 여정에서 섀클턴은 건강이 악화돼 본국으로 강제소환됐지만 좌절하지 않고 6년 뒤에는 대장 자격으로 대원들을 이끌고 다시 남쪽으로 이동했다. 이 탐험에서 섀클턴은 남극석탄 발견, 높이 3.7km의 화산섬 에러버스(Erebus)산 정복 등 성과를 거둔다.


모험이 순탄했던 건 아니다. 아직 경험이 부족했던 그는 “개를 데려가라”는 노르웨이인의 조언을 무시하고 조랑말을 끌고 간 탓에 고비를 맞는다. 말이 개보다 덩치가 더 크기에 짐 운반에 적합하다는 논리였지만 개와 달리 땀을 흘리는 말들은 모조리 얼어죽고 말았다. 결국 사람이 손수 짐을 옮겨야만 했으며 식량부족까지 겹쳐 대원들이 탈진한 탓에 남극점 도달은 포기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죽은 사자보다 산 당나귀가 낫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오늘날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권이 경시되던 당시 사회분위기상 많은 탐험대장들은 대원을 ‘소모품’ 취급하기 일쑤였지만 섀클턴은 안전을 무엇보다 우선시했다. 이러한 그의 신념은 후일 발생할 ‘위대한 실패’의 밑바탕이 된다.


▲ 어니스트 섀클턴의 사진.


위기를 맞은 ‘남자의 로망’


남극점 정복에 두 차례 실패한 섀클턴이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1914년 말 인듀어런스(Endurance)호를 이끌고 다시금 남극으로 향한다. 정복과정을 촬영한 사진 소유권을 후원자에게 넘긴다는 조건으로 겨우 배를 마련할 수 있었으며 탐험대 총 인원은 28명.


당시 섀클턴이 신문에 낸 구인광고는 ‘남자의 로망’ 그 자체다. 사진 한 장 없이 단 몇 줄의 글로만 채워진 이 광고의 내용은 “어렵고, 보수도 적고, 혹한의 추위에, 몇달 간 지속되는 어둠에, 계속되는 위험에 안전귀환을 보장하지 못하는 모험. 성공 시 영광과 명예가 기다린다”였다. 놀랍게도 약 5000명의 지원자가 몰려들었으며 그 중 27명이 ‘용자’로 선발됐다.


섀클턴의 광고내용이 ‘씨’가 된 것일까. 그들의 모험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닥친다. 순조롭게 항해하던 배는 1915년 1월20일 돌연 얼음에 갇혀버린다. 표류는 10월27일까지 이어졌으며 섀클턴과 대원들은 얼음이 녹기만을 속절없이 기다렸다.


이 때까지만 해도 사정은 그나마 나았다. 대원들은 난로 앞에 모여 몸을 녹이는 한편 주위에 널린 바다표범, 펭귄 등을 잡아 식사를 해결했다. 약 10달의 기다림 끝에 얼음이 녹기 시작하자 그들은 환호성을 내질렀지만 이는 ‘재앙’의 전주곡이었다. 얼음이 붕괴되면서 선체를 강타해 배를 침몰시켜버린 것이다.


섀클턴은 즉시 하선을 지시했으며 대원들은 보트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도 섀클턴은 후원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전 과정을 빠짐없이 카메라에 담았다. 타국 탐험대 베이스캠프가 있던 남극대륙 북쪽 끝의 폴렛(Paulet)섬으로 향하던 그들은 얼음이 걷잡을 수 없이 갈라지기 시작하자 다른 섬으로 목적지를 바꿨다. 그들은 식량확보를 위해 개 54마리를 전부 잡기도 했다.


이듬해 4월15일 엘리펀트(Elephant)섬에 상륙한 그들은 곧 이곳이 어떠한 환경인지 깨닫게 된다. 그곳은 무인도임은 물론 식량, 장작마저 확보하기 쉽지 않은 험지였다. 그 와중에도 영국인들 답게 ‘홍차’는 챙긴 상태였지만 구조선이 언제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여유있게 홍차나 마시며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때 섀클턴은 ‘위험한 결단’을 내린다. “포경기지가 있는 사우스조지아(South Georgia)섬에 가서 구조대를 데리고 오겠다” 길이가 채 10m도 안 되는 나룻배 한 척에 의지해 남극해를 건너 ‘1천300km’ 거리의 섬으로 이동하겠다는 ‘미친 발상’이었다.


