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살아 가장 좋은 점이 무엇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주저치 않고 대답하겠다. 아침마다 기대에 차서 눈을 뜨는 일이라고.
맑은 공기에 상쾌해진 몸으로 기다리는 친구들을 만나볼 생각에 마음이 들떠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일이라고.
그럼, 기다리는 친구들이란 누구인지 궁금할 것이다. 현관을 열고 나가서 눈 맞추는 모든 사물이 그 친구들이라 말할 수 있겠다. 어제보다 조금 더 벌어진 무궁화의 꽃망울, 장미의 봉오리, 조금 더 무성해진 텃밭의 고구마 줄거리, 대기에서 퍼져 조금씩 흩어져 가는 안개, 집 모퉁이 쪽에서 살짝 모습을 보이는 고양이의 꼬리, 잔디 밭 중간에 난데없이 나타난 개망초에 내린 영롱한 이슬 등등...
아침이 행복하면 하루 종일 행복하다.
지난주에 우리 부부보다 12살이 적은 띠 동갑 부부가 찾아왔다. 정년을 앞둔 남편을 집에 혼자 둔 채로 부인은 딸과 지난달 유럽 여행을 하고 왔단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옛날 우리 부부가 그 나이 때 유럽 여행을 하면서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생각난다. 일본 여자들이 남편이 아닌 딸과 함께 유럽을 다니고 있었다. 일본인 특유의 조용한 모습을 한 딸과 어머니, 나한테는 엄청 부럽게 보였다. 나도 딸이 있었지만 이미 시집을 가서 그런 행운은 남은 내 생애 동안 올 수 있을까 싶었다. 이제 한국이 일본의 뒤를 쫓아가고 있는 것이다. 딸들의 결혼은 늦어지고 남편의 식사를 염려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경제력과 여권(女權)이 함께 신장됐다.
나보다 12살이 많은 띠 동갑 분들은 어떠한가?
그분들은 일제 강점기에 취학 전 어린 시절을 압박과 고통 속에서 보냈다. 이후 무엇보다 참혹한 동족상잔의 전쟁 속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데다가 전후 극심한 가난 속에서 사춘기와 청춘을 보냈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마 가장 가혹한 운명의 세대가 아닌가 싶다. 그 때에는 해외여행조차 엄격한 제재를 받을 때였으니 모녀 여행은커녕 개인 여행조차 어찌 가능했겠는가?
지금이라도 모녀 여행을 갈 수 있다고? 그게 가능하겠는가? 사람이란 평균 최대 주기 100년을 가지고 태어난 한정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앞으로 모녀 여행이 가능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혹시 딸애가 이 글을 읽고 엄마 품을 파고들면서(?) -우리 여행 가자- 하고 애교를 부린다 해도 이젠 다 큰(?) 딸이 늙은 엄마한테 이래라 저래라 할 것 같아서 사양하고 싶은 생각이다.
이렇게 세대란 참으로 가슴 아린 유대 관계로 서로 맺어져 있다고 보아도 되겠다. 그러니 386세대니 586세대니 하는 말로 그들만의 유대를 강조하지 않는가? 세간에 경제 공동체니 운명 공동체니 하는 말이 회자되는데 세대란 확실히 운명 공동체는 되는 것 같다.
얼마 전에 내가 다니는 영천시 교육문화회관 제과·제빵반의 클래스메이트들이 우리 집을 방문해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담당 교수님과 회장, 총무 세 분에게는 나의 저술인 –은경 할머니 시골로 가다- 책 한 권씩을 증정했다. 마음 같아서는 회원들 전부에게 한 권씩 주고 싶었지만 나 역시 구매해야 하는 처지인 지라 조금 아껴야 했다. 모두 내가 70 할머니인 것에 놀라고 감탄하고 시골에 살러 내려온 것에 신기함을 감추지 못했다. 대부분 3,4,5십대 젊은이들이다. 드물게는 20대도 있다. 모두 영천에 거주하는 주민들이다. 앞으로 제과사, 제빵사의 꿈을 꾸면서 예쁜 카페나 빵집을 내려고 마음먹은 희망에 찬 친구들이다. 친구들이란 말을 쓰다 보니 그들 모두가 친구 같은 생각이 든다.
세대가 다른 친구 관계가 성립된다는 이야기는 서양에서는 많이 들었지만 수직적인 유교문화가 아직도 상존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쉽지 않다. 30대 젊은 엄마들로서는 그들이 제일(?) 싫어하는 시어머니와 동년배인 70 할머니를 분리 생각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 사회에도 세대를 넘은 아름다운 인간관계가 넘쳐났으면 싶다. 친구 관계란 동질감을 배경으로 주로 성립되는데 나이를 넘어 같은 꿈을 공유한다는 이유로 충분히 가질 수 있다. 아마 우리 빵반은 그림 같은 카페에서 근무하겠다는 꿈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을까? 아마 5년 후 10년 후에는 서로가 자신이 봉사하는 카페의 사진을 서로 공유하며 행복해 하는 시간이 꼭 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일제 강점기의 뼈아픈 시기도, 악몽 같은 무서운 전쟁도 겪지 않은 세대인 것에 감사한다. 고생해 오신 앞서의 세대가 있었기에 그것이 가능했다. 어린 시절, 가난은 겪었지만 조국이 폐허를 딛고 점점 부강해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며 살아온 시절이 있어서 행복했다. 자식 세대가, 뒤이어 오는 세대가, 여유롭게 자신들의 생활을 엮어가는 것을 보면 흐뭇하기도 했지만 진정 부러웠다. 하지만 그들 모두의 행복은 우리 세대의 밑받침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는 자부심으로 아래 세대들을 따뜻하게 바라본다.
이제 대한민국의 미래는 그들 뒷 세대에게 맡기고 나는 시골에서 편안한 행복을 즐긴다. 아침마다 기다리는 친구들을 만나러 솟구쳐 일어난다. 지난밤에 꾸었던 꿈은 몇 년 후에 내가 이루어낼 꿈이다. 행복한 사람의 꿈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보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