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상대 ‘노예무역’으로 부흥… ‘인권팔이 독재자’ 등 신음

▲ 미지의 대륙 아프리카.


[투데이코리아=오주한 기자] ‘총면적 3천36만㎢’ ‘수에즈운하’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대륙’ 아프리카의 역사는 아시아, 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베일에 싸여 있다. 고대에는 이집트문명 등 세계를 주도하는 지역 중 하나였으나 근대 들어서는 국제사회에서 소외된 탓이 크다.


학계 정설에 따르면 아프리카는 인류의 ‘고향’이다. 수백만년 전 인류는 이곳에서 둔부비대증 즉 ‘엉덩이 근육’이 발달한 탓에 ‘두 발’로 대지를 딛고 일어섰다. 이족보행을 하게 됨에 따라 앞발 즉 두 손으로 각종 도구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됐으며 이는 ‘불의 발견’ ‘농사’ 등 혁명으로 이어졌다.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약 180만년 전에 아프리카를 벗어났다. 중국, 동남아, 유럽 등에서는 약 50만년 전 인간 거주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면서 현대 인류의 조상이 탄생한 건 약 4만~5만년 전이다. 이들은 빙하시대를 이겨내고 멀리 아메리카 대륙으로까지 이주하는 과정에서 황인, 백인 등 ‘돌연변이’가 나타났다.


‘돌연변이’ 하면 어감이 이상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류의 피부색은 본시 ‘검은 색’이었다. 유럽인들도 원래는 ‘검은 피부’였다는 게 근래 학계에 의해 규명된 바 있다.


유럽에서 흰 피부가 등장한 건 지금으로부터 약 7000년 전이다. 인류 유전자 속에 내재 돼 있던 열성 돌연변이가 유럽에서는 비타민D를 흡수하기 좋은 우성 돌연변이가 돼 흰 피부가 ‘대세’가 된 것이다.


한국인과 같은 황색 피부도 비타민D 흡수를 목적으로 동아시아, 북미대륙에서 대세가 됐다. 지금도 아프리카 흑인들 중에는 열성 돌연변이 유전자 즉 밝은 피부를 가진 사람이 심심찮게 태어나고 있다.


황인, 백인, 북아프리카 흑인은 ‘같은 조상’을 둔 것으로 확인됐지만 사하라사막 이남의 흑인들은 이들과 다소 ‘다른’ 것으로 파악됐다. 황인 등의 몸 속에는 현생인류 즉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와의 생존경쟁에 패해 ‘멸종’한 네안데르탈인(Neanderthal)의 ‘피’가 섞여 흐르고 있다. 현대인들에게는 슬프게도 ‘복부비만’이 바로 네안데르탈인이 남긴 대표적 ‘유산’이다.


그러나 지구 각지로 뻗어나간 타 인종들과 달리 사하라사막 이남에 고립돼 살던 중·남아프리카 흑인들에게서는 네안데르탈인 유전자가 검출되지 않았다. 이들이 훗날 백인 등 ‘다문화’ 인류에게 ‘정복’당한 점을 감안하면 과한 순혈주의가 좋지만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 반증이라 할 수 있다.


▲ 가진 게 ‘돈’ 밖에 없었던 만사 무사(Mansa Musa).


‘교역과 황금의 땅’ 아프리카


아무튼 아프리카에서는 ‘인류의 발원지’답게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가 탄생했다. 1994년부터 본격 발굴된 터키 남동부의 초고대 유적 ‘괴베클리 테페(Gobekli Tepe)’ 등장으로 가장 오래된 문명 지위가 흔들리고 있는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문명, 인더스(Indus) 문명, 황하(黃河) 문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집트(Egypt) 문명이 그것이다.


