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의 제왕과 기레기
언론인을 ‘무관의 제왕’으로 칭하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 언론사가 자사의 영향력을 과시하느라 스스로 ‘밤의 대통령’ 운운했듯이 대부분의 기자들이 그 말에 담긴 엄중한 뜻을 모른 채 무소불위의 언론권력 쯤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무관의 제왕’은 왕조시대의 사관들에게 공자의 후예’라는 뜻으로 붙여진 명예로운 별칭이다. ‘왜 사관을 공자의 후예라 했는가? 공자가 춘추를 쓰자 당대의 폭군들이 떨었다. 그의 붓 끝에서 임금답지 못한 임금은 강등되었고 권력의 숨은 악은 그 오명이 만고에 전해졌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소왕(素王), 즉 흰옷 입은 왕이었다. 역사를 기록하는 일이 이처럼 엄중하다는 의미에서 사관을 공자의 후예로 예우한 것이다.
언론인들에게 역사를 담당하는 사관들처럼 영광스러운 별칭을 부여한 것은 춘추필법으로 쓰라는 주문인 셈이다. 시대를 관통하는 눈으로 시와 비를 가리고 한 글자의 촌철(寸鐵)로 거악을 폭로하고 한 줄 문장으로 가려진 선을 표창하라는 뜻이다.
왕조시대 사관들이 춘추필법의 전범으로 삼는 고사가 있다. 서기전 548년, 제(齊)나라 최저(崔杼)가 그 임금 장공(壯公)을 시해한 사건이다. 태사가 이 사건을 ‘최저가 장공을 시살했다’고 사실대로 썼더니 최저가 그 사관을 죽였다. 이에 죽은 사관의 아우가 ‘최저가 장공을 시살하고 이를 기록한 사관을 죽였다’고 썼다. 최저가 사관의 아우도 죽였다. 이번에는 사관의 막내아우가 또 붓을 들었다. <‘최저가 장공을 시살하고 이를 기록한 사관을 죽였다. 사관의 아우가 이를 기록했는데 그 아우도 죽였다’> 이쯤 되자 최저도 어찌하지 못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남사(南史)라는 사관이 태사와 그 아우 사관들이 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죽간(竹簡 : 대나무를 쪼개 엮은 묶음)을 들고 달려갔다. 사초에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남사는 도중에 죽은 사관들의 막내를 만나 ‘사실대로 기록하였다’는 말을 듣고 안심하고 돌아갔다.
조선의 사관들은 직필을 천명으로 여겼다. <하늘은 우리 백성이 보는 것으로 보고 우리 백성이 듣는 것으로 듣는다(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聽)>는 서경, 태서(泰誓)에 근거한 직업관이다. 조선 태종 때 민인생(閔麟生)이라는 사관이 편전출입을 금지 당하자 감히 임금을 향해 “사관의 위에는 하늘이 있소이다”라고 외쳤다. 사생취의 결기가 아니면 불가능한 이 기개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춘추대의다.
언론과 권력은 태생적으로 불편한 관계다. 왕조시대만이 아니다. 언론자유를 법으로 보장하는 제도적 민주주의가 정착된 후에도 특히 한국의 권위주의 정권들은 언론과 회유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원시적인 탄압을 가했다. 한국 언론의 역사가 언론자유를 위한 투쟁으로 점철된 근저에는 지존도 꺾지 못했던 사관의 긍지를 언론의 표상으로 존숭하는 가치관이 있다.
동아·조선투위를 비롯한 숱한 해직기자들의 수난을 딛고 한국의 언론자유는 만개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선배 언론인들이 낭인으로 전전하면서 쟁취한 자유언론의 수혜자들인 오늘의 기자들은 ‘기레기’(기자 쓰레기) 소리를 듣고 있다.
“이러다가 ‘한국에서 기자를 비하하는 말’로 옥스퍼드 사전에 등재될라” 누군가 농반진반으로 한 말이지만 예사로 들을 일이 아니다. 어느 재담가가 만들어 냈을 이 말이 지금은 맘에 안 드는 기자를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로 통용된다.
여기에는 그 말이 현실을 반영하는 부분이 있어서일 것이다. <한국 언론신뢰도 22%, 4년째 부동의 꼴찌>영국 옥스퍼드대학교 부설, 로이터저널리즘 연구소가 실시한 세계 38개국 언론신뢰도 조사결과다.
춘추필법은 권력에 저항할 때만 적용되는가?