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족→흉노→훈족→유럽’ 연쇄작용으로 촉발된 ‘불법입국’… “신의 징벌” 오늘날에도 ‘동경·공포’ 대상으로

[투데이코리아=오주한 기자] 미국 연방정부 셧다운(Shutdown. 부분폐쇄)이 장기화되면서 불똥이 사회로 튀고 있다. 최근 AFP통신 등 보도에 따르면 정당하게 이주하려는 이민자 신청처리 지연, 혼인신고 불가 등 후폭풍이 불어닥치고 있다.


셧다운 배경은 ‘멕시코 국경장벽’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불법입국한 멕시코인들이 미국인 일자리를 뺏아가고 있다며 국경에 장벽을 세워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야당 민주당은 인권침해라고 반박하고 있다. 정치권 대치를 두고 여론도 찬반으로 엇갈려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미 셧다운 사태 앞에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 ‘창칼’을 앞세워 아시아 북방에서 멀리 유럽까지 이동해 ‘불법체류’한 한 민족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어느날 홀연히 나타나 전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그들 ‘훈(Hun)족’의 역사를 살펴본다.


▲ 현대에 복원된 훈족 상상도.


‘민족대이동’ 촉발한 무제(武帝)의 북방정벌


훈족이 흉노(匈奴) 일파였냐 아니냐는 역사학계의 오랜 골칫거리였다. 일부는 맞다고 주장하고 일부는 아니라고 반박했다. 혹자는 흉노가 이동 과정에서 중앙아시아, 러시아, 유럽인들과 섞인 새로운 민족이라는 학설을 내놨다.


그런데 작년 5월 훈족의 실체를 파악할 실마리가 잡혔다. 덴마크 코펜하겐대 지리유전학센터의 에스케 빌러슬레프(Eske Willerslev) 교수팀은 지금으로부터 4500~1500년 전 사이 헝가리~몽골에 분포해 거주한 인골(人骨) 137개에서 게놈(Genome)을 추출·해독한 결과를 네이처를 통해 발표했다.


연구팀에 의하면 러시아 남부, 동유럽을 지배한 스키타이(Scvthai)족이 흉노와 섞여 훈족이 탄생했다. 구체적으로 스키타이족은 신석기 시대 유럽인이 시베리아 남쪽 수렵채집인, 유목민들과 섞여 형성됐다. 이들은 다시 동쪽에서 온 흉노와 결합했고 기원전 2~3세기 무렵부터 유럽으로 서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유럽인은 당초 ‘흑인’에 가까웠다. 지난 2015년 83명으로 구성된 국제연구팀은 게놈 분석을 실시한 결과 8000년 전에는 유럽인들의 피부가 ‘검은색’이었다고 사이언스지를 통해 밝혔다. ‘흰 피부’가 탄생한 건 7700년 전 지금의 스웨덴 지역에서였다고 한다.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기원했다는 게 정설인 점을 감안하면 검은 피부는 그리 놀라운 것도 아니다.


코펜하겐대 연구팀 발표는 학계에서 비교적 비주류였던 ‘훈족 혼혈설’에 큰 힘을 실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중국 한(漢)나라 초기 묵돌선우(冒頓單于) 통치 하에 동아시아 패자로 군림했던 흉노는 기원전 2세기 무렵 무제(武帝)에 의해 서쪽으로 쫓겨났고 수 세기에 걸쳐 여러 민족을 흡수하면서 서진(西進)해 마침내 유럽에 도달했다.


이것을 코펜하겐대 연구결과와 접목하면 ‘스키타이와 흉노 일파 결합해 훈족 탄생→무제의 흉노 토벌→흉노 서진→흉노의 훈족 침공→훈족 서진→훈족의 유럽 침공’ 순의 상황전개를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기원전 2~3세기 훈족 서진이라는 연구결과는 무제의 흉노 토벌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무제가 초인적 역량을 발휘했기에 패배한 흉노이지만 그들의 ‘전투력’은 무시무시했다. 농사가 불가능한 북방 환경상 유목민들은 가축을 쳐서 살림을 꾸렸으며 때문에 삶 자체가 ‘사냥’ ‘싸움’이었다. 덩치가 큰 대형 초식동물을 잡기 위해서는 기마(騎馬), 궁술(弓術)이 필수적이었으며 재산을 노리고 덤벼드는 늑대, 타 부족과 끊임없이 살육전을 벌여야만 했다.


유일한 약점이 ‘분열’이었지만 이마저도 묵돌에 의해 극복되고 만다. 묵돌은 스스로 선우에 올라 각지 왕(王)을 분봉(分封)해 거느리면서 수시로 중원을 침공했다. 한고조(漢高祖)는 아예 흉노의 포로가 될 뻔 하다가 연지(閼氏. 흉노 왕후)에게 편지를 보내 “선우가 중원을 점령하면 한족 미인들을 얻을텐데 그러면 너는 퇴물이 될 것”이라고 이간질해 겨우 달아나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이같은 흉노였기에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던 무제도 국력소모를 감당 못해 장건(張騫)을 서역으로 파견하는 등 갖은 고생을 해야만 했다. 장건은 월지(月氏) 등과의 화친을 위해 움직이는 과정에서 그리스 문명권인 대하(大夏. 박트리아)까지 방문해 본의 아니게 실크로드(Silk-load. 비단길)를 개척하게 된다. 여로모로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게 흉노인 셈이다.


▲ 중세 유럽인들이 상상한 아틸라의 모습.