이집트 1왕조가 등장한 건 ‘기원전 31세기’ 무렵이다. 기록에 의하면 나르메르(Narmer)라는 왕이 남북으로 나뉘었던 고대 이집트를 통합해 통일왕국을 이룩했다. 이후 카르타고(Carthago) 등 다수 국가가 우후죽순으로 건설됐으며 특히 카르타고는 지중해 패권을 두고 로마제국과 전쟁을 벌일 정도로 흥성했다.


로마에게 패하기 전까지 카르타고는 세계 최고의 ‘해상왕국’이었다. 이들은 지중해 연안은 물론 사하라 이남과도 교역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만큼 국력도 강해 기원전 218~202년 벌어진 2차 포에니(Punic) 전쟁에서는 그 유명한 ‘한니발 바르카(Hannibal Barca)’가 알프스산맥을 넘어 로마로 진군하기도 했다.


참고로 한니발 등 인명(人名)에 들어간 ‘바알(Baal)’은 본시 고대의 ‘풍요의 신’이었으나 기독교를 국교(國敎)로 받아들인 로마 등에 의해 훗날 ‘악마’로 탈바꿈한다. 바알을 악귀로 재평가 할 정도로 한니발의 카르타고가 로마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짐작할 수 있다.


비록 아프리카는 카르타고의 3차 포네이 전쟁 패배 등 영향으로 인해 기독교 문명권에 편입되지만 중세에도 다수 왕국이 위세를 떨쳤다. 특이한 나라가 지금의 에티오피아 지역에서 3세기 무렵 세워진 악숨(Aksum)왕국으로 이들은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약 20년이 지난 서기 333년 무렵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악숨왕국은 십자군전쟁에 즈음해 유럽국가들과 접촉하게 되며 때문에 다수 ‘흑인 기사’들이 예루살렘 원정에 동참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장면은 2005년작 헐리웃영화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에서 짧게 묘사된다. 중세 백인의 전쟁을 다룬 영화에 뜬금없이 흑인이 등장한 건 ‘정치적 올바름’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에티오피아는 훗날 이슬람을 수용하기 전까지 1000년 이상 기독교국가로 존재한다. 에티오피아의 전제군주제는 20세기 넘어서도 이어지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군을 격파하는 기염을 토하고 6.25전쟁 때는 한국을 도와 파병하기도 했다. 하일레 셀라시에(Haile Selassie. 1892~1974) 국왕이 1968년 방한(訪韓)할 정도로 에티오피아는 우리에게 있어서도 고마운 나라다.


중세 아프리카에는 악숨왕국 외에 금값을 일시에 ‘똥값’으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부유했던 말리(Mali)제국도 존재했다. 이 나라의 가장 유명한 인물이 14세기 초 재임한 ‘만사 무사(Mansa Musa)’ 왕으로 그의 재산은 현재가치로 환산했을 때 약 ‘453조2000억원’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는 2019년 기준으로 세계 1위 갑부인 제프 베이조스(Jeffrey Bezos) 아마존 CEO의 147조원을 훨씬 상회하는 규모다.


만사 무사의 재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800명’의 부인을 뒀던 그는 1324년 7월 메카(Mecca)로 성지순례를 떠나면서 빈자(貧者)에 대한 베풂이라는 이슬람의 가르침에 충실하기 위해 길가에 금을 마구 뿌려댔다. 특히 귀국길에서는 이집트 카이로(Cairo)에서만 무려 ‘11톤’의 금을 쏟아부었으며 덕분에 카이로의 금값은 이후 12년 간 폭락했다고 한다.


▲ 흑인노예를 끌고 가는 흑인병사들.


‘노예무역’ 도매상


아프리카는 15세기 이후 유럽인이 도래하면서 이들을 상대로 ‘비즈니스’에 나선다. 다른 아닌 ‘흑인노예 무역’이다.


아프리카인이 동족을 팔아넘겼다는데 충격받을 독자도 있을지 모르지만 이는 한국에 만연한 ‘이분법적 기준’으로만 바라봤기 때문이다. 당시 아프리카에는 동시대의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대륙과 마찬가지로 많은 종족이 부족을 이루거나 나라를 세우고 살았다. 때문에 A부족(왕국)에게 있어서 B부족은 ‘동족’이 아닌 ‘남’이었다.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문화를 누리는 ‘다른 민족’이었다.


