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돼지해에 떠올려 보는 한 돼지의 ‘살신성인(?)’

▲ 황금돼지해 첫 달도 어느덧 중반을 넘기고 있다.


[투데이코리아=오주한 기자] ‘황금돼지의 해’도 어느덧 시작된지 2주 가량이 지났다. 경남 창원시는 올해 ‘돝섬’ 방문객 목표를 15만명으로 설정했다고 17일 밝혔다. 이 섬은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과 황금돼지 전설이 어린 곳이다. 이 외 각 지자체, 기업들도 황금돼지해 이벤트를 속속 발표하고 있다.


황금돼지해이지만 정작 전국 돼지들 몸값은 하락하고 있다. 14일 한돈(韓豚)자조금관리위원회는 돼지고기 가격이 최근 5년새 최저를 기록해 한돈농가가 돼지 한 두 출하 때마다 약 9만원의 손해를 보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의하면 9일 기준으로 돼지고기 가격은 1kg당 3250원으로 평년 대비 18.3% 하락했다.


aT 등은 가격폭락 원인으로 수입 돼지고기 증가, 장기 경기침체에 따른 외식소비 둔화 등을 꼽았다. 작년 돼지고기 수입량은 45만톤으로 사상최대치다. 수입산이 전체 공급량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70%에 육박한다. 한국은행은 3일 소비자동향조사에서 작년 12월 기준으로 외식비 지출 소비자 심리지수는 90을 기록해 기준치(100)를 밑돌았다고 밝혔다.


황금돼지해임에도 불구하고 울상을 짓고 있는 전국의 돼지들. 독자들의 한돈 구매욕도 자극(?)할 겸 돼지와 관련된 ‘기묘한 전쟁’을 소개한다.


▲ 미국 독립전쟁에서 맞붙은 레드코트(Red Coat. 왼쪽 빨간군복)와 미국 정규군.


“미국을 죽입시다, 미국은 나의 원수”


1859년 캐나다에서는 ‘돼지’가 ‘개입’했으면서 사상자는 ‘0명’이었지만 두 강대국이 ‘10년’ 이상 대치한 ‘이상한 전쟁’이 발발한다. 그렇다고 해서 돼지가 위장크림 바르고 탄띠를 두른 채 ‘날렵하게’ 뛰고 구르며 기관총을 난사한 전쟁은 더더욱 아니다.


이 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북미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알려지다시피 미국은 1783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거쳐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다. 영국은 순순히 이 거대식민지를 포기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앙금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미영(美英) 양 국은 프랑스에서 파리조약을 맺고 평화를 다짐했지만 물밑에서는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1803년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에 돌입하자 당초 중립을 지키던 미국이었지만 영국은 트라팔가르(Trafalgar) 해전에서 승리하자 프랑스에 해상봉쇄를 실시하는 한편 인근슬쩍 미국에게도 같은 조치를 가했다.


독립전쟁 때 지원한 우방 프랑스는 물론 자국에게까지 경제제재가 몰아닥치자 미국은 1807년 영국으로의 농산물 수출 중단을 노리고 대외 무역중단을 선포했다. 굶주림에 허덕인 영국이 항복하고 해상봉쇄를 해제할 것이라는 노림수였지만 전세계 도처에 식민지를 건설한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의 저력은 만만찮았다. 영국은 역으로 미국과의 거래중단을 선언하고 타국에서 농산물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피해를 본 건 미국 농민들 뿐이었다.


영국의 대미(對美)보복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미국의 머리 위에는 여전히 영국 식민지인 캐나다가 있었다. 캐나다는 먼 훗날인 186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지만 오늘날까지도 영연방(Commonwealth of Nations) 회원국을 자처하면서 영국 여왕을 국가원수로 떠받들 정도로 본국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나라다.