‘빤스런’ 한 로마황제


훈족이 유럽에 본격 등장한 건 4세기 무렵이다. 이때 훈족은 왕을 중심으로 강력한 봉건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들은 375년 흑해 연안에 살던 동고트(Ostrogoth)족을 무찔러 대부분을 지배 하에 두고 서고트(Visigoth)족도 공격했다. 서고트족 일부는 훈족을 피해 동로마(비잔티움)제국으로 이주했고 이것이 ‘게르만(Germanic)족 대이동’으로 이어진다. 이후에는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일대도 정복하게 된다.


‘훈 제국’이 형성된 후인 5세기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신의 징벌(Flagulum Del)’ 아틸라(Attila. 406?~453년)다.


아틸라는 훈족의 왕 루아(Ruga)의 조카였다. 434년 루아가 사망하자 아틸라의 형 블레다(Bleda)가 왕위에 올랐지만 아틸라는 독자세력을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443년 블레다가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자 비로소 아틸라는 왕좌를 차지하고 봉건체제를 넘어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구축한다.


아틸라는 형과의 약속을 어기고 금을 지불하지 않는 동로마제국을 447년 대대적으로 침공한다. 그는 조공을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수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지금의 이스탄불)을 점령하려 든다. 아틸라는 적군 주요거점을 교묘하게 피해다니면서 각지에서 철저한 파괴, 약탈을 일삼았다. 황제는 아틸라에 맞설 대군을 보냈지만 사령관마저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으며 설상가상 수도에 큰 지진까지 나 성벽까지 무너진다.


동로마제국은 천우신조로 난공불락의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성벽’을 겨우 복구함에 따라 기사회생의 기회를 잡는다. 천성이 유목민이었던 훈족은 야전에서는 ‘무적’이었지만 공성전에서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양측은 강화협상을 시작해 동로마 측은 다량의 금, 포로석방, 영토할양 등 훈족과 굴욕적인 협정을 맺는다.


닥치는 대로 학살하면서 동로마제국을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간 아틸라의 명성은 전유럽을 떨게 했다. 451년에는 서유럽까지 진출해 갈리아(Gallia. 지금의 프랑스·독일 지역) 원정에서 ‘신의 징벌’ ‘신의 채찍’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그는 주요 강물을 따라 진격하면서 여러 도시를 함락시켰다. 많은 백성들이 훈족의 창칼 아래 목숨을 잃었으며 아틸라의 악명은 극에 달했다. 그는 “내가 싸우는 전장에서 편히 쉴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죽은 자들”이라는 무시무시한 말도 남겼다. 비록 그는 서로마제국과의 결전에서는 패했지만 군사를 재정비해 452년에는 아예 서로마제국 본토인 이탈리아 반도로 출병했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Valentinianus Ⅲ) 황제가 수도를 탈출하는 등 아비규환이 펼쳐졌으며 제국은 풍전등화의 운명을 맞았다. 그런데 이 때 훗날의 ‘유럽원정 몽골군 철수’와 유사한 상황이 벌어진다. 아틸라는 무려 ‘교황’이 직접 찾아와 강화를 제안하자 ‘폭풍진격’을 멈춘다. 그리고 급기야 말머리를 돌려 본국으로 회군하기 시작한다.


어린아이 팔 비틀기보다 더 쉬운 로마정복을 앞두고 아틸라가 철수한 까닭은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남고 있다. 아틸라와 성 레오 1세(Saint Leo Ⅰ)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기록이 전혀 없다. 유럽에서는 교황이 ‘신(神)의 권능’을 보여주자 아틸라가 물러났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금은보화 등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무튼 성 레오 1세는 이 공로로 사후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 부다페스트에 세워진 아틸라 동상.


아틸라의 그림자


아틸라의 훈족이 유럽 역사·문화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중세 독일 영웅 서사시이자 기사도 문학의 대표작으로 19세기 오페라의 거장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가 악극으로도 제작한 ‘니벨룽겐의 노래(Das Nibelungenlied)’에는 아틸라가 ‘훈족의 왕 에첼(Etzel)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1980년대 유럽에서 선풍적 인기를 끈 댄스그룹 ‘징기스칸’ 멤버들의 복장은 아틸라 관련 기록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진다. 2001년에는 제라드 버틀러 주연의 헐리웃 영화 ‘훈족의 아틸라’가 개봉하기도 했다.


헝가리(Hungary)는 아예 ‘훈족의 후예’로 자처하고 있다. 부다페스트에는 아틸라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유럽국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아틸라는 영웅시하고 있다. 뉴스에는 심심찮게 “아틸라의 무덤을 찾았다”는 기사가 뜨고 있다. 물론 진짜 무덤으로 밝혀진 건 아직 없다. 헝가리에서는 ‘아틸라’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나라 이름에도 ‘훈(Hun)’이 들어간다.


대다수 유럽국가에서 아틸라와 훈족은 동경의 대상이면서도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서구권은 독일군을 훈족으로 불렀다. 당시 독일군은 벨기에 점령과정에서 많은 피해를 입자 민간인 학살에 나섰다. 영국, 프랑스는 이를 프로파간다 소재로 사용했으며 미국은 참전 구호를 ‘훈족을 쳐부수자’로 정했다.


훈족은 아틸라 사후 세 명의 아들에 의해 무너진다. 이들은 왕위쟁탈을 위해 내전을 벌였으며 그 틈에 다수 민족들이 속속 독립했다. 둘째아들 뎅기지크(Dengizich)가 동로마제국과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고 잔당들이 다뉴브 강변에 정착해 조용히 살았다는 것을 끝으로 훈족은 역사기록에서 사라졌으며 이후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많은 학자들은 유럽사회에 동화됐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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