아프리카인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피부색의 동족이라는 논리대로라면 한국, 일본, 중국도 ‘동족’이 되며 영국, 프랑스도 ‘동족’이 된다. 무지한 서양인이 한국에 와서 “너희들 왜 동족(일본) 욕하니”라고 묻는 격이며, 무지한 동양인이 영국에 가서 “늬들 왜 프랑스 사람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니”라고 묻는 격이다. 뒷골목에 조용히 호출돼 멍석말이 당하기 십상이다.


로마제국 이후 아프리카에 정착지를 세우고 비슷한 시기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유럽인들은 남·북미에서 노동력으로 부릴 노예를 필요로 하게 된다. 아프리카 유력 부족·국가들은 이같은 유럽인들과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짐에 따라 주변 부족·국가를 정복하고 피정복민을 유럽인들에게 노예로 팔아넘겼다. 콩고(Congo)왕국의 은징가 은쿠와(Nzinga a Nkuwa. ?~1509)는 자신의 아들을 포르투갈에 유학 보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가해자, 피해자를 특정하는 성향이 있지만 인간사에 영원한 피해자도, 영원한 가해자도 없다. 가깝게는 한국사회에 만연한 ‘을(乙)의 갑질’을 사례로 들 수 있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게 인간세상이다. 노예무역의 책임을 무조건 유럽인들에게만 전가하면서 ‘제국의 갑질’로 단정하는 건 ‘한국은 미제(米帝) 식민지’를 주장하는 일부 이념·정치세력의 ‘반(反)서구 프로파간다’에 휘말리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들 세력의 특징 중 하나가 ‘한국은 미제 식민지이므로 자주권을 지키는 북한이 진정한 우리 조국’이라는 논리다. 정작 북한은 소련 장교단이 김일성을 노골적으로 감시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촬영됐을 정도로, 북한정권은 스스로를 ‘한민족’이 아닌 ‘김일성민족’으로 자처하고 있을 정도로 ‘자주권’ ‘한민족’과는 거리가 먼 족속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분법적 시각에서 벗어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사람들은 북한정권은 ‘인권탄압·전쟁범죄자’로, 주민들은 ‘독재정권 피해자이자 우리 동족’으로 정확히 규정하려 노력하고 있다.


아무튼 그들 모두가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니었던 아프리카인들은 노예무역을 통해 희비가 엇갈리게 된다. 정복자 입장의 부족·국가는 노예를 판매하는 대신 유럽으로부터 머스킷(Musket)소총 등 ‘첨단무기’를 수입했다. 1526~1867년 사이 유럽인들에게 팔려나간 흑인은 1천만명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대다수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농업에 동원됐다.


이들 노예가 아메리카 대륙 정확히 말하면 미국 남부 노동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해서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인권’이라는 개념이 확립되고 미 행정부에 의해 노예해방이 추진되자 남부 여러 주(州)들의 독립에 따른 남북전쟁으로 번지기까지 했다. ‘인권’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건 불과 100~200년 전이다. 그 이전에는 전세계 모든 종교·문화권에서 ‘피정복자는 노예’ 공식이 ‘상식’이었다. 인권이 당연시되고 또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오늘날과 그 시절을 동일시하면서 “서구 제국주의자들 나빠요”를 외치는 건 자신의 무지를 자랑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 ‘인권’으로 집권해 ‘인권’을 말살한 로버트 무가베.


‘인권팔이’ 등 몰락으로


이토록 융성한 아프리카이지만 아시아와 마찬가지로 ‘시대 흐름’에 뒤쳐진 탓에 ‘약육강식(弱肉强食)’의 현실에 노출되고 만다.