영국은 미국을 괴롭힐 심산으로 캐나다 원주민 등을 지원했으며 결국 폭발한 미국이 영국에 선전포고를 함에 따라 1812년 미영전쟁이 발발한다.


북미 중·동부와 대서양, 태평양 등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진 이 전쟁은 어느 쪽도 승리하지 못한 애매한 상태로 끝났다. 미국은 캐나다마저 흡수하려 했으나 각 전투에서 패했으며 설상가상 국내에서도 반전(反戰)여론이 들끓었다. 영국은 영국대로 이참에 미국을 다시 잡아먹으려 했지만 다수 교전에서 고배를 마셨다.


양 국은 1814년부터 평화협상에 나섰으며 이듬해 종전선언이 이뤄져 미영전쟁은 끝났다. 그 과정에서 미처 상부지시를 받지 못한 영국군이 루이지애나를 공격하는 사건이 벌어졌지만 패배함에 따라 ‘없던 일’로 치부됐다.


본 기획의 주제인 ‘기묘한 전쟁’은 미영전쟁이라는 거대한 전화(戰火)의 쓰나미가 북미대륙을 휩쓸고 지나간 지 약 40년이 지난 1859년 미국·캐나다 국경에 위치한 ‘산 후안(San Juna) 제도’에서 발생한다.


▲ 지난 2017년 8월 중국 광시장족(廣西壯族)자치구 홍수 때 용맹히(?) 재난현장을 탈출하고 있는 돼지(사진=웨이보).


적 식량을 용맹히 축내다 장렬히 ‘전사’하다


오늘날 미영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매개체로 굳건한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국민들 사이에서는 갈등의 찌꺼기가 남아 있다. 적잖은 영국인들은 미국인을 두고 ‘무례한 양키’ 등 멸칭으로 부르고 있으며 많은 미국인들도 영국인에게 ‘아직도 왕(王)을 떠받드는 미개인들’ 식으로 비난하고 있다.


지금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전쟁이 끝나고 불과 수십년이 지난 19세기 중반 양 국 국민들의 서로에 대한 감정이 어떠했는지는 굳이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이 전쟁은 산 후안 제도의 한 조그만 섬에서 시작됐다. 그때까지도 미영은 미국·캐나다 국경선 설정을 두고 갈등을 빚고 있었다. 밴쿠버섬은 캐나다 영토로 하기로 합의됐지만 불씨는 여전히 무수한 섬들로 구성된 산 후안 제도 등을 둘러싸고 남아 있었다.


그런데 1859년 이 위험한 땅에 한 명의 순박한 농부가 이주를 한다. 라이먼 커틀러(Lyman Cutlar)는 자신의 땅에 씨앗을 뿌리고 감자 등 각종 작물을 키웠으며 가족과 오손도손 ‘배 부르고 등 따시게’ 살아갈 꿈에 젖는다.


문제는 이 섬에는 커틀러뿐만 아니라 다수의 영국인들도 거주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1670년 설립된 유서 깊은 기업인 허드슨베이(Hudson's Bay)사는 이곳에 공장을 차리고 비버 등 모피를 수집하고 있었다. 이 회사는 지금도 존재하고 있으며 북미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회사규모는 컸지만 직원들 인성은 그 크기를 따라가지 못한 듯 하다. 뜬금없이 한 ‘식민지 출신 촌놈’이 와서 씨 뿌리고 밭 가는 모습을 지켜본 직원들은 커틀러를 골려주기 위해 머리를 맞댄다. 낄낄거리면서 아이디어를 짜내던 그들은 이 장난이 무려 ‘3차 미영 군사분쟁’ 직전 상황까지 야기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어느날 잠에서 깨어나 오늘도 농사를 짓기 위해 일터로 나갔던 커틀러는 웬 ‘돼지’ 한 마리가 자신의 감자농장에서 작물을 용맹히 씹어먹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황당해진 그는 돼지를 쫓아내거나 우리로 데려가려 했지만 멀리에서 한 무리의 영국인들이 자신을 보며 비웃는 장면을 목격하고 만다.