당시 그들이 가진 항해도구는 육분의 등이 전부였다. 가다가 길을 잃고 ‘유령선’이 되기 십상이었다. 게다가 그들과 사우스조지아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드레이크(Drake) 해협은 시속 100km의 강풍, 높이 20m의 파도가 몰아치는 ‘죽음의 바다’였다. 차라리 섬에 남아 버티는 게 나아보일 지경이었지만 ‘상남자의 광고’에 이끌려 자원한 대원들답게 모 카툰의 대사처럼 “훗, 이래야 우리 대장답지”라는 반응이 나왔다.


섀클턴은 제 발로 나선 5명의 대원들과 함께 작은 보트에 의지한 채 노를 저으며 바다로 나아갔다. 차디찬 바닷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 있는 건 두께 수cm의 나무판자가 전부였다.


▲ 동일본대지진 당시 육지를 덮친 쓰나미. 높이 수십cm의 낮은 쓰나미라 해도 유속이 시속 수십~수백km로 매우 빠르기에 사진에서처럼 차량도 떠내려갈 정도로 파괴력이 크다. 게다가 물(水)은 부피 대비 질량이 큰 물질이다. 따라서 물빠짐 등 전조현상 발견 즉시 고지대로 대피해야 한다.


‘남자의 로망’ 물폭탄을 맞다


우주선 ‘인듀어런스호’ 등 섀클턴의 모험에 강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2014년작 헐리웃영화 ‘인터스텔라’에는 ‘어마무시한 파도’가 등장한다.


주인공 일행은 인류의 새 보금자리를 찾기 위해 웜홀을 거쳐 한 미지의 행성에 도착한다. 그곳은 사방천지가 ‘물바다’였으며 우뚝 솟은 산을 향해 걸어가던 일행에게 주인공은 “저건 파도다”라고 경고한다. 높이 수km의 이 파도는 그대로 우주선을 덮치고 일행은 천신만고 끝에 탈출한다.


그런데 이같은 거대파도는 높이만 뺀다면 섀클턴이 겪은 ‘실제 체험’이었다. 그의 일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구름 사이로 틈이 보이자 날씨가 맑아진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저건 구름이 아니라 집채만한 파도의 흰 물마루였다. 26년 동안 바다에서 별 일을 다 겪었지만 이처럼 거대한 파도는 본 적이 없었다”.


수십미터 높이의 쓰나미(つなみ)는 얼핏 생각하면 비현실적이지만 엄연히 실재한다. 바다의 깊이는 보통 수km에 달한다. 이 천문학적 중량을 지탱하고 있던 해저지면이 갑자기 붕괴되면 수km 높이의 바닷물이 일순간에 위아래로 요동치게 된다. 물이 가득 담긴 수조를 어딘가에 올려놓고 받침대를 갑자기 발로 차 버리는 장면을 상상하면 된다.


도쿄(東京)대 지진연구소에 따르면 2011년 3월11일 발생한 동일본대지진 당시 이와테(岩手)현 미야코(宮古)시를 덮친 파도의 높이는 37.9m에 달했다. 진앙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일본 해안으로 밀려오는 과정에서 운동에너지를 대부분 소실했음에도 크기가 이 정도였다. 1896년 메이지산리쿠(明治三陸) 지진 때 관측된 파도 높이도 38.2m였다.


죽음이 코앞에 닥친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지만 섀클턴과 대원들은 ‘기적적으로’ 살아남는다. 배는 뒤집히지 않았으며 대원들도 전원무사했다.


물에 젖은 침낭이 밤이 되자 얼어붙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전원생존’은 ‘기적’이라는 단어 외에는 딱히 설명할 수 없었다. 물론 대원들이 손가락만 빨고 앉아있었던 건 아니라서 파도가 칠 때마다 선체 균형을 잡기 위해 미리 갖고 온 돌을 이리저리 굴리는 수고가 있었다.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오로지 두 다리로만 버티면서, 살갗을 칼로 헤집는 것 같은 한파를 견디고, 손으로는 돌을 굴리는 초인적인 집중력과 체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 섀클턴이 신문에 낸 ‘상남자의 광고’.




