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순직 논설주간.

“경제정책 참 편하게 운용하고 있다” 며칠 전 만난 원로 경제관료의 말이다.


여름철 무더위를 앞두고 에어컨 맘대로 쓰도록 전기료를 인하하겠다고 정부가 발표하자 한전, 아니 한전 소액주주들이 들고 일어났다. 정부 요구대로 요금을 인하할 경우 매년 3000여억원의 손실이 우려된다는 이유다.


한전은 산업은행이 주식 51%를 보유한 공기업이면서 동시에 42만명에 달하는 소액주주가 49%를 투자하고 있는 상장기업이다. 정부 결정으로 손실이 나면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야 피해를 감수하겠지만, 소액주주들은 참을 리 없다. 만약 한전 이사회가 이를 승인하면 형법상 배임 소지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자 정부는 재정 투입을 들고 나왔다. 손실만큼 국고로 메꿔 주겠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이런 일은 비일비재다. 작년 6월 한국수력원자력은 정부 지시로 월성1호기 조기폐쇄를 결정해야했다. 이때도 엄청난 손실이 불가피, 정부 방침을 따르면 임원 이사진이 배임 책임을 질 우려가 제기됐다. 부랴부랴 결정을 내려야 할 임원들을 손해배상책임보험에 가입시켜 주고 이런 결정을 하도록 했다.


정부가 그럴듯한 명분의 정책을 만들어 발표한다. 많은 사람이 박수 칠 일이다. 그런데 막상 이 정책을 시행하려면 곳곳에서 문제점이 드러난다. 천문학적인 자금도 필요하다. 그러면 정부가 보완책으로 내놓는 것이 바로 재정지원이다.


재정지원이란 뭔가. 국고지원이다. 국민세금이다. 물론 국민세금은 국민을 위해 쓰여야 한다. 그런데 잘못된, 미숙한, 정교하지 못한, 철저한 검증이나 검토 없이 추진하는 정책을 내놓고 문제가 발생하면 국민세금으로 메꿔 부작용을 줄이고 비난을 피하는 것은 올바른 정책수행 과정이라고 할 수 없다.

최저임금을 무리하게 올려 자영업자 청소년알바 등에게 문제가 생기니 막대한 정부자금을 풀어 미봉으로 대처했다. 52시간 근로시간 정책도 마찬가지다. 일자리정부가 들어선지 2년이 넘었어도 고용사정은 좀처럼 호전되지 않는다. 그러자 정부는 온갖 아이디어를 짜내 돈 풀어 초단기 알바 고용을 창출, 고용이 늘었다고 국민들을 우롱한다.

정책 입안자, 공무원 모두 문제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고 매번 정책 마다 어리숙해, 결국 재정으로 땜질하는 식이다. 그 이유는 뭘까. 정책입안자들의 안이한 자세 때문이다. 그럴듯한 명분의 정책을 만들어 대통령에게 보고하면, 대통령이야 좋은 정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시행하려면 문제 투성이다.


그렇다고 거둬 들일 수도 없다. 그러니 보완책이라고 내놓는 건 항상 재정투입이다. 이런 문제의 원인은 뭘까. 정책입안자의 자질 또는 안이한 자세가 아닐까싶다. 현장을 모르거나 아예 무시하고 자신들의 이념 이상만을 지상의 개념으로 설정하고 행동하기 때문이 아닐까.

다음으로는 해당 부처와 공무원들의 자세다. 이 정부 들어 공직사회의 가장 큰 변화는 무사안일 복지부동이 체질화된 느낌이다. 적폐청산 과거정리 차원에서 잘못된 일을 처리하면서 처벌 범위를 고위직에 한정하지 않고, 중하위직 실무자까지 확대한 것이 큰 원인으로 꼽힌다.


상관 지시로 행한 행정행위가 정권이 바뀌니 적폐로 몰려 옷을 벗거나 망신을 당하고 감옥에 가는 마당에 누가 열심히 일하겠느냐는 것이 다수 공직자들의 볼멘 소리다. 현장을 잘 알고 행정노하우가 충분한 관료들이 손을 놓으면 정책은 헛돈다.

솔솔 흘러나오는 증세론

문제는 지금처럼 국고 여유가 있을 때는 재정으로 정책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런데 경기가 호전되기 보다 나빠진다는 우울한 전망이고, 세수 또한 줄어들 게 뻔한데 지금과 같은 방식의 정책운용은 어려워 질 것이다.


벌려놓은 정책들은 거둬들이기 어렵다. 또 총선 앞두고 수많은 선심성 정책들이 나올 것이다. 나라 금고에 여윳돈이 별로 없으면 어찌할 것인가. 벌써부터 공기가 심상찮다.


이른바 증세론(增稅論)이다. 법인세를 올리자, 1가구1주택자 양도세 비과세도 없애자, 신용카드 소득공제도 축소하자, 소득세 면세 비율도 축소하자는 등 각가지 세금 짜내기 아이디어가 정부 여당에서 솔솔 흘러 나온다.

포퓰리즘 정책에 증세가 겹친다면 악몽이다.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 경제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경제정책 당국자들은 정책 하나 하나에 자신의 명패가 붙어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만에 하나 자리에서 물러나고, 정권이 끝나면 그만이라는 인식하에 일을 하는 공직자가 있다면 그는 국민을 희생양으로 한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다.


설익은 정책 내놓고 문제 생기면 재정으로 막는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정책은 아무라도 한다. ‘참 편한 정책을 편다’는 말이 더 이상 들리지 않았으면 한다.

필자약력

(전)동아일보 경제부장, 논설위원

(전)재정경제부 금융발전심의위원

저작권자 © 투데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