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등장했다. 정부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WTO에 개도국 지위 개선을 요구하며 제시한 마감 시한(10월 23일)이 한 달 여 앞으로 다가옴에 따라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는 방안 검토에 들어갔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7월 하순께 “한국 등 부자 나라들이 WTO에서 개도국 혜택을 받지 못하도록 모든 수단을 강구하라”고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 지시했다. “앞으로 90일 후까지 WTO 논의에 진전이 없으면 USTR이 자체적으로 부적절한 국가를 골라 개도국 처우를 없애라”는 구체적인 시한까지 제시했다. 단순한 엄포가 아니라 구체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 지시는 WTO 내 가장 큰 화두인 수산물 보조금 금지와 전자상거래 협상에서 중국과 인도가 개도국 지위를 이용해 규제 대상에서 빠져나갈 움직임을 보이면서 미국 등 선진국과 갈등이 촉발됐다는 점으로 미루어 중국과 인도를 겨냥한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개도국 지정이 부적절한 나라’ 명단에 한국, 멕시코, 터키 등 11개국의 이름이 올라 있어 그동안 WTO에서 개도국 지위를 유지해온 한국도 불똥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특히 미국은 지난 2월 WTO 일반이사회에 개도국 결정을 위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거나 가입 절차를 밟고 있는 국가 ▲주요 20개국(G20) 회원국 ▲세계은행 분류 고소득 국가 (2017년 기준 1인당 국민소득 1만2056달러 이상) ▲세계 무역량 0.5% 이상인 국가 등 4가지를 제시하고 이들 항목 중 하나라도 해당되면 선진국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유일하게 4가지 모두를 충족시키는 국가다.
WTO는 1995년 출범 이후 개도국을 국제 자유무역질서 안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개도국 특별대우를 시행해 왔다. 개도국 우대조항은 지난해 기준 155개나 된다. 수입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거나 국내 생산품에 대한 보조금 지급이 가능하며 관세인하 폭과 시기 조정 등에서 느슨한 규제가 적용된다. 이러한 특혜는 그동안 WTO 내에서 여러 차례 문제가 제기됐지만 개도국들의 반발로 번번이 무산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WTO 차원에서 후속 조치가 취해지지 않을 경우 미국 정부 혼자서라도 개별적인 행동에 나설 것임을 예고하고 있어 예사롭지 않다.
한국은 1996년 OECD에 가입할 당시 선진국임을 선언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하지만 농업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조건부로 개도국으로 남는데 성공, 지금까지 WTO 내 다자간 협상에서 개도국 지위를 유지해 왔다. 한국이 WTO 개도국 지위를 잃을 경우, 쌀 관세율을 현행 513%에서 154% 수준으로 대폭 낮춰야 한다. 선진국 민감 품목 조항을 적용해 관세감축 폭을 3분의 1로 줄인다면 393%의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 하지만 대신 국내 소비량의 4%에 해당하는 저율관세할당물량(TRQ)을 제공해야 한다. 농업보조금도 현재 1조 4900억 원에서 8천200억 원 수준으로 크게 줄여야 한다.
WTO는 만장일치로 안건을 처리하는 관계로 개도국 체계 개편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 등 선진국들은 양자 협상을 통해 개도국 졸업을 압박할 것이 확실시 된다. 미국은 지난 3월 양자 협상을 통해 브라질의 개도국 지위 포기를 이끌어냈다. 지금까지 미국의 요구에 굴복, 개도국 지위 포기 선언을 한 나라는 브라질을 위시해 대만,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싱가포르 등 4개국이나 된다. 멕시코와 브루나이 등 몇 개 나라도 마감 시한 전에 개도국 포기 선언을 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쌀을 제외한 농산물시장을 미국에 거의 개방한 상태다. 하지만 미국은 이미 한국의 쌀 관세율을 200~300%로 낮추라고 요구한 바 있어 자동차 관세 부과 등을 무기로 압박을 가해 올 가능성이 높다. 이젠 한국의 WTO 개도국 탈피가 시간 문제일 뿐 불가피할 것으로 여겨진다. 상당수 전문가들도 언젠가는 개도국을 졸업할 것이기 때문에 미리 대비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강조한다. 바야흐로 농업정책의 대전환을 모색해야 할 때가 왔다 하겠다.
하지만 농민들의 반발이 문제다. 무엇보다도 개도국 졸업에 앞서 급격한 충격과 혼란을 덜기 위한 연착륙 방안이 다각도로 모색돼야 한다. 특히 농민들이 수용할 만한 지원 방안과 함께 농촌과 농민을 근원적으로 살릴 수 있는 묘책이 강구돼야 하겠다. <투데이 코리아 주필>
약력
전) 연합뉴스 경제부장, 논설위원실장
전) 언론중재위원회 중재위원
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