‘남자의 로망’ 절벽에서 구르다


갖가지 고행 끝에 대원들은 엘리펀트섬 출항 16일만에 드디어 사우스조지아섬에 상륙해 서로를 부둥켜 안는다. 이렇게 섀클턴의 모험이 해피엔딩으로 끝났냐고? 아니다. 만약 ‘싱겁게’ 끝났다면 섀클턴은 전설이 되지 못했다. 짭짤하다 못해 목이 타들어 갈 정도다.


대원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끝을 알 수 없는 ‘첩첩산중’이었다. 포경기지는 그들이 상륙한 지점과는 정반대편에 있었다. 이제 이들은 도보로 걸어 구조대를 호출하러 가야만 했다. 섀클턴은 시체가 되기 일보직전인 대원 3명을 남겨 캠프를 꾸리도록 하고 나머지 2명만 대동한 채 ‘등산’에 나선다. ‘산 넘고 물 건너’라는 표현은 바로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리라.


직선거리로 33km인 포경기지까지의 루트에는 5~6개의 고산준봉이 있었다. 이 때가지 이곳을 걸어서 횡단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섀클턴과 대원들은 이 무모한 도전에 나서기로 한다. 걷고 또 걷고, 산을 올랐다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등산에서는 빠질 수 없는 ‘최대악몽’도 실현됐다. “이 산이 아닌게벼” 지도 한 장, 나침반 한 개 없었기에 그들은 직감에만 의지한 채 움직였다.


섀클턴과 2명은 이제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그들은 수시로 ‘잠의 유혹’에 빠져들었다. 아직도 그 원인이 규명되지 않고 있는 ‘잠’은 치명적이어서 오랜 시간 눈을 붙이지 못한 병사들이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쟁터 한복판에서 쓰러져 단잠을 잤다는 기록들도 심심찮게 있다. 그러나 섀클턴은 이마저도 의지로 극복한다. 그는 겨우 5분밖에 잠들지 못한 대원들을 깨우면서 “30분 지났다. 가자”고 말하는 등 끊임없이 독려했다. 탈진한 상태에서 혹한의 추위 속에 야외에서 잠들 경우 그대로 얼어죽기 십상이었다.


생각할 의지조차 잃은 채 ‘좀비’처럼 걷고 걷는 강행군이 얼마나 지속됐을까. 그들의 앞에 드디어 포경기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몇 발자국만 가면 따뜻한 난로 앞에서 뜨끈한 홍차를 마시면서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나타난 건 포경기지뿐만이 아니었다. 동시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도 그들 앞에 등장했다.


하지만 대원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이미 죽음의 문턱을 수도 없이 넘나든 그들에게 절벽은 그저 통과해야 할 또 하나의 의례일 뿐이었다. “미끄럼을 타고 내려가자” 섀클턴과 2명은 걸치고 있던 장비로 깔개를 만든 뒤 서로의 몸에 찰싹 붙어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섀클턴이 땅을 박차자 미칠듯한 ‘광란의 질주’가 시작됐다.


사람이 고난에 처하면 헛웃음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들은 도리어 이 상황을 즐겼다. 섀클턴을 끝까지 따른 대원 중 한 명이었던 프랭크 워슬리(Frank Worsley)는 당시의 질주를 이같이 묘사했다. “마치 허공에 던져진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머리털이 곤두섰지만 이내 몸이 달아오르고 내가 웃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흥분해서 고함을 질렀다”.


▲ 섀클턴을 포함한 28인의 대원들 중 일부.


“전원생존”


포경기지 선원들은 처음에는 기지 근처에 출현한 3명을 ‘괴물’ 취급했다. 여지껏 항구 뒤편의 산맥을 가로질러 나타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선원들은 몇 마디 대화 끝에 그들 중 한 명이 그 유명한 섀클턴임을 알았으며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를 표했다. 선원들은 섀클턴에게 제1차 세계대전이 확전돼 수백만명이 죽어나가고 있다는 외부소식도 알려준다.


기적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섀클턴이 각지에 남겨두고 온 대원들 구조에 나선 결과 전원 ‘무사’했다는 것이다. 사우스조지아섬의 3명은 물론 멀리 앨리펀트섬에 잔류했던 대원들 중에도 사망자는 ‘0명’이었다. 동상에 걸린 한 명이 발가락을 잘라내는 부상을 입은 게 전부였다.


