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블라인드를 올리고 창밖을 내다보는 그 때, 여느 때와 똑같은 일상의 반복인줄 알았는데 그 날은 그렇지 않았다. 분명히 달랐다. 파초 잎처럼 넓고 큰 잎 새에 뾰족한 붉은 꽃을 매달고 있는 칸나를 제외하면 다른 모든 초록색 식물 위에 하이얀 눈처럼 내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는 말이다. 그래, 서리였다. 그렇게도 하얀 서리가 텃밭 가득 내린 것을 보자 첫눈을 본 것처럼 흥분되었다. 이 나이 먹도록 눈처럼 하얀 서리를, 내가 과연 본 적이 있는가?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도시에서도 잠깐은 눈에 띄었을 수 있겠지. 하지만 이렇게 품이 넓은 하얀 옷을 떨쳐입고 손님처럼 불시에 나를 방문해 올 줄은 몰랐다.
가까이 가 손을 대 보니 눈보다 더 빨리 녹는다. 그렇게 잠깐을 보내고 서리는 스러졌다. 하지만 첫서리는 아픈 상처를 남기고 갔다. 따뜻한 하오의 햇볕 덕분에 무럭무럭 피어나던 호박꽃과 호박잎이 모두 얼어 시커멓게 변해버린 것이다. 달력을 살펴보니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은 10월 24일이다. 실제로 영천에 첫서리가 내린 그 날이 28일이었으니, 며칠 사이에 계절은 어김없이 흰 옷을 입고 도착한 것이다.
나이를 먹는 것이 가끔은 속상하지만 계절이 바뀌는 것은 그렇지 않다. 자꾸 계절이 바뀐다는 것은 한 해 한 해가 지나가는 것이고, 세월이 흐른다는 얘기이며, 그리하여 한 살 더 나이를 먹는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겠지만, 계절이 바뀌는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는 그런 아쉬움이나 슬픔이 느껴지진 않는다. 기다리고 있던 손님이 찾아온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반가운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이다.
지난여름이 아름다웠던 만큼 이번에 오는 겨울도 또 아름다울 것이다. 지금은 겨울로 가는 길목, 간절기이다. 해마다 순서대로 오는 계절이 무척이나 신기하다. 어느 여름은 길고 무덥기만 했고 어느 여름은 적당한 비와 저온으로 무난히 지나가기도 하지만, 여름은 결국 끝을 보여줬고 가을의 길목에서 지금 겨울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계절에 농촌엔 할 일이 많다.
지난봄에 모종으로 심은 팥을 수확했다. 이번엔 어쩌다가 텃밭에는 농약을 한 번도 치지 않게 되어서 수확의 양은 미미했다. 게으름을 부리다가 말 그대로 무농약 제품을 생산하게 된 것이지만, 수확하는 데도 벌레 투성이라 그것이 싫어서 내년에는 몇 번 꼭 약을 치리라 다짐했다. 들깨는 양이 많지 않아 수확하지 않고 밭에 그냥 버려두었다. 나중에 퇴비가 되겠지.
팥을 수확한 자리에 마늘을 심어야 한다고, 종자용(?)으로 저장해 둔 마늘의 쪽을 갈라서 준비해 놓으라고 형님이 말한다. 작년 마늘의 소출이 좋지 않아서 전부를 종자용으로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니까 초보 농부는 그럴 수도 있다고 웃는다.
무궁화를 전정해 주기 위해 서울서 내려온 남편의 친구 분은 내가 튤립 얘기를 꺼냈더니 9월에 벌써 심어야 했다는 것이다. 아닌데... 작년엔 11월에 심은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지난해 11월 초에 제주도 여행을 갔다가 들른 농원에서 파는 튤립 구근을 사 가지고 왔던 생각이 난다. 그래서 나는 튤립은 11월에 심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구덩이를 깊게 파고 마늘쪽처럼 생긴, 봄부터 보관해 처마 밑에 매달아 놓았던 구근을 심는다. 삽질을 하는 것도 조금 익숙해졌다. 삽으로 힘껏 땅을 찍고 오른 신발 바닥으로 삽의 윗부분을 팍 눌러 힘을 주는 것이 요령이다. 구근은 뾰족한 쪽을 위로 하고 엉덩이처럼 통통한 쪽은 밑으로 해야 한다. 이것도 거꾸로 심는 실수를 할 수 있다. 큰 놈도 있고 작은 놈도 있는데 이게 다 겨울을 잘 보내고 내년 봄 예쁜 꽃을 보여줄 수 있을까?
오후엔 영천에서 복숭아 농장을 하는 남편의 후배 분이 찾아 왔길래 동림원 예정 지역에 함께 갔다. 갖가지 과일을 심어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농원을 만들겠다는 남편의 포부에 감탄하면서 –쉽지 않은 일이군요.- 말한다. 이번 가을에는 농원 주변을 조경수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고 내년 봄에는 배수와 관수를 위한 토목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남편은 설명해준다. 과일 종류별로 작은 단지를 만들고 그 사이사이는 곡선의 황톳길이 있을 것이라고. 그 것은 나의 아이디어라고 아내를 추어주기도 한다. 황톳길 주변에는 작은 꽃과 허브로 방문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 줄 것이라고 나는 덧붙여 말한다. 그래서 올해 텃밭 한 구석에 시험 삼아 허브 몇 종류를 심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월동이 고민이다.
율마와 장미 허브를 화분에 옮겨 심어 집안으로 들여다 놓았다. 오렌지 레몬 나무도 안으로 들여놓아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노지에 남는 것은 라벤더뿐이다. 멋모르고 구입한 유칼립투스는 여름내 무럭무럭 자랐다. 이놈이 겨울을 잘 버틴다면 정원 안에 있는 것보다 주변의 조경수로 편입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과연 내년 봄까지 생존할 수 있을까?
농촌에 살면서 계절과 무관하게 지낼 수 없다. 새 옷을 입고 까꿍! 하면서 느닷없이 방문하는 손님에게 타박할 수 없다. 그 손님은 늦던 이르던 오게 되어있는 손님이기 때문이다. 그 또한 온대지방에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누릴 수 있는 행운이라는 것을.......나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때가 되면 계절은 바뀐다는 평범하면서도 감사한 진실을.
손님을 기다리며 묵은 청소도 하고 새 계절의 옷장만도 하자.
이왕 오는 손님 즐겁게 호들갑을 떨며 맞이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작가>
조은경 약력
△2015 계간문예 소설부문 신인상 수상
△소설 '메리고라운드' '환산정' '유적의 거리' '아버지의 땅'등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