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경 작가
▲ 조은경 작가

 

대설이 한참을 지나도록 눈 소식은 없지만 매일 같이 마당과 텃밭에 하얗게 서리가 내리는 것을 바라보면 겨울이 깊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계절은 주변을 돌아보고 집안을 정리하고 내 몸을 보살피는 계절이기도 하다. 남편이 오랫동안 고생하던 전립선 비대증으로 수술을 받았다. 서울서 하는 수술이라 지난 주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다행히 수술 경과가 좋아 지인이 사다 준 꽃바구니를 가지고 예정보다 빨리 퇴원하게 되었다. 집에 돌아와 꽃바구니를 씌운 엷은 비닐을 벗기고 보니 꽃들이 싱그럽다. 하얀 백합 봉오리가 네 개씩이나 되는데 모두 입을 꼭 다물고 있어 서운했다. 장미에게서 풍기는 향기도 좋지만 백합의 향기만큼 황홀하진 않다. 백합 가지를 꽃바구니의 오아시스에서 꺼내 설탕물에 담근 채로 가지 끝을 가위로 잘랐다. 그런 다음 다시 꽃바구니에 꽂아 주었다. 내 생각대로라면 분명 개화할 것이다. 역시 다음 날로부터 닷새간 네 개의 꽃봉오리는 순서대로 모두 피어났다.

꽃봉오리가 열리자 백합의 짙은 향이 방 안에 가득 찼다.

꽃바구니를 받으면 난 장미와 백합에게 가끔씩 그런 조처를 취한다. 그럼 좀 더 오래 꽃바구니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 옛날 꽃꽂이를 배울 때 얻은 지식이다. 지식과 경험이 합쳐져서 나이가 들수록 좀 더 풍부한 삶을 누리게 해 준다. 요사이 영천 교육문화회관에서 배우는 제과제빵반의 경험과 지식도 그런 풍요한 삶을 즐기기에 알맞다. 함께 배우는 30세 전후의 젊은이들은 앞으로 얼마나 그런 생활을 오래 향유할 것인가? 부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즐겁다. 70이 넘은 지금, 6개월 동안 젊은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서 빵 만드는 법을 배워냈다. 앞으로의 여생이 얼마가 되든지 나의 이 경험을 써 먹을 시간이 있을 것이다. 그 시간이 짧든 길든 또 다른 방향의 내 인생을 풍요하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꽃의 여러 모습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준다. 아름답고 향기 있는 꽃이 먼저 주목을 받지만 풀꽃이라고 해서 사랑받지 못 한다는 법은 없다. 여기에 김춘수의 꽃도 있고 나태주의 꽃도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의 “풀꽃”)

김춘수의 꽃은 상징으로서의 꽃이다. 여기서 꽃은 중요한 대상을 뜻한다. 의미 있는 존재를 뜻한다. 한편 나태주의 꽃은 실재로서의 꽃, 그러나 향기가 없는 보통 꽃이다. 아니 향기가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것 역시 오래도록 맡아야 느껴지는 그런 향기일 것이다. 오랫동안 들여다보아야 사랑스러움이 느껴지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연민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오래 참을성 있게 무엇을, 누구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 특히 풀꽃은 여리고 키가 작기 때문에 누구도 무릎을 꿇고 풀꽃과 눈높이를 맞추어 향기를 맡아보려 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만큼 관심을 가지는 사람의 눈에는 그 풀꽃이 예쁘고 사랑스러웠으리라.

동림원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식재될 예정이다. 과일이 숙성되기 위한 꽃은 유난한 모습과 향기가 드러나야 나비와 벌의 방문을 받게 된다. 나태주의 풀꽃과는 거리가 먼 놈들일지도 모른다. 풀꽃이란 산책 길가에 씨가 날아와서 스스로 싹을 틔운 놈들일 테니 동림원에서 구박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꽃의 세상도 인간 세상과 다름없이 큰 놈과 작은 놈, 향기가 있는 놈과 없는 놈, 예쁜 놈과 그저 그런 놈들로 갈리게 마련이다. 사람들 역시 큰 꽃, 화려한 꽃을 좋아하는 사람과 굳이 향기를 따지지 않는 사람과 평범한 꽃에 관심을 건네는 사람 등등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동림원에는 과일나무의 꽃뿐만 아니라 과일 나무들 사이 오솔길 가에도 꽃을 심을 예정이다. 물을 끌어와서 자그마한 연못을 만드는 주위에는 수국을, 연못 속에는 연꽃과 부레옥잠을 심을 생각이다. 수국은 화려한 꽃이다. 크고 화려함으로 어느 꽃에 지지 않는다. 흙의 종류에 따라 수국의 색이 변한다하니 그 현상에도 기대가 크다. 수년 전부터 키우고 싶었지만 이름 그대로 물이 많이 필요한 꽃임을 알았다. 심는 족족 한 해 여름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 말라 죽고 말았다. 이번에는, 연못 옆이니까 연못물을 퍼서 물을 주더라도 한 번 잘 키워보고 싶다.

물론 향기 짙은 백합에도 도전장을 내밀 생각이다. 구근을 4월경에 심어 피운다니 내년 봄이 기대된다. 다행히 튤립 구근도 심어봤고 칸나도 심어 보았다. 백합은 그늘을 좋아하는 꽃이라니 과일나무 그늘에도 잘 피어 있겠지.

겨울이 깊어가는 계절이다. 꽃이라곤 아직 봉오리를 안고 있는 동백 한 그루뿐이다. 대신 남천의 붉은 잎과 열매가 꽃을 대신할 만큼 불타듯 화려하다. 인생에 향기와 미소를 주는 꽃을 생각하니 추운 겨울이 춥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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