식민지 출신이라는 열등감 때문이었을까, 침략자들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을까. 커틀러는 언성을 높여 따지기 시작했으며 영국인들도 지지 않고 응수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열 받은’ 커틀러는 급기야 ‘총’을 들고 나왔으며 애꿎은 돼지만 감자 잘 먹다가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여기에서 그쳤다면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지만 ‘방귀 뀐 놈 성 내는’ 격으로 영국인들은 정색하고 커틀러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커틀러는 10달러로 합의 보자고 제안했지만 직원 중 한 명이었던 아일랜드계의 찰스 그리핀(Charles Griffin)은 ‘100달러’를 줄 것을 요구했다. 당시 100달러는 일개 촌부가 감당할 수 없는 거액이었다.


커틀러는 ‘배째라’를 외치며 버텼으며 영국인들은 자국법을 적용해 커틀러를 체포하겠다고 위협했다. 커틀러는 주(州)정부에 군사지원을 요청했으며 이 소식은 멀리 런던, 워싱턴까지 전해져 미영 양 국 병력이 이 작은 섬에 몰려드는 사태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 영국 여왕 앞에서 ‘길막(길막기의 준말)’을 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오늘도 미영관계는 평화(?)롭다.


‘밀약’ 속 까맣게 잊혀진 죽음


바야흐로 미영 간에는 재차 전화의 기운이 감돌았다. ‘돼지’ 한 마리에서 촉발된 이 대치에서 양국 군 사이에서는 금새라도 맞붙을 것 같은 흉흉한 분위기가 만연했다.


그러나 영국은 내심 미국과의 전쟁을 꺼리고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그해 총선에서 자유당이 보수당에 승리해 의회를 점령하는 변화가 있었으며 외부적으로는 3년 전 청(靑)나라와의 ‘애로(Arrow)호 사건’으로 분주한 상태였다. 과거와 같은 프랑스 개입 가능성도 우려되는 부분이었다.


미국도 그들대로 영국과의 전쟁은 최대한 피하려 했다. 미영전쟁에서의 영국 경제제재로 이미 쓴맛을 본 적이 있는데다 ‘썩어도 준치’라고 아무리 독립을 허용한 영국이었지만 인류역사상 최대영토를 차지한 대영(大英)제국과의 싸움은 아무래도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내부적으로는 노예해방을 둘러싼 내전인 남북전쟁(1861~1965)의 기운마저 샘솟고 있었다.


먼저 ‘꼬리’를 내린 건 미국이었다. 제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 당시 대통령은 육군 장성이자 외교관이었던 윈필드 스콧(Winfield Scott)을 현장으로 파견해 영국 측과의 협상에 임하도록 지시한다. 영국은 짐짓 ‘못 이긴 척’ 협상에 응했으며 양 국은 합의안이 마련될 때까지 지금의 군사대치를 이어나간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그런데 협상은 지지부진해 결과가 도출되기까지 무려 ‘10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다만 직접적 교전은 없었으며 대치 와중에도 양 국 시민들은 이 섬에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지루한 대화 끝에 1871년 영국이 미국 측 입장을 수용하기로 함에 따라 전쟁은 극적으로 종결됐다. 양 국 군대는 섬에서 철수했으며 커틀러 등은 마음 놓고 농사를 지으며 살 수 있게 됐다. 물론 어디에서도 이 전쟁의 ‘유일한 희생자’인 ‘돼지’를 애도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영국인들에 의해 강제소환 돼 꿀꿀거리면서 미국인의 감자를 먹다가 억울한 죽음을 맞은 돼지는 천당에서 종전선언을 바라보면서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우리 안에서 부모를 애타게 기다릴 아기돼지들을 생각하면 편히 눈 감을 수 있었을까. 오로지 그 돼지의 영혼만이 알리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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