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순직 논설주간

과거를 정리하는 일은 피로감을 넘어 이제 지칠 정도가 되어가고 있다. 사법농단이라며 전(前)정권 시절의 대법원장이 감옥에 가고, 대통령을 지낸 두 사람도 갖가지 명목으로 구속(한분은 보석) 재판을 받는다.


전정권에서 야심차게 추진된 4대강 사업이 환경문제 경제성문제 등의 이유로 일부가 원상으로 돌아갈 처지이고, 시도 때도 없는 친일청산이며, 역사 해석을 놓고 논란을 벌이는 교과서 문제 등등 온통 과거 얘기다.


심지어는 수십년, 1백년 가까이 재학생 선후배들이 애창해온 각급 학교의 교가나 응원가가 친일 성향의 인사가 작사 또는 작곡했다며 부르지 못하게 한다는 말까지 나오는 형국이다.


어느 정권이나 새로 들어서면 자신들의 정통성이나 차별화를 위해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과거청산을 해왔다. 그러다가 국민들이 피로감을 느끼면 슬그머니 꼬리 내리고 현실의 문제에 집중하는 게 순서였다. 여기까진 이해할 만하다.


이 정부는 그게 아닌 것 같다. ‘과거를 제대로 정리하고 넘어 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어디까지, 언제까지 과거에 매달릴 것인지 다수의 국민들은 피곤해하고, 걱정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과거 정리의 명분에 대한 시시비비가 아니라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답답하고 막막하다는 데 있다. 한 달에 한번 씩 발표되는 고용동향 통계를 접하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통계청이 발표한 2월 고용동향을 보자. 2월 전체 취업자는 2634만명으로 작년 동기보다 26만3천명이 늘어, 작년 1월(33만4천명증가) 이후 13개월 만에 가장 많이 늘었다. 그 내용을 보면 60세 이상 취업자 수는 1년 전보다 39만7천명이나 대폭 증가한 반면 같은 기간 30대는 11만5천명, 40대는 12만8천명이 감소했다.

이게 고용 상태의 호전인가


정부가 노인 일자리 사업 예산을 대폭 늘리면서 노인들이 쓰레기 줍기 또는 노인 돌보기 같은 하루 2~3시간 일하는 봉사활동 형식의 일자리가 늘어난 것이다. 반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한창 지출이 많을 30,40대의 고용이 이처럼 줄어드니 고용사정은 심각함을 넘어선다.


실상이 이러한데도, 설마 심각함을 모를 리가 없으련만 홍남기경제부총리는 “13개월 만에 취업자 수 증가가 20만 명대로 회복돼 다행”이라고 말한다. 국민경제를 책임진 경제부총리로서 고용실태를 국민들에게 이렇게 설명해도 되는 것인지 묻고 싶다.

일자리 정부를 내건 이 정부의 각료이니 대통령에게 그렇게 보고하고, 국무회의에선 자화자찬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일자리 구하지 못해 막막해하는 국민들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웬만한 동네 먹자골목엘 가보자. 초저녁 반짝 손님이 웅성거리다가 이내 적막으로 변하는 곳이 많다. 3,4층 짜리 상가 건물의 2,3,4층은 빈 가게가 수두룩하다. 장사가 안되니 공실률이 높아만 간다.


최저임금이다 근로시간단축이다 해서 자영업자들은 아우성이고, 고용이 줄다보니 소비가 위축되는 지극히 간단한 이 경제순환 원리를 정부만 모르는 것 같다.


아니 모를 리는 업고, 자신들이 벌려놓은 일이니 애써 모르는 채 하는 것이라는 짐작이다. 최저임금인상이나 소득주도성장 정책 효과가 1년만 기다리면 나타날 테니 참고 기다리자는 정부 말을 믿어야 할지 국민들은 의심쩍고 불안하다.

이쯤 해선 이제 미래 비젼이 시급

집권 초기도 아니고 이제는 좀 긴 안목의 정책들이 나왔으면 한다. 당장 먹고 살기 힘든 국민들 목소리에 제발 귀를 기울이기 바란다.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의 불평 불만으로 치부하면 해결책이 안나온다. 펼쳐본 정책이 효과가 없으면, 부작용이 크면 수정 보완하면 된다.


체면이나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다. 정책 당국자들에겐 그럴지 몰라도 서민들에겐 사활이 걸렸다. 생사의 문제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절체절명의 어젠다는 수없이 많다. 인구절벽에 처한 인구감소, 교육 주택 문제, 고령화사회의 노인 문제, 그리고 미래의 먹거리를 제공할 성장동력 문제 등 온 국민이 지혜를 모아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이러한 과제들에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것이 아닐 터. 그러나 국민들에겐 정부의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이런 과제들이 정책 우선순위에서 과거정리에 밀려 있거나, 의지가 약하거나, 비젼이 없거나 일 것이다.

국민으로부터 5년간 국정을 위임받은 대통령은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야당이나, 현 정권과 불편한 언론, 노조, 태극기부대 등 모든 반대세력을 설득하고 포용하는 리더십이 대통령에게 필요하다.


야당 협조가 없어 국회에서 필요한 입법이 안돼 일을 못한다는 설명은 스스로 ‘리더십 부족’을 인정하는 셈이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라고 대통령으로 뽑은 것이다. 지금은 다소 힘들고 어렵더라도 조금 참으면 희망이 보이는 미래 비젼을 제시하고 국민적 통합을 이뤄 나가는 것이 통치다. 리더십이다. <투데이코리아 논설주간>

필자약력
△전)동아일보 경제부장. 논설위원
△전)재정경제부장관 자문 금융발전심의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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