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순직 논설주간.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전(前)정권이 시행한 정책을 수정 또는 폐기하는 경우를 흔히 본다. 과거 정부의 잘못이나 흠을 드러내 고침으로서 자신들의 선명성이나 의지를 표명하려 함일 것이다. 선진 외국에서도 전혀 없는 일은 아니지만, 우리의 경우 좀 심한 감이 없지 않다.

문재인 정부 들어 눈에 뜨이는 과거 정부 정책 뒤집기 사례로는 ‘4대강 사업’ ‘위안부 한일(韓日)간 합의 문제’ ‘특목고 폐지’ ‘교과서 수정“ 등이 꼽힌다.

최근 논란이 심한 특목고 폐지와 관련, 특히 전주 상산고 문제가 주목을 끈다. 전북교육청은 자사고 재지정 평가에서 재지정 기준 점수를 통상 70점에서 80점으로 대폭 높여 79.61점이라는 매우 높은 점수를 받은 상산고를 재지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다른 지역 교육청은 대부분 커트라인을 70점으로 운용하는데 유독 전북교육청만 80점으로 강화, 상산고 재지정 탈락을 추진 중이다.

강원도의 민족사관고는 79.77점을 받아 향후 5년간 자사고 지위를 유지 받았다. 전북이었다면 민사고 역시 상산고처럼 탈락한다. 같은 대한민국에서 전북에선 안되고 강원도에선 된다. 왜 이런 사태가 빚어지는가.

우선 특목고 제도에 문제가 있으니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 문재인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진보 성향의 민선 교육감들도 이에 동조하기 때문이다. 자율형 사립고등학교 같은 특목고 시스템에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도를 보완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력은 해보지도 않고 아예 없애겠다는 발상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일부 교육감이나 장관 등 정부 고위 인사들의 자녀는 외고 과학고 등을 다녀 명문대학에 입학한 사례가 많다니 기가 찰 일이다.

전(前)정권 그림자 지우기보다 국가 백년대계(百年大計)로

자사고 폐지는 전정권에서 시행한 제도여서 문제가 많으니 폐지하자는 주장이다. 그 과정에서 정부 정책 취지에 맞춰 적지 않은 사재(私財)를 들여 인재 양성에 나선 사람들의 실망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학생과 학부모들의 혼란을 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도 지방교육감은 불도저식 밀어붙이기고, 교육부는 교육감 재량이라며 뒷짐이다.

이명박정부가 의욕적으로 시행한 4대강 사업도 도마에 올랐다. 부작용이 많으니 보를 해체해야 한다는 것이 이 정부의 방침이다. 일부 강의 경우 주민들의 보 해체 반대에도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박근혜정부에서 일본정부와 합의한 위안부 피해자 보상 관련 문제도 정권이 바뀌면서 폐기됐다. 물론 박근혜정부의 큰 실수였다. 그러나 정부와 정부간의 합의는 합의다.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 국민 의견이라면 폐기할 수 있다. 그러나 절차와 방법 문제다.

외교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처리했어야 옳다. 전정부에서 행한 협상을 지키자는 것이 아니라 수정하든, 폐기하든 외교채널을 가동했어야 한다. 이런 식이라면 상대국 정부가 우리 정부를 신뢰하고 외교 행위를 마음 놓고 할 수 있겠는가.

미래를 짊어질 어린이들의 교육은 중요하다. 그들을 가르칠 교과서 또한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이 교과서가 이명박정부 때 다르고, 박근혜정부가 다시 고치고, 문재인정부가 또다시 수정하고.. 무슨 이런 나라가 있는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학자들 불러다가 위원회 만들어 교과서를 자신들의 뜻이나 이념에 맞춰 수정하다 보면 학생들은, 아니 국민들은 어쩌란 말인가.

백년대계, 민족의 미래를 내다보며 교과서를 만들어 우리의 후세 교육에 나서야 한다. 그러려면 정권 차원에서 교과서를 만들면 안된다. 수정할 필요가 있다면 누가 보아도 존경할 사람들을 모셔 위원회를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이 정권 임기가 지난 먼 훗날에 수정작업을 마치도록 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국가 위원회 운용의 권위, 신뢰성 문제

4대강 사업만 해도 시행 당시 타당성조사 위원회도 만들고, 전문가들이 머리 맞대고 궁리한 결과다. 해체 과정 또한 전문가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결론을 도출했다. 대한민국 전문가인데 이명박정부 전문가 다르고, 문재인정부 전문가 다르다. 국민들은 종잡을 수가 없다. 위원회 운용의 허구성이다.
큰 사업을 착수하거나, 잘못된 사업이나 정책을 수정 폐기하려면 사심(私心)이 배제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정권 임기내에 일을 끝내도록 해선 안된다.

과거 정권의 그림자 지우기식 정책 수정은 위험하다. 만에 하나 이 정권이 정권 재창출에 성공하지 못한다 치자. 그럼 다음 정권이 탈원전 정책이나 소득주도성장 정책 등을 모두 폐기하려 들면 어찌할 것인가.

예타(豫妥. 국책사업 예비타당성조사)제도를 무시하고 일부 지방 사업을 시행키로 한 것도 사실 문제다. 타당성도 없는 사업을 특정 지방자치단체장 생색 내주려고, 총선용으로 예타를 면제하고 시행했을 때, 엄청난 국고가 투입되고도 훗날 애물단지가 될 공산이 크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 몫이다. 정치인들의 싸움에 국민들 등골 부러진다.
필자약력
(전)동아일보 경제부장, 논설위원
(전)재정경제부 금융발전심의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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