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현채 주필.

상장사 사외이사 임기를 제한하는 상법 시행령 개정안이 2월초 공포될 예정이다. 이에 따라 오는 3월 주주총회 시즌부터 사외이사는 한 기업에서 6년, 계열사를 포함해 9년 이상 재직할 수 없게 된다. 또한 퇴직 임원이 사외이사를 맡을 수 없는 기간도 현행 2년에서 3년으로 늘어난다. 이는 경영진의 독단을 견제해야 할 사외이사가 장기간 재임함으로써 발생하는 경영진과의 유착 가능성을 차단, 이들이 사실상 ‘거수기’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다. 사외이사의 임기를 제한하면 이들이 장기 재임을 위해 경영진에게 아부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전제로 한 것이다.

사외이사제는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도입됐다. 전문적 식견을 갖춘 기업 외부 인사를 경영에 참여시켜 대주주, 특히 오너의 전횡을 견제·감시토록 한다는 게 도입 취지였다. 하지만 사외이사 제도가 도입된지 20여년이 지났는데도 사외이사가 견제 역할을 하기보다는 대주주에게 유리한 의사결정만 해주는 거수기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외이사들이 ‘비싼 거수기’라고 불리면서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이유는 단순하다. 대주주인 오너가 고액의 보수와 연임을 미끼로 학교 동문이나 전직 임직원 등 자신의 뜻을 거스르지 않을 지인이나 권력기관 출신 인사를 주로 사외이사로 선임해 왔기 때문이다. 사외이사가 회사의 사업 내용을 잘 알지 못하는 것도 거수기로 전락하는 또다른 이유가 되고 있다. 이런 원천적인 문제 때문에 사외이사의 반대로 원안대로 통과하지 않는 안건 비율이 1%에도 못 미치는 현실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해 자산 5조원 이상 56개 재벌 소속 계열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사회 안건 6722건 중 사외이사 반대 등으로 원안대로 통과되지 않은 안건은 24건으로 0.35%에 그쳤다. 특히 총수 일가 일감몰아주기와 부실 계열사 부당 지원 등과 직결되는 50억원 이상 대규모 내부거래 관련 755개 안건은 100% 원안대로 통과됐다. 물론 안건 상정 전에 미리 이견을 조율하는 기업 관행을 고려할 때 원안 통과비율을 문제 삼는 것이 부적절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난 2년 반 동안 일감몰아주기나 부당지원 혐의로 공정위 제재를 받은 재벌이 대림·효성·태광·하이트진로·동부 등 6개나 되고 지금도 여러 기업들이 조사를 받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내부거래 안건의 통과율이 100%라는 것은 문제가 다분한 진기록이라 하겠다.

재계는 “정부가 획일적으로 사외이사의 임기를 제한하는 건 외국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것으로 임기 제한이 경영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과도한 행위”라고 반발하고 있다. 또한 오래 재직한 사외이사는 경영 등 기업의 내부 상황을 누구보다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데, 임기를 제한하면 그 자체로 사외이사 제도의 비효율성만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외이사 제도의 본래 취지를 살리기 위해 법적 강제가 불가피하다는 반론도 상당하다. 지금까지는 대주주나 CEO가 추천한 사람이 사외이사로 선임되어온 관행 때문에 이사회에서 경영진의 주장에 반기를 든 사외이사가 사실상 전무했을 뿐만 아니라 설사 있었다고 하더라도 다시 연임되기는 불가능했다. 또한 사외이사 대부분이 전문성이나 관련 경험과는 거리가 먼 고위 공직자나 법조인, 교수 등으로 채워져 온 것도 큰 문제다. 사외이사는 기업이나 오너의 방패막이 역할을 하라는 자리가 결코 아니다. 친여인사들의 낙하산 자리는 더욱 아니다.


하지만 임기 제한이 과연 최상의 카드인지 의문이 남는다. 우선 임기를 6년으로 제한하면 오너와의 유착관계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가 실증적으로 뒷받침될 수 있을지 아리송하다. 재계의 주장처럼 사외이사가 기업의 업무를 어느 정도 파악할 시점이 되면 임기 제한에 걸려 그만 둬야 해 오히려 비효율적일 수도 있다. 게다가 기업들이 지금처럼 계속해서 로비나 바람막이로 활용하기 위해 권력기관 출신을 대거 사외이사에 선임하거나 정부가 낙하산 인사를 내려 보낼 경우 임기 제한이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할 가능성도 높다.


그래서 그런지 일각에서는 사외이사 임기 제한이 문재인 정권이 챙겨주지 못한 대선캠프 인사들과 친여인사들을 대거 낙하산으로 내려 보내기 위한 포석이라고 주장한다. 총선을 앞두고 공천에서 탈락한 친(親)여권 인사들의 반발 출마를 막기 위해 이들에게 '떡'을 줘야 하는데 공기업 사장이나 상임감사 자리는 여유가 없어 궁리 끝에 만들어 낸 것이 이것이라고 강조한다.

법무부는 이같은 주장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하고 있지만 사실이 그렇다면 임기 제한은 개선이 아니라 개악이다. 사외이사가 거수기 오명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외이사가 대주주나 정부가 시켜주는 것’이라는 뿌리깊은 인식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선임 방식을 과감히 바꾸어야 한다. 독립된 외부 기관이나 주주, 우리사주조합 등이 사외이사 추천을 할 수 있게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이 검토돼야 한다. 그래야만 사외이사진이 자율성과 독립성이 보장된 업계 최고 수준의 전문가로 구성돼 경영진의 독단을 제대로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투데이 코리아 주필>


약력

전) 연합뉴스 경제부장, 논설위원실장

전) 언론중재위원회 중재위원

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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