앨리펀트섬 대원들을 이끈 건 부대장인 프랭크 와일드(Frank Wild)였다. 그는 선박조각을 모아 캠프를 만든 뒤 지붕에 작은 창을 뚫어 햇빛이 들어오게 했다. 또 깡통을 이어 굴뚝을 달아 실내에서 요리해도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했다. 식량은 바다표범, 펭귄, 조개, 해초 등 닥치는대로 채집했다.


와일드는 무엇보다 대원들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도록 했다. 그는 날씨가 좋아질 때마다 “오늘 대장이 올 지 모르니 짐을 미리 싸 놓자”고 말했다. ‘생존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뭐니뭐니해도 삶에 대한 의지다. 일상으로 복귀하겠다는 의지가 사라지고 ‘닫힌 사회’가 구축되면 자살, 폭력, 심지어 식인(食人) 등 범죄와 조직붕괴로 이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와일드도 섀클턴 못지 않게 ‘능력자’였던 셈이다.


이러한 대원들 간의 ‘믿음’ ‘의지’ 배경에는 섀클턴의 리더십이 있었다. 한 사례로 인듀어런스호가 침몰하고 침낭을 충분히 확보할 수 없자 제비뽑기를 했는데 상태가 양호한 침낭은 모두 일반대원들에게로 돌아갔다. 알고보니 이는 섀클턴과 간부들이 일부러 나쁜 제비를 뽑았던 것이다. 634일간의 이 생존드라마에 대해 아문센은 “내가 그런 상황이었다면 탐험을 포기했거나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고 섀클턴을 극찬했다.


▲ “고난이여, 안녕” 희망을 싣고 구조대를 찾아 떠난 섀클턴.


전설이 된 28人


비록 살아남아 전설이 됐지만 후유증은 컸다. 제 몸 하나 돌보지 못하고 대원들을 이끌었던 섀클턴은 1922년 마지막 원정에 나섰다가 사우스조지아섬에서 질병으로 사망했다. 모험 과정에서 얻은 정신·신체적 스트레스, 금전적 압박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다만 그의 가족들은 섀클턴 덕분에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당초 섀클턴은 눈 감을 때 4만파운드(약 25억원)의 빚이 있었지만 사후에 그의 생애를 다룬 책 ‘어니스트 섀클턴 경의 삶(The Life of Sir Ernest Shackleton)’이 출간돼 불티나듯 팔리고 팬들이 기금을 조성함에 따라 경제적 부담은 사라졌다. 물론 남편, 아버지를 잃은 가족의 슬픔을 돈으로는 대신할 수 없었겠지만.


섀클턴의 ‘영원한 오른팔’ 프랭크 와일드는 1939년 사망했다. 그의 묘는 2011년 11월27일 새클턴의 옆으로 이장됐으며 묘비에는 ‘섀클턴의 오른팔(Shackleton's right-hand man)’이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숨겨진 영웅’도 있다. 인듀어런스호에 승선해 ‘쥐잡이’를 전담했던 고양이 ‘치피 여사(Mrs. Chippy)’는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배가 침몰한 상황에서 식량이 부족해지자 어쩔 수 없이 섀클턴에 의해 명을 달리했다. 쥐 잡는 게 대수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쥐가 식량을 모조리 갉아먹어 버리면 대원들을 그대로 ‘쫄쫄’ 굶어야만 했다. 치피를 아꼈던 한 대원의 묘에는 치피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2011년 뉴질랜드에서는 기념우표도 발행됐다.


인간의 접근을 불허하는 지옥의 대륙 남극에서 ‘산 넘고 물 건너’ 끝끝내 살아남았던 섀클턴 등 28인의 전설은 ‘제2의 남극화(化)’가 되어가는 대한민국 직장인들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아무리 추워도 가다 보면 집은 보인다” 억지로 갖다붙인 감이 없잖아 있는 교훈(?)이지만 아무튼 섀클턴의 일화를 되새기면서 올 겨울도 우리 모두 씩씩하게 견뎌내고 다가오는 봄의 기운을 맞도록 하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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