중세까지만 해도 유럽은 ‘빈민촌’이었다. 기원전 221년에 이미 다수 국가가 진(秦)나라의 기치 아래 하나로 통일돼 자급자족하면서 비단, 차(茶), 도자기 등을 유럽에 수출하던 중국 등 동아시아, 유럽에 노예를 독점공급하면서 부를 쌓던 아프리카 여러 왕국들과 달리 유럽은 이들에게 ‘구걸’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같은 ‘빈곤함’이 ‘생존본능’으로 이어져 나침반, 화약 등 선진기술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계기로 작용했다. 유럽인들은 기술에 기술을 접목해 발전시키면서 바다로 뻗어나가 대항해시대를 열었으며 마침내 ‘을의 설움’을 떨치고 ‘갑(甲)의 지위’에 올라서게 된다. ‘식민지 개척’이 그것이다.


아시아는 열강 개입으로부터 약 100년만에 다시금 ‘갑의 지위’를 찾았다. 중국은 명실상부한 ‘G2’이며 일본은 중국이 치고 올라오기 전까지 ‘2인자’ 지위를 지켰다. 우리나라는 2017년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이며 이는 호주(13위), 스페인(14위), 네덜란드(18위), 스위스(20위), 스웨덴(23위), 노르웨이(29위), 덴마크(36위), 핀란드(43위), 포르투갈(47위) 등 소위 ‘서구열강’들보다 월등히 높은 수준이다.


혹자는 “그들이 순위가 낮은 건 인구가 적기 때문” “그들은 복지가 잘 된다” 등 반박을 펼치며 조국 폄하에 나서고 있지만 스페인만 해도 인구는 4644만명으로 우리와 비슷하다. ‘복지천국’ 핀란드의 2008년 청소년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 기준으로 10만명 당 11.3명 수준이다. 한국(6.8명)에 비해 2배 가까이 높은 수치로 노키아(Nokia) 몰락 등 경제난 앞에 소득의 ‘절반’ 안팎을 세금으로 내야 하는 절망적 상황이 청소년들을 자살로 내몰고 있다. 따라서 조국을 쓸데없이 폄하할 필요는 없다.


아시아와 달리 아프리카는 ‘영광’을 되찾지 못한다. 19세기 노예무역이 폐지되자 유럽은 산업화시대에 발맞춰 ‘광물자원’을 찾기 위해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기 시작한다. 프랑스, 영국이 선두에 섰으며 비록 약 한 세기 만에 아프리카 각 국은 독립하게 되지만 이전의 사회체계가 완전히 무너진 상황에서 저마다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군벌 간 피비린내 나는 내전에 돌입한다. 군벌뿐만 아니라 다수 ‘인권운동가’ ‘독립운동가’들도 대통령 취임 후 ‘독재자’로 변모해 장기집권을 도모했다.


‘백인들의 압제’로부터 조국을 해방시킨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Robert Mugabe. 1924~)는 집권 후 ‘적폐청산’을 이유로 무리한 해외자본 철수를 요구해 경제를 파탄냈다. 일자리와 상품이 사라지자 그는 물자를 가진 자는 시장에 내다팔아야 한다고 강제했다. 한정된 자원이 고가에 유통되자 지폐를 마구 찍어댔으며 하이퍼 인플레이션(Hyper Inflation)이 야기됐다. 무가베가 이제는 싼 값에 팔라고 윽박지르자 물건을 파는 사람들마저 도산해버렸다.


그 결과 2002~2008년 짐바브웨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62%’를 기록했다. 그 와중에도 무가베는 주요 야당인사를 체포해 고문·암살하는가 하면 1980년대에는 반대파 부족 2만여명을 북한 지원을 받아 ‘학살’했다. 국민의 80%가 실업자가 됐지만 무가베는 수도 근교에 290억원 상당의 초호화별장을 짓는가 하면 2009년 자신의 생일파티에서 초고가 양주 수천 병을 동원했다. 이같은 아프리카의 혼란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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